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Petit Prince is an example of literature adopted to movie.
<Daegu, Prof. Lee GangWha >
2. 문학에서 영화로
영화 혹은 영상은 이전의 예술들과는 달리 예술가의 영감과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적인 발명에 의해서 탄생하였다. 역동적인 공간의 창출과 시간을 공간화 할 수 있는 이 새로운 매체의 독특한 가능성은 기존의 매체들이 가진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세기만에 주도적인 서사방식으로 자리잡으면서, 과거에 문학, 특히 소설이 가졌던 명성마저 빼앗아 버린 듯 하다. 그러나 ‘개방성’과 ‘하이퍼 텍스트성’이라는 특성에 근거한 새로운 매체의 위력이 이처럼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문학과 영상의 위상 내지 그 관련성은 쉽게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장르는 애초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모든 언어 활동의 근저에 이야기가 있었다. 구전되거나 문자의 형태로 정착한 설화, 민담, 전설, 고대 희랍인들의 희곡, 중세의 기사도이야기, 근대적 서사의 전형인 소설, 그리고 20세기의 주도적 서사 방식으로 자리잡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의 진보에 따라 다양한 장르가 생성되었지만 ‘이야기하기’라는 본질적 기능은 불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달되고 수용될 수 있어도 매체들이 실어나르는 본질로서의 이야기는 불변이다. 바로 여기에 문학과 영화의 상호의존 혹은 보완관계를 논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영화와 문학을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른바 ‘고전’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던 초기 영화시대로부터 ‘문학영화’ 혹은 ‘카메라-펜(Camera-Stylo)’을 지향하는 60년대 영화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가 문학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내용 즉 소재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 즉 기법 측면에서도 다양한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련성에 근거하여 우선 문학적 표현양식이 영화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자. 이리하여 그리피스는 그가 영화를 연출하는 초기부터 그의 몽타주 기법이 근대 문학적 서술의 전통, 특히 디킨스의 전통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지적하였다.
나는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크로스 커팅(cross-cutting)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도입했다…..그러나 그것은 절대 나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디킨스의 작품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으며 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 스위칭 오프(switching-off) 기법의 효과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모든 다른 작품들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도입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갑자기 중단하고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고 마지막에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 얼핏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결말들을 다시 합쳐 전체를 완성시킨다.
그리피스에게 l9세기 사실주의 소설에서 다양하게 시험되었던 이 구조는 그에게 많은 인물들, 상황들, 사건들, 세부적 사항들이 어지럽게 착종되어 있는 상황, 즉 20세기 초 인간의 현실 체험에 상응하는 그러한 상황을 서술하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이처럼 19세기 문학이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 특유의 서술 구조를 가지고 반응하였고, 영화 제작자들이 이러한 서술구조에서 영화의 표현기법을 차용했다는 것은 영화가 나오기 전에 문학이 그 서술방식에서 이미 영화적인 것을 선취했음을 의미하여 이러한 차원에서 산업화의 산물인 영화는 19세기 문학적 서술 전통의 정당한 상속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역사는 영화의 전사가 되는 것이다.
한편 <디킨스, 그리피스 그리고 오늘날의 영화>라는 글에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역시 디킨스를 중심으로 영국소설이 미국초기 영화제작자들에 미친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에이젠슈타인은 영화와 문학의 광범위한 연계성을 강조하면서 영화가 자립적이고 자족적이며 완전히 독립적인 예술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매우 생각이 모자라고 주제넘은 사람들만이 영화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말도 안되는 전제로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영화의 미학과 법칙까지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킨스와 그리스 시대, 세익스피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면 그리피스와 오늘날의 영화의 근원이 에디슨과 다른 발명가들 뿐만 아니라, 거대한 문화적 전통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곁으로 보기에 전례가 없는 예술처럼 보이지만 사실 문학은 영화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여했으며. 문학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시각 예술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영화적 감각은 사실상 문학적 상상력의 확장된 버전이라고 주장하면서 디킨스의 소설이 초기 영화에 미친 중요성과 그의 작품이 그리피스의 혁신적 기술로 인해 영화에 구현되었다는 것을 여러 저서에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전자가 그것을 시작했다”로 시작되는 디킨스의 <벽난로 위의 귀뚜라미> – 그리피스가 나중에 영화화했다 – 의 서두 부분을 자세히 읽는다면 클로즈업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에이젠슈타인은 괴상하고 주변적인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디킨스의 재능과 “동정심이 가는 노인들, 고귀하지만 슬픔에 잠긴 일차원적 인물들, 연약한 처녀들, 그리고 시골 수다쟁이와 잡다한 등장 인물들을 묘사하는 그리피스 영화의 경향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디킨스가 이처럼 비범한 시각과 감각으로 영화에서 구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디킨스가 인물창조에 있어서 뛰어난 유연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며 이러한 디킨스의 캐릭터들은 오늘날의 영화 주인공들처럼 유연하면서도 과장되어 있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에이젠슈타인은 “그리피스가 디킨스로부터 차용해 온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크로스 커팅, 즉 동시 진행 액션의 기법으로서 이를 통해 그리피스가 몽타주에 도달할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디킨스의 문학적 서술과 그리피스를 통한 이러한 서술 구조의 수용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지시적인 공통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산업 사회의 자본주의적 구조를 반영하는 시민 소설에 근거한 미국의 영화를 특징짓는 것은 사회구조와 서사구조 사이의 상응적 관계이며 이 관계는 두 사회 계층의 평행성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문학적 또는 영화적 서술 구조에서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이건 그리피스의 <밀왕의 최후>이건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에 이러한 구조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며, 이 분리된 평행선은 화해와 정의의 관념 안에서 다시 결합된다. 이처럼 디킨스와 그리피스의 작품에서 그려진 문학적, 영화적 몽타주를 위한 공통의 토대로서의 자본주의 사회 형태를 강조하면서, 에이젠슈타인은 이것이 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와 그 사회의 영화 예술과의 근본적인 차이임을 주장한다.
