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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trolls in Culture ~ How to Read Cinema? 영화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과 접근법 7< 이강화 교수>

Movie : A Good Year

<Daegu, Prof. Lee, GangWha>

5. 영화에서 문학으로

1960년대 텔레비전 시대 작가들은 구텐베르크식의 활자 문화를 무력화시키는 영상매체의 막강한 위력 앞에서 소설의 위기와 죽음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책장을 넘기는 대신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켰고 허구를 읽는 대신 사실을 보는 편을 택했다. 일관성과 연속성, 그리고 인과성과 단성성에 의존해오던 활자문화는 이제 복합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찰나성과 다성성을 특징으로 하는 영상매체와 불안한 심정으로 경쟁해야만 했다. 마샬 맥루헌의 말처럼, 문어적인 활자문화는 이제 구어적이고 시각적이며 청각적인 영상문화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맥루언이 예언했던 것과는 달리, 활자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점에 나가보면, 사라지기는커녕 하루에도 백여 권의 신간서적들이 쏟아져 나와 진열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런데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여전히 불황이고, 순수문학 작품들은 더더욱 팔리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책을 읽을 시간에 사람들은 이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한다. 그리고 예전에 소설을 읽으며 웃고 울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스크린을 보며 웃고 운다. 영상매체는 마치 예전에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가상의 리얼리티를 창조해 제시하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실제 현실로 착각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이제 살아 남기 위해서 강력한 라이벌인 영상매체와 경쟁하거나 그것과 제휴해야만 하게끔 되었다. 영상시대에 문학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과감히 스크린과 제휴해야 한다고 처음 주장했던 사람은 미국의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였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초에, 문학이 영상매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답적이고 귀족적인 스스로의 패각에서 벗어나, 영상매체가 갖고 있는 대중 문화적 요소들을 적극 수용해야만 된다고 제안했다. 그는 물론 영화의 상업주의적 속성과 대량복제로 인한 문제점들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소설 역시 대량복제에 의한 상업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은 원래 귀족들을 위한 장르였던 시나 희곡(비극)과는 달리 대중을 상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들처럼 스스로를 귀족화, 고급화하는 것은 독자의 상실로 인한 소설 장르의 자멸을 초래하게 된다. 30여 년 후의 상황을 정확히 예시했던 피들러의 통찰력은 오늘날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과연 지금 소설은 날마다 엄청난 숫자의 독자들을 영상매체에 빼앗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서점에 가는 대신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마치 책처럼 서가에 꽂혀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고르며 주말저녁에도 책을 펴는 대신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고 <주말의 명화>를 본다. 출판인들 역시 영상세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요즘에는 시각디자인과 표지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제 우리가 본격적인 <영상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시나리오와 아주 홉사한 소위 <영상소설>들도 출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마이클 크라이튼의 <주라기 공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한 편의 영화대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특이한 소설이다. 특히 전체 구성과 장면 전환, 그리고 <카메라의 눈> 기법과 스케치식의 간결한 문체는 이 작품이 원래부터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데도, 그 소설이 영화화될 때, 크라이튼은 데이비드 코프와 더불어 <주라기 공원>의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물론 그 영화 대본은 원작보다 훨씬 더 못했으며, 영화 역시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룡을 제외하고는 별로 괄목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한 가지 교훈, 즉 그 어떤 영상소설도 바로 영화대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을 바꾸면, 제아무리 영화대본처럼 보이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소설과 시나리오는 엄연히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라기 공원>은 영화를 의식하고 씌어졌다기보다는 영상매체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을 겨냥하고 씌어진 소설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작가들 가운데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할리우드식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뉴욕주립대의 마크 셰크너 교수는 요즘에는 영화화될 것을 미리 의식하고 쓴 소설, 또는 아예 영화용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튜디오 소설>도 산출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을 든다. 