Do Koreans Believe Korea is the Country of Eastern Model of Morals?<이선훈 박사: 일본에서 한국을 말한다>

(사진은 내용과 관계 없음: 목련은 늘 부모를 생각하게 하는 꽃이다.  손바닥 처럼 넙죽한 꽃 잎이 마치 어머니가 두 손을 모아 자식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라…)

< Japan : Prof. Lee, Sunhoon>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하는 한국

필자는 한국을 방문하면 , 종종 지하철을 타곤 했습니다. 60대로 보이는 한 강건한 모습의 노인이 좌석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학생의 정면에 서서 좌석에서 일어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맞은 편의 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우렁찬 노인의 주장을 명확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노인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은 좌석에서 일어나며 비어있는 제 옆의 빈자리로 이동해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지하철에는 여기저기 자리가 비어 있었으며, 학생이 앉아 있던 자리는 노약자석도 아니고, 출입구에 가까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매우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한국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라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은 충분히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간주하고 싶습니다.

위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지하철을 타면,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지하철이 상당히 붐비는 상황에서도 노약자석이 비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노약자석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상황도 자주 목격하게됩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노약자석이란 노약자만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아니고, 노약자가 우선적으로 앉을 수 있는 좌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노약자석이 비어 있는 상황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가 동방예의지국이며, 매우 예의 바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동방예의지국이 혹시, 노인에 의해서 또는 연령에 의해서 지배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국가의 사회구조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상대에 비해서 연령이 높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은 권력과 우선권을 가지며, 연령이 높은 사람의 재량권에 의해서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간의 언쟁이 벌어지는 경우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상대에게 ‘나이가 몇 살이냐’ 고 추궁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누가 보아도 언쟁의 내용의 옳고 그름 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발언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현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는 예의란 스스로 보여주며 상대에게 합리적인 동의를 구해야 하는 매우 이성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장자가 자신 보다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언쟁이 벌어질 경우에, 연장자가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장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을 살려가며, 상대인 젊은 사람을 포용하며, 대화를 유도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의 잃어버린 연장자의 주장에 대해서 굴복을 강요 받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면, 그 사회는 연령대에 따라서 심한 분열현상을 발생시키게 될 것이며, 사회는 심각한 분열로 소통불능의 상황에 빠지게 되어 포용력 없이 강직하게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노인과 연장자의 경직된 독선에 대한 불신감을 극대화하며,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적인 의견의 창출과 질서의 확립마저도 심각하게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한국사회는 심각한 연령대별 갈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연령대별 갈등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어떠한 사안이든 상대적인 책임을 말하는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한 쪽의 책임으로 몰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연령대별 갈등의 책임이  젊은층의 노년층에 대한 예의 없는 행동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젊은층의 무례한 행동은 어디서부터 발생한 것일 까요. 현재 노년층이 된 사람들도 과거에는 젊은층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에도 당시의 노년층에게 이런 젊은층에 대한 무례함을 지적 받고, 비난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노년층이 젊었었던 시절에 노년층에 의해서 부당하게 무례함을 지적 받고, 꾸중을 들었을 때에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 까요. 나이가 어리다는 것만으로 하대 받으며, 부당하고 부적절하게 지적 받고, 무례한 사람으로 치부 되어 버리기도 했던 상황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 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나이가 많았다면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한 분들도 상당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을 다짐했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즉, 내가 연장자의 입장이 되더라도, 나보다 나이 어린 상대가 나와 같은 부당한 대우에 억울함을 삼키는 상황을 재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연령에 의해서 정당성과 우월성이 결정되는 사회적인 관습은 권위주의적인 사회풍조를 만들어 냅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2013년말 무렵에 한 종편방송에서 정치평론가들이 매우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논쟁의 끝부분에서 한 정치평론가가 상대에 대해서 나이가 7살이나 아래인 사람이 엄연히 xxx이사장이라는 호칭이 있는 데에도 xxx씨라고 불러가며 무례하게 대했다며 몹시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발언을 했던 정치평론가는 얼마 후에 국무총리 비서실에서 공직을 역임했고, 현재는 시청자미디어재단의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씨라고 호칭을 하는 것이 무례한 것이라고 인식될 수 있으며, 반드시 이름의 뒤에 직위를 붙여야만 하는 것이 예의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필자는 2013년 8월에 24년간의 해외생활에서 일시 귀국한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선훈씨 또는 이선훈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다고 말해왔던 것이 어쩌면 주위의 분들에게 상당한 불편함을 끼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한국에서는 느닷없이 ‘사장님’ 또는 ‘회장님’이란 호칭이 붙여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도 떠올렸습니다.