물론 이야기를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길 수는 있지만 소설이 훌륭하다고 좋은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워터프론트>는 훌륭한 영화이지만 나중에 소설로 나왔을 때는 그렇지 못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위대한 소설이지만 영화로는 그저 그랬다. 이런 차원에서 문학연구는 소설, 서사시, 희곡 그리고 다른 장르들을 각각의 특질과 장점을 가진 그리고 각자의 요구와 통제를 가진 독립된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훌륭한 희곡은 시로 다시 쓸 수 없고 훌륭한 시를 소설의 형태로 바꿀 수 는 없다. 마찬가지로 극영화를 다른 형태로 훌륭하게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에이젠슈타인 자신도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의 문학적 서술을 20세기 영화적 서술의 선구자나 전 형태로 이해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평행적 몽타주가 디킨스, 플로베르, 졸라 등의 소설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식으로 전제함으로써 파생할 수 있는 함정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유추와 유사를 너무 따지게 되면 설득력과 매력을 잃게 된다. 그럴 경우 조작이나 속임수의 느낌이 들게 된다. 디킨스와 그리피스의 유사성이 너무 많이 지적된 나머지 이것이 비슷한 표식찾기 같은 게임으로 전락하여 설득력을 잃게 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생각이 들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이 문학과 영화의 서술양식에 대한 비교적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으며, 이것은 영국의 문예이론가 허버트 리드에 의해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시나리오와 문학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도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갈다. 그들은 문학을 점잖고 학문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정확한 문법과 거창한 연설조의 말로 구성된 버림받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좋은 글의 특정을 내게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 문학을 기본적인 요소로 축소시키게 되면 결국 한 가지 목적, 즉 말로써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에 귀결된다. 단지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 마음으로 보게 하는 것, 뇌 속에 있는 스크린에 움직이는 사물과 사건을 투사하는 것 그것이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로부터 제임스 조이스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훌륭한 문학의 정의, 모든 위대한 시인의 업적이다. 이것은 또한 이상적인 영화의 정의이기도 하다.
따라서 리드는 “상상력의 영화 – 위대한 연극, 위대한 문학, 위대한 회화와 견줄 수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영화 – 는 시인이 스튜디오에 들어서기까지 도래할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스탠리 카우프만도 베리만, 펠리니, 안토니오니 등이 “미국인을 포함한 다른 감독들과 함께 영화를 그 동안 소설과 형이상학파 시의 영역이었던 은밀한 내면, 혹은 심지어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확장시켰다”고 지적한다. 아네스 바르다는 “소설을 쓰듯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으며, 알랭 레네도 <히로시마 내 사랑>에 대해서 “이미지가 텍스트의 대위법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시를 쓰려고 했다”고 말했다. 장 콕토는 마지막 원리를 적용하여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시인의 피>와 <오르페우스>는 주로 현대시와 연관된 기법에 널리 의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1967년 <파리 리뷰>지와 인터뷰에서 “오늘날 문학인들은 서사시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고있는 반면, 이상하게도 서사시는 서부영화에 의해 그것도 다름 아닌 헐리우드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라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표현에서 다시 확인된다.
이처럼 영화는 19세기 후반의 소설과 시에 광범위한 뿌리를 두고 있다. 가령 현대 소설의 서사를 사용하는 영화 서사는 단순하고 단선적이며 시간적으로 일관된 서사 진행으로부터 탈피하는 경향을 보여왔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미 플로베르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이외에도 문학과 영화의 기법상의 비교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가 혹은 시인으로는 헨리 제임스, 토마스 하디, 조셉 콘래드 그리고 보들레르, 월터 휘트먼 등이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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