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6<은우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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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u : Prof. Woogeun Eun>

7) “살아남은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마지막 가두 방송과 최후의 저항 (5월 26일 밤-27일 새벽)

5월 26일 17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 기자들과 마지막 인터뷰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당일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시켰다. 이날 밤 24시, 광주 시내의 전화가 일제히 두절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어차피 씻겨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일단 목욕이나 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목욕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차분히 마지막 전투를 맞이했다.”

5월 27일 새벽: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잠들고자 했다. 죽음도 어차피 잠자는 것이니까…, 도청 앞으로 모여주기를 호소하는 여성의 애끓는 가두방송은 칠흙 어둠이 뒤덮은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메아리쳤다.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때뜨렸다. … 그녀의 목소리는 캄캄한 도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애띤 목청으로 소리치는 동안 울려 나온 말들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슨 말일까? 지금이 마지막이다! 골자는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시민들에게… 합류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아닐까?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열리는 문소리, 길거리를 대닫는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집안에 들어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문고리를 푸는 소리, 거리에 걷는 발자국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 아무것도….(Hebrt Scott Stokes, NYT Seoul correspondence )

‘시민 여러분 도와주세요! 공수부대가 오늘 밤 도청을 함락합니다.’ 라는 가두방송을 듣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당시 교사 박행삼의 증언) “전투를 하면서도 빨리 날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시민들이 모여들고 그러면 계엄군이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의 증언) ” 잠을 들지 못했다. … 도청쪽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나와달라!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뛰어나갈 용기라 나지않아… (당시 광주대교구 관리국장 박상수의 증언)

“도청 청년들 최후다. 그들은 모두 죽는다” 엉엉 울었다. 신자도 울고, 나도 울고..탈진하여 사제관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깼고, 마지막 가두방송을 들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도청으로 모여 주십시오. 어서 도통으로 모여 총을 나눠서 도청을 사수합시다….(당시 계림동 성당 주임 조철현 신부의 증언) 새벽 3시경 시민군 가두방송을 들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시내 전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우리 학생들을 살립시다.” … 뼈를 깍는 듯한 애절한 절규에 시민들은 흐느꼈다. (윤공희 주교 외)

” 5월 26일 가두방송차량 운전원이 고향인 목포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설마 모두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다. 칠흙 어둠이 뒤덮은 거리를 승용차로 돌며 방송했다. ‘시민 여러분! 도청 앞으로 모여주세요. 계엄군이 쳐들어 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라고 다급하게 호소했다. 나는 이미 며칠간 밤낮으로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계속해왔고, 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웠었다. 시민들은 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방송을 듣고 많은 시민이 모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다 주택가 창문으로 세어나온 불빛이 꺼지는 것을 보며,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불을 끄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청에 돌아와 아무도 모이지 않았음을 확인했을 때, 살 떨리는 배신감을 느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외로움과 막막함, 허전함이 밀려왔다.’ (은우근 교수, 이경희 학생 인터뷰 (2012.5.10)

계엄사는 새벽 3시 30분 군 병력을 광주 전역에 투입하여 5시 10분 경 시내 일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만일 20만 명의 시민이 10일간 금남로에 계속 모일 수만 있었다면, 5월 민중항쟁의 결과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민들은 ‘도청에 나가야 하는데, 그 사람들 지금 죽어가고 있을텐데, 내가 나가야 하는데…’ 라고 마음속에서 외쳤을 뿐 집을 나설 수는 없었다.(주: 계엄군은 25일 도청에서 일어난 ‘독침사건’에서 보듯이 오열을 침투시켜 민중 내부에 불신과 공포를극대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가두방송이 거리에서 울려 퍼질때, 문을 걸어 잠그고,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민중은 마지막 순간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지 못했다.(주: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참조. 이 시는 5월 민중항쟁이 진압된 직후인 6월 2일에 지어졌다.

순수하고 순결했던 생명 공동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5월 민중은 두려움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왜? 하나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현실은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다. 5월 민중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하나됨의 신비와 환희를 체험했지만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생명공동체적 연대의 감격과 환희가 강렬했던 만큼 부끄러움과 죄책감, 부채 의식도 더 강하게 자각되었다.

5월 26일 밤 -27일 새벽 사이의 시민군 가두방송은 5월 민중항쟁의 집단 정서로서 죄책감의 형성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 가두방송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지금까지 5.18 연구에서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5월 민중이 80년 5월 22일 공수부대를 시내에서 몰아내고 공유했던 해방감과 환희는 죄책감으로 변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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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5<은우근 교수>

(사진은 전 광주 도청앞 분수대 에서 촛불 시위하는 시민들: 5.18광주 민중항쟁때는 그 곳에 전남도청이 있었다. 현재는 무안으로 이사가 있다. 그때도 그곳에서 촛불 시위를 했다.