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권위주의의 전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평론가는 방송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객관적인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 시청자를 설득하며, 토론을 진행해 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일 것입니다. 한편, 정치평론가가 방송을 통해서 자신이 7살이나 연장자이며, xxx이사장이라고 불리워야  할 만큼 권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나이가 어리고 직위도 낮은 토론의 상대보다도 객관적이고 논리적일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하는 것에는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권위주의적 상황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물론 이 정치평론가의 주장이 모든 시청자들에게 상식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치평론가가 살아왔던 생활과 주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정치평론가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방송에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치평론가의 연령과 직위에 입각한 부당한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연령은 위이지만, 직위가 아래이고, 출신학교의 후배인 경우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질 경우, 모든 경우에 연령이 우선될 수는 없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직위와 선후배 관계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공사구분이라는 상황이 요구됩니다. 상식적으로는, 공적으로는 직위를 인정하며, 사적으로는 연령과 선후배관계가 성립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하나의 직장에서 발생하는 경우에는, 일상생활을 공유해야 하는 직장생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서로간에 상당한 혼란을 가져 올 수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직장의 인사에서는 직위, 입사순위, 연령 등의 조건들이 역전되지 않도록 조정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사에 관한 고려사항들은 인사의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직위에 대한 적합도에 우선하여 적용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사기업에서는 상당부분 해소된 것으로 보이지만, 공직사회에는 뿌리깊게 남아있어, 진급에서 누락된 사람은 퇴직이 당연시되는 서열문화가 형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서열문화는 서열의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에 의해서 공정성을 잃고 임의적으로 결정되어짐으로 불공정한 사회질서를 만들어내는 불합리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의 크기만큼,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의무와 책임 보다는 권한만을 의식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권한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권한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과해진 의무와 책임에 대한 과실을 은폐 또는 부하와 타인에게 전가하는 경우마저도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사회의 한 부분, 단지 한 사람의 권력자에 의해서만 발생하더라도, 그 영향은 그 부분, 그 사람, 그 경우에서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파급효과는 외견상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훨씬 광범위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주어진 권력이 크기에 비례해서 파급효과도 크게 나타나며, 가장 극대화해서 나타나는 것이 정치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의 경우에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최우선적을 보장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정보를 독점하며, 헌법준수의 의무를 위배하고, 법적 권한을 확대해석 하여, 부당하게 적용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부작용 또는 부정비리를 은폐 또는 전가하기 위하여, 또 다른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국가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의 극단적인 예가 이번의 박근혜의 탄핵으로 결과된 일련의 사태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장자가 자신의 젊은 시절의 불편부당했던 상황들을 고려하여, 젊은이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연장자로서의 권한이 아닌, 연장자로서 책임과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에 의한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를 인내심 있게 설득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예절이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연장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연장자가 모범을 보여 젊은이를 감동시켜, 재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의 없는 젊은이는 예의 없는 연장자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의 무례함을 직면하는 연장자는 무례함을 꾸짖기 이전에 자신의 젊은 시절과 자신의 행동을 먼저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식이 편안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나의 자식의 친구와 또 그 친구들,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편안하게 잘 살아 갈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직위에 의해서 부여된 권한을 생각하기 이전에, 직위에 부과된 의무와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자신의 직위가 가지는 권한의 범위를 의무와 책임을 기준으로 객관적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고려되지 않았던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권한이 아닌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납득시켜 가야만 할 것 입니다.

