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sure : Learning Life Through fishing ~ 낚시로 살펴보는 내 삶- 수요 수필 9<조준희 기자>

 

인생의 조우 내 동생 (조우편)

 

제 낚시와 인생에서 아버지 외에 빠질 수 없는 한사람이 있는데 바로 동생이다. 제 페이스 북 친구 분들 중에서도 제 아우와 페친을 공유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어릴 적부터 인생 동선이 같아서 서로 친구들을 많이 공유했는데 온라인 세상까지 따라 붙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 친구에 대해 잠깐 소개하면, 제가 주로 하는 대낚시는 저보다 조금 약하다.
그 대신 미국서 시작한 루어 낚시는 그가 필자보다 강하다.

루어낚시란 배스, 가물치, 쏘가리등의 공격성 있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가짜 미끼인 루어를 달아 릴이 달린 낚시대로 걸어다니거나 배를 타고 하는 낚시 방법이다. 제가 꺽지를 잡은 사진이 루어 낚시다.

동생은 실제로 미국서 1미터 50센티 이상의 메기를 잡아서 LA타임즈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겁 많은 새 가슴의 소유자인데,  낚시에서는 대어를 낚는 조선이 되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난 후, 필자는 동생의 낚시 실력을 인정하고 루어 낚시를 동생으로 부터 배웠다. 동생은 필자와  젊은 시절 사업을 함께 한 시절이 있는데 그때 인생에서 절대 절명의 씻지 못할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어릴 적 비원사건은 사건도 아니다.

동생이 총각시절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필자가 갓 결혼하여 부모님과 함께 살 때라 저와 함께  주말 새벽이면 진천에 있는 초평저수지로 낚시를 떠났습니다. 원래 선수들끼리 조행을 떠나면 먹을 것도 요기만 할 정도로 가지고 간다. 만드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붕어 잡기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장 잘 맞는 낚시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필자는 신혼인 27,8세 때인 질풍노도의 20대 때이니 모든 것이 공격적이며 적극적이었다.

목표가 정해지면 앞뒤 옆 안 가리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인데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 몰라서인지 사업이든 낚시든 같은 패턴이었다.

동생과는 주로 좌대(물위에 낚시할 수있게 고정시켜논 설치물)를 타고 낚시를 하는데 설치해 논 자리가 맘에 들지않으면 “야! 뽑자!” 하고 고정시켜 논 4개의 쇠 폴대의 나사를 풀어 뽑아서 긴 쇠 폴대를 삿대로 삼아 우리가 원하는 위치로 옮겨가서 고정을 시키는데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니다.

매주 가는데도 좌대 주인은 갈 때마다 수면 한가운데로 좌대를 옮겨놔서 갈 때마다  다시 얕은 수초가로 옮겨다 놓는 중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혼자거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동행한 조우가 저의 영원한 부하, 동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좌대 주인의 불평도 마다하지 않고 매주 새벽에 충청도까지 달려가서 중노동을 감행했는지 이유가 궁금하죠? 그것은 타 조사들에 비해 조과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엔 지금처럼 월척이 흔치 않았다. 어부가 월척을 낚았다면 그 날은 온 동네가 떠들썩하고, 동네의 모든 낚시꾼들의 우상이 되고도 남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와 동생 조선은 매주 각각 월척 두세 마리씩은 꼭 잡아왔기 때문에 어부로 등극하신 아버지도 상당히 놀라셨다. 지금은 그 시절처럼 붕어를 잡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큰 붕어가 많이 잡힐 때는 사업도 순탄하게 잘 돌아가고 흥행한다.
우리 형제는 사업도 상승세를 타며 회사도 우후죽순 커 나갔다. 최근 존경하는 형님 한 분이 필자에게  “준희야~인생은 운7 복3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을 통해 지난 삶을 회상해볼 때, 그 말이 참 맞다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필자의 사업 아이템은 아이들이 즐겨 먹던 지렁이 모양의 젤리인 꿈틀이였지요. 대한민국 최초로 판매를 시작하고 대기업들이 저희 제품을 모방하여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 상품이었다.

살아있는 지렁이로 월척 붕어를 낚고,젤리지렁이로 돈을 낚았으니,결국 낚시를 통해 세상을 낚는 법을 배운 셈이다.

