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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6.10.1987! <김광식 교수의 현장 르포, 그 때를 잊지말자!>

(사진은 연세대 학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직격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종창 학생이 뒤에서 부둥켜 안았다. 사진: 구글 이미지)
<Seoul : Prof. Kim, Kwangsik>
6월항쟁 30주년 맞이하는 날에 지난 30년 전에 쓰러진 열사들을 기억해본다.

 

 2017년 6월 9일은 박종철, 이한열에서 이재용, 황보영국, 표창두, 장재완 열사로 1987년 6월 9일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대학생 이한열이 경찰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이한열 등 대학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경찰청 인권센터(대공분실)에는 ‘박종철 기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 ‘국민운동본부’에서 지도한 구호는 호헌철폐, 직선개현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 9일, 전두환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후 약 한달간 사경을 헤맨 끝에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같은 해 1월 발생한 박종철 서울대생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6.10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군사독재정부를 상대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었고 이땅에 민주화의 씨앗을 뿌린 6월항쟁이 30주년을 맞았다. 아직 6월항쟁 탄압에 대한 진실규명은 여전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그 결과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주열사들 역시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지금은 살려야 할 때이다.

 

이태춘 열사 이야기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는 ‘민주화’ 깃발아래 30만 명이 모인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회사원이었던 고 이태춘 열사(당시 27세)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가 어둑해진 저녁, 시위행진 행렬은 부산 동부경찰서로 향하는 좌천동 고가도로 위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던 대치 국면은 점점 격화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일석(61, 시인)씨는 “이전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최루탄이 쏟아졌다”며 “가슴이 탁 막혀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 김 씨는 갑자기 옆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 씨는 “그가 바로 이태춘 열사”라며 “숨이 막혀 갑갑함을 호소하다 난간 근처에서 사고가 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 박영옥(86) 씨는 “그 날 말 한마디 없이 아침 잘 먹고 나갔는데 그리 됐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병원에 누워있던 아들은 어머니께 “최…최…최…”소리만 했다고 한다. 그것이 아들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재용 열사 이야기 1987년 6월 25일 새벽. 집시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지명수배를 받던 고 이재용(당시 23) 열사는 경기 성남시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 숨어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외대왕산 호헌철폐 독재타도 투쟁위원장’을 맡아 용인과 성남지역 6개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6월 항쟁을 이끌고 있었다. 오전 2시쯤, 경찰이 이 열사가 숨어 있는 대학 안으로 잠입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문 쪽은 이미 전경들이 막고 있었다. 이 열사는 학교 뒤편 비탈길로 탈출했다. 하지만 숨가쁘게 달려가던 이 열사는 마주 오던 승용차를 차마 피하지 못하고 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친구 김영욱(54) 씨가 기억하는 이 열사는 주위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열사는 자취방 월세를 못내는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등록금을 털어 월세를 대신 내주고 휴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매일 친구 집을 전전하는 괴로운 수배생활 속에서도 동지들에게 ‘우리가 이길 수 있다’며 격려했던 이 열사다. 김 씨는 “우리가 6월 항쟁 세대라 하지만, 아직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 규명이 명백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재용 열사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 노동자 표정두 열사의 이야기 그 밖에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열사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식 연설에서 언급한 공장 노동자 표정두 열사는 1987년 3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등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항쟁 책임지라” 등을 외치며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가다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흘만에 숨졌다. *노동자 황보영국 열사의 이야기 1987년 5월 17일,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하며 “독재 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치며 달리다 서면시장 부근 도로에서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5일 새벽 5시에 숨을 거뒀다. 당시 경찰은 사복형사를 배치해 찾아온 시민들의 면회를 막았고, 가족을 협박하고 회유해 열사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못했다. 황보영국 열사의 분신 소식을 전한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전한 모습이었다.