필자는 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자랑으로 삼는 국가가 아닌,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이 되어, 아픔, 억울함, 불편함을 대화와 설득으로 풀어가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본 에서, 이선훈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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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Establish Hangul as National Treasure No. 1! <이선훈 박사: 일본에서 한국을 말하다>

<Japan : Prof. Lee, Sunhoon>

한글을 국보1호로 지정해야 한다.

조선시대에도 동시통역관 또는 번역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확실한 것은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기까지는 조선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모든 기록들은 중국의 문자인 한자로 이루어진 중국어 문장인 한문으로 작성 되어 왔습니다. 물론 이두라는 문자로 기록된 것들도 전해지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기록은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심지어는 한문의 작성을 최고의 지성이며,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던 조선의 사대부 조차도 중국어, 즉, 중국말을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이들의 대부분은 지금의 동시통역관과 같은 역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조선의 말을 중국어의 문장인 한문으로 동시통역하였지만, 현재에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중심으로 동시통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동시통역과 번역에 관한 역사적 사례는 서구문명사회에서도 쉽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서구문명사회에서의 동시통역의 사례는 성경을 에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의 성경은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405년 히에로니무스가 정통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를 완성시켰고, 이후에 이는 서방교회의 표준성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에 교황 바오로 2세의 교황령 ‘성경보고(scripturarum Thesaurus)에 따라 현재의 로마 카톨릭교회는 개정된 ‘새 불가타 성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제들은 주로 라틴어로 작성되어 있는 성경을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신도와 청중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읽어 주며, 기독교를 설파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중세시대에는 기독교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며, 라틴어로 작성되어 있는 성경을 토대로, 동시통역관인 사제와 귀족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522년과 1534년에 마르틴루터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당시의 독일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출간함으로서 엄청난 시대적인 변화가 발생하였고, 시대적인 변화의 물결을 차단하려는 라틴어의 동시통역관들인 사제와 귀족의 혹독한 탄압을 받는 신교도가 탄생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교황의 권력은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의 권력약화는 각국의 왕과 귀족의 권력강화를 가져왔지만, 신교도들의 산업활동에 따른 부의 축적과 함께, 청교도혁명, 영국의 권리장전,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이은 미국의 독립선언을 통해서 전제독재에 의한 계급사회를 부정하며, 민주적 정치형태와 인권을 중심에 둔 시민의식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은 승정원이란 기구를 두어,  한문의 동시통역을 주업무로 하는 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으로서,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분담하여, 각각의 담당부서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왕이 내리는 교서나 신하들이 왕에서 올리는 모든 문서를 거치게 하여, 국왕의 비서기관의 역할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국왕의 자문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뿐만이 아니라 사대부와 양반계층은 입신출세를 위해서 평생을 한문을 읽고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중국어의 문장인 한문과 관련된 동시통역관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며, 국가를 지배해왔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한문을 이용하여 절대적 지배자인 왕과 백성들간을 격리시켜, 왕의 권력을 무력화하며, 사실상 자신들이 국가의 권력을 독점해왔다는 점에서는 서구문명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전제군주인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것은 조선과 한민족은 물론이고, 인류의 역사에서도 매우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표는 훈민정음 어제 서문의 한글부분과 그것을 현대 한글로 번역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훈민정음 어제 서문 현대 한글 번역문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과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위의 표와 같은 서문으로 발표된 훈민정음은 당시의 조선에서 사용되던 말을 중국의 말로 기록하기 위한 한자를 사용한 한문으로 번역하지 않고, 말 그 자체를 그대로 기록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후 한문을 고수하는 사대부들에게는 경시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실, 일부 양반층, 서민층을 중심으로 소멸되지 않고 이어져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필자는 전제군주인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게 된 이유로서 위의 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어의 문장인 한문을 어렵게 배우지 않고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백성이 자신의 뜻을 문장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며, 한문으로 인해서 발생되고 있는 한문통역관들로 인한 왕과 백성간의 소통장애를 극복하고, 한문통역의 과정에서 발생되는 왕의 절대권력의 분산과 사칭을 방지하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봅니다. 