그는 그 소설의 “공허하고도 스케치적인 언어는 마치 그 공백을 영화제작자가 채워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셰크너 교수는 오늘날 영화와 문학의 관계는 상호보족척이며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만일 우리가 문학양식에 끼치는 시장의 힘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영화가 소설의 가장 강력한 시장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리우드는 소설의 보물섬이다.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영화는 소설의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자이다. 더 나아가 나는 현대 미국소설의 건강은 전적으로 영화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소설은 적어도 부차적 판권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충분한 소설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10년 동안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작가들을 나열하면 그야말로 문인사전이 될 것이다. – 윌리엄 스타이론, 앤 비티, 월리엄 케네디, 로버트 스톤, 아이작 베셰비스 싱거, 매헐린 로빈슨, 제이 맥키너니, 앤 타일러, 존 어빙 등 영화는 새로운 촉진제가 되었고, 작가들에게 금항아리가 되었으며, 그 매개체 사이의 공식적이고 상업적인 교류는 두 장르 모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문학과 영화는 앞으로 더욱더 긴밀하고 활발한 관계를 갖게 되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의 영화화나 작가들의 영화제작 관여는 194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예컨대 리처드 라이트(<미국의 아들>), 노먼 메일러(<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트루먼 캐포티(<냉혈>),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 버나드 밸러머드(<내추럴>), 필립 로스(<컬럼버스여 안녕>), 커트 보네것(<제5도살장>), 저지 코진스키(<정원사 챈스의 외출>), 존 바스(<여로의 끝>), 앨리스 워커(<칼라 퍼플>), E. L. 닥터로(<래그타임>) 등이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문학작품들 역시 끊임없이 영화로 만들어져 왔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살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토머스 하디의 <테스> 같은 작품들은 벌써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으며, 최근에는 멜 깁슨과 글렌 클로스 주연의 <햄릿>(셰익스피어)과 제라르 드파르듀 주연의 <제르미날>(에밀 졸라), 마틴 쉰 주연의 <삼총사>(알렉상드르 뒤마), 대니얼 데이 루이스 주연의 <라스트 모히칸>(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또는 데미 무어 주연의 <주홍글자>(나사니엘 호손) 같은 문학작품들이 다시 만들어졌거나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원작의 격조를 망쳐놓은 실패한 영화들도 있다. 피들러는 그 대표적인 예로 허만 멜빌의 <모비 딕>과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든다. 예를 들어 <모비 딕>은 주로 어떤 배우들, 예컨대 에이허브의 역을 맡고 싶어했던 존 베리모어와 그레고리 펙 같은 배우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자주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에이허브가 추구한 지적 동기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데다가 감독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에이허브를 그만 미친 사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레고리 펙의 경우에는 (그는 차라리 고래 역을 맡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고 당시의 평론가들은 빈정대었다) 미친 에이브러햄 링컨을 만들었으며, 베리모어의 경우에는 미친 베리모어를 만들었다. 사무엘 골드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가장 최근의 파괴자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이 작품에 진실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론에 입각해서인지 미시시피 강변 장면을 새크라멘토 강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섹스는 당혹스럽지만 로맨스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톰 소여를 여자로 설정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허크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그 영화는 차라리 그랬더라면 재미라도 있었을 테니까.

영화가 원작을 왜곡하고 훼손한 경우는 포크너와 헤밍웨이의 경우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포크너의 <성단>은 그 역을 맡은 이브 몽땅같은 유명배우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악한을 다분히 풍자적이고 동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헤밍웨이가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일어나 나가버렸다는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작품의 마지막에 죽어야만 되는 주인공이 버젓이 구출되어서 살아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원작보다 더 잘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원작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들도 많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지 스티븐스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는 거칠고 직선적인 문체로 씌어진 시어도르 드라이저의 소설 <미국의 비극>을 원작보다 훨씬 더 감미롭고 세련된 작품으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또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경우에도 영화가 원작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To be continued~~

코리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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