그러나 제 인생의 오점을 남기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다음 편인 “마늘 밭의 추억” 편을 기대해 보시라

물요일엔 낚시대를 챙기세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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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sure : Learning Life Through Fishing ~ 낚시로 살펴보는 내 삶- 수요 수필 6 <조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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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잉어 소년들 (하편)

친구들을 불법의 길로 인도 후 인과응보를 받은 배신자 친구녀석의 발목이 거의 나아갈 무렵 우리는 미리 세워 두웠던 낚시터로의 조행을 결행하고자 다시 모의를 하게되었다. 장소는 수원 용주사 근처 작은 방죽으로 정하게 되는데 무리 중의 한 친구 아버지가 유료 낚시터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신 양어장이었다. 지금은 유료낚시터가 상당히 많아졌지만 40년 전에 누가 돈을 내고 낚시를 할 까요? 그 당시만해도 널려 있는 것이 무료 낚시터였다. 친구아버님이 유료낚시터의 선구자이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D-day는 6월6일 현충일, 새벽 5시에 친구들과 노량진 전철역에서 만나서 수원역까지 전철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용주사 쪽으로 가기로 모든 계획을 수립하고 현충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멤버가 비원 금잉어파 5명이었는데 비밀이 새어나가 소문이 나면서 아이들이 하나 둘 지원을 하는데 거절을 못하는 제 성격상 승락을 해주다 보니 12명이나 되어 버렸다. 그 중엔 안 붙여주면 선생님께 말 한다고 협박하는 놈까지 있어서… 어디에든 이런 놈들은 꼭 있게 마련이다. 당시 우리반 남자아이들이 25명이었으니 절반이 현충일 작전에 가담하게 된 셈이다. 드디어 현충일이 되어 새벽에 1명의 낙오도 없이 노량진 역에 전부 집결하여 수원행 1호선 전철에 몸을 싣고 목적지로 향했다.

약2시간에 걸쳐 낚시터에 도착하니 친구 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곧이어 우리 일행은 즐거운 낚시를 하게되어 있었다. 유료 낚시터이므로, 고기가 쉽게 잡히는 것은 따논 당상이었다. 또한 비단잉어를 기르는 별도 양어장에서 비단 잉어를 잡아서 가져 가라고 하니 아이들은 잡아다가 연못에 기른다고 정신줄을 놓고 낚시를 하는데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저녁 때가 되었다.

사실 당시 아이들과의 조행에 흥분하여 낚시가는 계획만 세웠지 돌아오는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늦어도 7시까지는 집에 도착하는 계획을 세워 놓았어야 했는데 그냥 노는 것에 정신이 팔린채 세부 계획을 세우지 못한 내 실수였다. 부랴부랴 아이들과 철수를 준비하는데 집에 연못이 있는 애들은 잡은 금잉어들을 가져 가야한다고 친구아버님께 산소포장을 부탁했다.

산소포장이란 큰 비닐에 물과 금잉어를 담아 산소를 주입하여 마무리를 하는데 6~7시간은 잉어가 죽지 않는다고 했다. 산소포장을 한다고 시간을 지체하다보니 7시가 훌쩍 넘었는데 집으로 가는동안 배 고프다며 친구아버님께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다보니 9시도 넘어 캄캄한 밤이 되어 버렸다. 당시에는 통행금지도 있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우리는 산소포장된 비단잉어를 챙겨서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11시가 좀 넘었던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니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8시 9시가 되어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된 부모님들이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해서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단체로 없어진 것을 그때서야 아시게 되어 경찰서에 신고를 하였고, 사라진 아이들 집이며 학교가 몇시간 동안 완전 발칵 뒤집어졌던 것이다. 다음날 선생님께 야단 맞을 각오를 단단이하고 학교에 갔으나 예상을 뒤엎은 각오 이상의 응징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상황의 주범인 저는 당시에 학급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우리반 5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단에 불려나가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담임선생님의 귀싸대기 세례를 받아야만 했으며, 한번도 맞아 본 경험없는 선생님의 싸대기 세례는 저의 볼을 초토화시키며 결국 반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픈 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친구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는게 너무 창피하고 스타일이 완전 구겨진 제 모습에 견딜 수가 없는 뜨거운 분루는 벌겋게 부어오르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바닥에 뚝뚝 흘러 내리고 있었다. 저의 금잉어 소년파는 이날 이후 미래를 기약하며 해체를 선언하고 여름방학이 올 때까지 방과 후 반성문과 함께 교실 청소로 그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되었다.

“뿌린대로 거둔다” 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결국  저의 뺨은 고생을 했지만 6학년 전체에 소문이 나며 저의 인기는 졸업할 때까지 대적할 자 없이 하늘을 찔럿다는거 아니겠습니까?

 

To be continued ~

서울 : 조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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