따라서 한문과 관련된 정치지배구조의 개선을 의도했던 전제군주인 세종대왕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왕권의 확장에 따른 자신들의 권력약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의 사용을 최대한 제한했을 것이라는 추론 또한 가능해지며, 사대부들의 이러한 노력은 조선시대가 멸망에 가까워 지던 1894년의 갑오개혁에까지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한글전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문의 해석과 한글로 작성된 문장에 난해한 한자를 혼용하는 것이 자신의 지식인으로서의 능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통해서 왕의 말을 통역에 의해서 어떠한 변화도 발생시키지 않은 상태의 문장으로 백성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또 동일한 방법으로 백성의 의사를 왕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 본질적으로는 민주주의 시민사회의 기본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나친 과장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왕과 백성간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왕의 통치가 국민에게 어떠한 반응과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를 왕이 파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훈민정음은 조선시대의 전제정치와 계급사회의 폐해의 일부를 제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일본에서 생활하며, 주변의 몇몇 일본인들로부터 최근에 한국에 가면 간판들이 모두 한글과 영어로만 표기되어 있어, 일본인으로서 매우 불편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어떤 저명한 일본인교수는 한국이 한자를 모두 없애버려, 역사를 단절시키고, 한자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의사전달은 물론이고 한자와 관련된 문학작품과 학문의 발전에도 상당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는 발언에 직면한 적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일본인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 한 일본의 신문사설을 한자를 모두 카타카나와 히라카나로 바꾸어 표기하여, 읽어 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일본인 교수는 한자가 전혀 없는 일본어 문장을 읽고도 본래의 문장의 의미를 거의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본래 한자가 포함되어 있던 문장에서 한자를 조금 더 줄일 수도 있고, 한자어로만 표기를 해오던 단어를 카타카나와 히라카나로 표기하더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서적과 같은 것을 해독하거나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한자에 관한 학습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추가해 왔습니다.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한자에 대한 학습이 필요한 사람은 필요에 따라서 부가하면 되는 것이며, 모든 국민이 어려운 한자와 한문으로 되어 있는 과거의 역사서적을 읽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한자와 한문을 기본적으로 공부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한자와 한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에 따라서 번역을 하면 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상용한자를 지정하여 난해한 한자의 남용을 제한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냐고 했으며, 영어문장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영어를 미국과 영국사람의 수준으로 공부할 필요는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식민지배에서 해방되어, 72년이 경과한 오늘까지 대한민국의 국보1호는 숭례문입니다. 숭례문을 국보1호로 지정한 것은 일제식민시대의 총독부에 의한 것이며, 일제는 임진왜란(1592년) 당시 왜병이 이 숭례문을 통해 조선의 도성에 입성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미를 두고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국보와 보물의 지정에 관한 치욕적인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문화재의 지정시스템을 변경하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한글이 대한민국의 국보1호로 지정되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문화재지정 문제와 관련된 일제 식민시대의 치욕을 말끔히 청산하고,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유물인 동시에 통일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한글을 우리 스스로 재평가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글은 한반도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 살아온 사람,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필자는 최근의 선거전에서 한글이 상대방을 비방하기 위한 욕설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심각한 오염을 겪고 있는 것에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한글이 욕설로 오염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욕설을 하며, 스스로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명과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들의 전개에 따라서 풍요로운 표현방법을 개발하고 사용되어지는 한글의 모습을 한반도는 물론 해외동포 여러분과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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