 

보안대에 끌려간 장재완 열사의 모습 장재완 열사는 부산대학교에 다니며 통일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장 열사는 1987년 3월 23일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중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동료의 명단과 문건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보안대(현 국군 기무사령부)에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장 열사는 동지들을 보호하고자 같은 달 26일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30일 부산대 총학생회 우편함에서 발견된 그의 유서에는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하고자,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 우리의 혁명과 투쟁이 너무나 순결하고 숭고한 것이기에 나의 희생은 당연한 결과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이창훈 집행위원장 대행은 “이한열 열사나 박종철 열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부각된 분들도 계시지만, 대다수의 열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며 “모든 열사들을 함께 기억해야만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당시 날짜는 1987년 6월로 흩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바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총본부에서 정한 시위의 날 이었다. 그런데 이한열 열사는 그 보다 조금 앞서 쓰러져 갔다. 이종창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은 1987년 6월 항쟁 때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고 이한열 열사를 끝까지 부축했던 인물이다. “우리가 구호를 2~3번 외치자마자 전경들이 최루탄을 일제히 쏘았습니다. 그리고 사복 경찰들이 밀어닥쳤습니다. 화염병 2개를 던지고 마지막으로 학교 쪽으로 뛰어들어가는데 정문 안쪽에 누군가 쓰러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종창 관장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년)의 죽음 당시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쓰러진 이 열사를 부축한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의 동갑내기 학생이었다. 이 관장에 따르면 1987년 6월 9일은 유난히 쾌청한 날이었다. 서울 신촌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민주광장 집회에는 적당한 수의 학생들이 모였다. 하루 뒤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여는 ‘6·10 국민대회’(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집회였다. 스크럼을 짜고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고 맨 앞의 ‘소크조’(뒤의 집회행렬을 보호하고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는 조)에 속한 남학생들이 정문 밖에 흩어서자 마자 일제히 최루탄 수십 발이 발사됐다.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바로 사람을 조준하다시피 해서 쏜 것이었다.

 

1987년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숨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 2점이 올해 공개되었다.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찾은 네이션 벤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이 사진을 제공했다. 사진은 1987년 6월 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영학과 2학년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씨가 뒤에서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한열을 안다시피 일으킨 그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이한열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로이터통신 기자가 찍은 이 사진 속 피 흘리는 젊은 청년의 모습, 부축한 이의 막막한 눈길은 독재정권의 폭압에 희생된 순수한 젊은이의 모습을 바로 보여주면서 보는 이들의 가슴에 ‘화인’을 남겼다.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한열이를 한참을 끌고 올라와 테니스장(현재 공학관) 근처까지 왔어요. 힘들고 최루탄 가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학생 두 명이 제 쪽으로 뛰어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는 정신을 놓고 쓰러졌어요.” 얼마나 시간이 흐른지 모른 채 눈을 떠보니 혼자 누워 있었다. 자신이 부축했던 이가 누군지 알지 못한 채 이종창 관장은 털고 일어나 다시 나가서 전경들과 싸웠다. 이한열이 쓰러진 후 연세대는 반독재투쟁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누운 이한열을 지키기 위해 학생들은 병원을 지켰고 경찰은 호시탐탐 학교 진입을 노렸다. 5일 후인 14일 ‘연세총궐기대회’가 열리는 날 이번에는 이 관장이 전경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한열이의 아버지는 한열이가 죽은 지 1~2년 후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한열이의 어머니(배은심 여사)는 그 후 투사가 되어서 수년간 전국민족민주주의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을 지내기도 하시면서 계속 투쟁 현장을 지키셨어요. 그리고는 저를 만나면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겠다’면서 손을 꼭 잡고 등을 감싸안아주곤 했어요.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지 하루 모자란 30년이 지난 가운데, 배우 우현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찍힌 사진이 화제를 모은다. 이한열 열사 장례 집회에서 영정 사진을 든 우 의원과 태극기를 들고 있는 우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은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때 필자는 연세대학교에서 모여 일차 슬픈 장례식을 치루었다. 그때 고 문익환 목사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모든 열사와 의사들의 이름을 부른 다음에 마지막으로 부탁하노니, 오직 한가지를 부탁한다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에서 서울 시청 앞까지 수많은 대중이 모든 도로를 차지하면서 이동하였다.

 

그때 필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서 여러 대학교에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 앞에 가보니까 이인영 고대총학생회장이 시위의 사회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청중이 너무 많아 도였다. 이날 시청앞에서의 해산은 결국 광주로 갈 사람과 청와대로 갈 사람을 나누고 있었다. 잠시후 벼락치는 소리와 같은 최루탄 소리가 들린 후 우리는 거기에서 헤어졌다. 그러나 필자는 1987년 6월항쟁의 추억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니 그때의 민주주의 노선을 지금도 기꺼이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밖에 6월 여러 날에 걸쳐 명동성당에서 밤을 새우면서 민주주의를 논의하던 그 기억은 지금도 새롭게 느껴진다. 그날을 잊지 않은 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우리 나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지의 촛불을 켤코 꺼지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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