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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Morrow

John Donne, The father of Metaphysical poet

( Photo from Google Images)

 

By John Donne

I wonder, by my troth, what thou and I
Did, till we loved? Were we not weaned till then?
But sucked on country pleasures, childishly?
Or snorted we in the Seven Sleepers’ den?
’Twas so; but this, all pleasures fancies be.
If ever any beauty I did see,
Which I desired, and got, ’twas but a dream of thee.
And now good-morrow to our waking souls,
Which watch not one another out of fear;
For love, all love of other sights controls,
And makes one little room an everywhere.
Let sea-discoverers to new worlds have gone,
Let maps to other, worlds on worlds have shown,
Let us possess one world, each hath one, and is one.
My face in thine eye, thine in mine appears,
And true plain hearts do in the faces rest;
Where can we find two better hemispheres,
Without sharp north, without declining west?
Whatever dies, was not mixed equally;
If our two loves be one, or, thou and I
Love so alike, that none do slacken, none can die.

Source: 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 Third Edition (1983)

John Donne (1572-1631)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웰시 가의 후손으로  그의 어머니는 존 헤이우드의 딸이며, 토마스 모어의 조카 딸이다. 가정적으로  문인의 배경을 가진 그는 시를 좋아하고  탐험을 즐기는  종교인이기도 했다.   1601년 그는 비밀리에 그가 고용되어 있던 그 당시의 영국왕의 경호실장? 정도 되는 가문의 딸인 앤 모어와 결혼을 한다.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고 가난한 삶을 영위한 그는 결국은 아이들을 낳으면서 다시 직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교회에서 그는 성직자의 삶을 살게 된다.

후일 그는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을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 영국에서 금기였던 관계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King James 의 명령으로 오직 교회에서만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사제로서 그의 일생을 바치며 살았던 그는  전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 설교를 했다고 한다. 1621년이 되어서야 결국 그는 Dean of St. Paul 에 취임한다.

** 이 시는 그가 죽은 후,아마도 그의 후손들이나 가족들이 그의 시를 발견한 때가 기준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든다. 그의 죽음도 참 아이러니 하다. 그 자신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앉아 있다가 실족한 후 며칠 지나서 영면에 이른것이다.

이 시는 사랑을 노래한 시다. 그런데 그가 형이상학적인 시인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만큼 우린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의 저변에 흐르는 것을 느낌을 이해하고 시대적 상황과 시가 품고 있는  행을 따라서 이해를 하면 도움이 될 듯하다. 하지만 우리 누구도 완벽히 이 시를 정확히 규정 지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이 시는 사랑을 노래한 시다. 육체적인 사랑을 나눈후, 정신적인 사랑으로 더 확대되는 시인과 그 대상을 통해 시인의 사랑에 대한 관점은 어느 누구의 한 사람만의 바램으로만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짐을 보면서 너무 유리같은 사랑을 하고 있지 않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디지만 질 그릇처럼 오래 동안 사랑의 열기를 품고 지켜 나가는 아름다운 세계의 완성,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까 해서 실어 보았다.

코리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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