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Prof. Yoon Geum Ja>
“노자” 에서 ‘無知’ 란 ‘明'(밝은 지혜)을 얻기 위해 ‘知不知’의 과정을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앎이다. 노자의 明은 인식론적 탐구와 함께 실천적 수양을 병행해야 얻을 수 있는 직관적 앎이다. ‘知不知’의 과정에서 분별지와 지모는 물론이고 탐욕을 제거하고 무위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明’, 즉 무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明’에 이르기 위해서는 ‘知不知’,’欲不欲’,’爲無爲’ 의 상호작용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명의 도는 인간이 개념화하여 이름을 붙여놓기 이전의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우리의 지적능력을 초월한다. 노자의 인식과 진리는 차별을 거부하고 사물을 있는 그 자체로 깨닫는 것이다. “노자” 에서 존재의 인식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과 대립해서 자연에 인위적인 것을 부과하는 것을 철저히 반대한다.
노자의 인식론은 직관 (직관은 문자 그대로 의식이 그것의 대상과 직접 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직관은 추리적 앎과 대립된다. 직관적 앎은 의식과 그 의식의 인식 대상과의 사이에 아무런 매개없이 이루어지는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앎이다. 다시말해 지적인 작용이 없는 앎이다. 박이문의 노장사상 발췌) 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물현상은 옳고 그름을 따져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직관이란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는 상태에서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지적인 작용 없는 앎”(박이문, 노장사상) 이다.
노자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앎 즉 깨달음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깨달음은 곧 의식 내부의 문제를 알고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깨달음에서 인간 관계나 복잡한 사건의 모든 현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이란 문제의 원인이 바로 우리 자신안에 있는 정신적 편견과 집착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편견과 집착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위를 주장했다. 무위란 인간이 도를 닮는 삶을 살기위해 따라야 할 행위의 원칙이다. 인간의 문제는 자신의 탐욕을 위하여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 시켜 소유물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대상화 작용에서 인간은 주체가 되고, 자연은 인간과 대립시켜 놓은 객체로서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데카르트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표상하는 자아’라는 의미의 주체이다.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도모한 것은 단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에 유용한 구체적인 지식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지식은 인간의 삶에 유용한 것이어야 하고, 삶의 유용한 지식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데카르트는 이런 지식을 개별적인 자연과학과 같은 실제적인 학문에서 발견한다. (데카르트, “방법 서설,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이현복 옮김)
노자는 대상화된 사물을 도구로 보는 데에는 지적작용이 개입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적 작용은 데카르트의 지식에서 볼 수 있듯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눈앞의 사물을 잘 알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러한 의도된 목적을 위해 사물을 도구로 보는 태도를 철저히 반대했다. 노자는 인간의 근심과 고통은 ‘위학’의 과정에서 빚어진다고 보고 “배우기를 끊으면 근심이 없다”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不可不畏.
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선지여악, 상거하약. 인지소외, 불가불외.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亨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황혜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형태뢰, 여춘등대. 아독박혜기미조,
如孀兒之未孩. 내래兮若無所歸.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여상아지미해. 내래혜약무소귀.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아우인지심야재,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요兮若無止.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담혜기약해, 요혜약무지.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獨異於人而貴食母.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이귀식모.(노자20장)
‘배우기를 끊어야 할 것(절학)’은 높임과 낮춤, 아름다움과 추악함 등과 같은 상대적인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가치판단은 사람들의 성향과 시대의 조류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것들로서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다. 노자는 상대적인 가치판단과 취향에 얽매여 감정이 좌우되거나 기교와 허세를 부려 사람의 이목을 끌려는 행동은 인간의 자연성을 해친다고 보았다. ‘위학’ 즉 분별지가 ‘근심거리’가 되는 이유는 외적 사물의 가치를 따져 집착하게 되고, 이것을 소유하기 위해 온갖 영악함과 현란한 말재주로 사람을 속이고 위선으로 신뢰를 가장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에 의하면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대상으로만 보게 되어 물욕에 가려진 내적인 인격성이 천박해진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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