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봉수대 : 거화식을 하고 있는 장면)
한국인의 얼이 살아 있는 남산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봉수대 행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전통 무장의 옷을 입고 수도 한양을 지키며, 나라를 지켰던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남산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곳 남산 봉수대는 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예전에 군대와 군대끼리의 소통을 했던 고대 통신 수단의 하나로 불과 연기로 나라의 위급함을 한양 궁궐에 직접 보고하곤 했다. 특히 남산 봉수대를 목멱산 봉수대라 일컬었다.
동양과 서양에서 고대사회부터 상용된 봉수 의식은 그 시대의 파수꾼 역활을 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1149년 (의종 3년)에 정식으로 법으로 제정하여 실시했고, 서북면병마사의 조진약의 상주에 의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하되 평상시에는 한 번씩 올리고, 위험 정도에 따라 급수를 정해서 2급일때는 두 번, 3급으로 중요성의 강도가 강할때 세 번, 4급일때는 네 번씩 올리고, 봉수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방정, 백정으로 구분되었다. 봉수소에 배치되었던 봉졸은 천민 계급으로 국가 관리가 죄를 범했을 때 봉졸로 배치되는 예도 있었다고 위키 백과는 말해준다. 이 밖에도 남산 타워에서는 한국 전통 무예 시범과 함께 각종 전통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특히 무료 한복 체험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 잡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도 방명록에 이름을 게재하고 무료 체험을 하기 위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무료 한복 체험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때에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으며, 평상시에는 횃불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그리고 접전을 하게되면 다섯 개로 올리되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이 불 가능할때는 봉졸들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 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는 오원이 병조에 보고하고 오장이 관할 진장에게 보고하였다.
봉수대에서 봉수의식등을 진행하고 있던 “한국의 장”의 윤진영 팀장과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윤 팀장은 “해외에서 15년동안 생활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의 얼, 한국의 정신을 후 세대들에게 계속 전해 줄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고, 이 일을 하게 된것에 대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 유산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서 세계속에서 우리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인정 받으며 우뚝 설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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