<Gwangju : Prof. Woogeun Eun>

3) 부끄러움과 무력감으로 고뇌하던 사제들, 시위를 기도하다(5월 21일)

21일 아침 도시 외곽에서 골목별, 동네별로 시민군에 대한 지원이 활성화되면서, 시위는 광주 전역에서 전 민중이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이 날 오전, 광주 지역 본당 사제들 대부분이 호남동 성당에 모였다. (당시 광주시에 소속된 성당은 모두 12곳이었고 사제는 시내 본당 7명, 교구청 근무 2명이었다. 따라서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사제수는 9명이었다. 여기에는 1명의 외국인 사제가 포함된다.). ‘신도들이 사제들을 책망’했다. “이런 곤란한 시기에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민중의 지도자로서 신부들이 앞장서줘야 하지 않느냐. 한시라도 빨리 대주교님을 모시고 플랑카드를 선두오 수습에 나서야 [한다]” 고 요구했다. 김성룡 신부는 당시의 심정을 “부끄러운 일이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 너무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나 자신을 돌아다 본다. ” 고 (“분노보다는 슬픔이” 저항과 명상)표현했다.

마침내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떨치지 못하고 고뇌하던 사제들은 평화로운 수습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의했다. 윤공희 대주교의 재가도 받았을 뿐 아니라, 윤 대주교 자신도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학운동의 숙소에서 호남동 성당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인정할 것과 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분노한 민중과 공수부대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자임했지만 실상의 시위를 기도한 셈이다. 이 시위는 계엄군에 의한 헬기에서의 기총소사와 도청 앞 공개 발포로 무산되고 말았다. 신군부의 듸도대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될 상황이 임박한 만큼 이를 무산시키려고 발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중재자로서 교회의 최초 시도는 계엄군이 거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4)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다 : 계엄군의 공개 발포와 무장 (5월 21일)

한편 사실상 사제들의 시위 기도가 좌절된 시점인 오후 1시경, 계엄군은 금남로 도청앞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발포했다. 5월 민중은 군용 장갑차, 무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30만 명의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치선에서 민중은 계엄군과 백병전과 다름없는 시가전을 벌였다. ” 고래가 [정어리 떼를] 사냥하듯이 ” 시체 또는 부상자들을 끌고 골목으로 흩어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모여들고 다시 총격이 가해지면 또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었다. 시민들은 ” 총! 총! 총을 외쳤다.”.

다음 한 시민군 이세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지금 군인들 상대로 하고있는 일 [총으로 군대에 대항하는것]이 잘한 일인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호응하는 모습을 보며 그 [꺼리는 ] 마음이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계엄군의 끔찍한 폭력을 겪으며 형성된 ‘국가가 우리에게 이래도 되는거야?’ 라는 의문은 무장을 계기로 ‘우리가 국가에 대해 이래도 되는 거야?’ 라는 의문으로 전환되었다. 이 증언은 시민들의 인정을 통해 무장에 대한 의문이 확신과 긍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5월민중은 투쟁을 통해 공포와 자기 모멸감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5월민중은 목숨을 바치는 결단을 통해 이룩한 공동체를 자기 자신으로 체험했다. 자기중심적으로 타자화된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민중은 국가 폭력이 강요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전면적 투신. 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하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극복하는성스러운노동과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한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성스러운 노동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해방과 평등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제 민중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느낀 자기모멸감과 부끄러움은 목숨을 건 투쟁 과정에서 이룬 공동체적 환희의 체험을 통해 긍지로 전환되었다.

5월 22일 : 공수부대가 물러간 ‘해방 광주’에서 시민 자치가 구현되었다.

5월 24일: 사제들이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도청 수습대책위에 전격적으로 참여했다. 남동성당에서 사제들과 모여온 재야 인사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5) 사제들이 무기회수와 시민군 무기로 사수에 참여하다(5월21일-26일)

계엄군과 협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무기 회수가 이루어졌다. 조철현 신부와 남재의 신부가 직접 무기 회수에 참여햤다. 5월 25일 : 사제들이 TNT를 사수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도청 지하에 있는 TNT 를 포함한 시민군의 무기고를 지키기위해 김성용 신부가 남동 성당에서 2명, 조철현 신부가 계림동 성당에서 1명을 모집하여 모두 3명의 청년을 도청 무기고에 배치했다.

6) 사제들, ‘죽음의 행진’을 결행하다. (5월 26일 낮)

5월 26일 오전: 새벽 상무대에서 탱크가 농성광장으로 진격 중이라는 급전을 수신하면서 도청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함께 밤을 새웠던 수습위원들은 극도로 당황했다. 김성용 신부가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죽음의 행진”을 제안하고 수습대책위원 17명 전원 찬동했다.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이 앞장을 섰고 수백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다. 진격한 탱크가 도로를 차단 중인 농촌진흥원 앞에는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아침 9시였다. 김성용 신부는 ‘총 맞아 죽을 각오로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5월 26일 오후 : 마지막 협상이 실패했다. 이 협상의 결렬로 중재노력은 파국을 맞았다. 계엄군을 설득하러 갔던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은 되돌아와 무기회수를 위해 시민군을 설득하러 나서게 되었다. 계엄군은 처음부터 사제들이 포함된 수습위원의 중재 노력을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끌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과 시민군을 분리시키는 한편, 시민군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시민군 내부의 분열과 이탈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즈 심재훈 기자의 말처럼 “광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바다에 외로이 떠있는 고도” 였다.

목숨바쳐 이룬 생명공동체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5월민중은 무장과 최후의 결전을 선택하면서 다시 분열을 경험했다. 무장을 계기로 총기를 나누고 그 사용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돌연 그 곳에서 계급 (class)을 보았다. 무장한 민중은 대부분 항쟁 이전에 이 도시에서 언제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무장이 시작되자 이전에 이 도시의 주인이라 느꼈던 계급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 분열의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심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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