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Eliot : Photo from Google Images)
<Korea : Prof. Lee, Kangwha>
4) 기억과 예술
예술 장르에서도 기억이라는 주제는 크게는 역사와 집단의 의미, 작게는 한 개인의 존재의미와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기법은 시간예술로 분류되는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차용되는데, 이 두 장르에서 기억과 망각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간적 과정을 보여주는 유용한 기법이 된다 (대표적인 기법이 바로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이다. 1910-1920년대에 걸쳐 영국 문학에 있어서의 소설의 실험적 방법으로서 심리학에서는 윌리엄 제임스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사고의 흐름’stream of thought (1884)이라 하였고, 이후에는 (1892)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이라고 하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 큰 영향을 받은 이 개념은 어느 한때 개인의 의식에 감각, 상념, 기억, 연상 등이 계속적으로 흐르는 것을 가리킨 말이며, 이것을 문학에 이용하여 큰 효과를 거둔 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이다. 그는 이어서 <율리시스> (1922)에서도 의식의 흐름을 철저하게 추구하였는데 1인칭에 가까워져서 주인공의 성격 전체를 보일 수 있도록 기분이나 감정이 리듬이나 패턴을 수반하여 표현되어 있다. 이런것을 ‘내면의 독백’ 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버지니아 울프, D. 파소스, 헤밍웨이, S 앤더슨, 포크너, T.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등도 이러한 방법을 활용하였고, 시인으로는 T.S. Eliot, G. 스타인, 윌리엄스, 연극에서는 E. G. 오닐, A. 밀러 등의 작품에서도 부분적으로 응용되었다.) 우선, 문학에서 기억은 역사적 기억의 정통성에서 벗어난 기억들의 정당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공식적이거나 정치적인 기억에서 배제된 것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를 배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개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찬탈해 가며,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만든 공식적 역사를 자신들을 기념비로 남긴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작가들은 배제되거나 왜곡된 기억 다시 불러 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재생된 기억에 새로운 시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선택되고 보존되는 기억은 현재의 기반으로서만 아니라 미래를 구축하는 기반으로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BqOSJD2if8
(James Joyce, Ulysses Part 1. Stream of Consciousness, audio book )
영화의 경우에는 기억과 망각은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기억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이라는 영화적 시간의 주제는 2차 대전 이후 60년대 유럽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에서 시간과 의식을 드러내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럽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지만, 68혁명과 같은 또 다른 정치적 격동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냉전체제의 허구성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두 강대국의 패권적 전략이 결국 전쟁 그 자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전쟁이 남기고 간 어두운 정신적 상흔들을 씻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사유의 가장 큰 축으로서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책무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럽의 많은 모더니스트 감독들은 자신들의 영화에서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는 현실을 그려내면서 그들이 결코 전쟁의 역사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리하여 영화 속의 역사와 기억은 현존의 이미지가 아니라 부재의 이미지로 재현되며, 따라서 상상이 필요하게 된다. 영화는 역사와 기억을 시간에의 사유, 관념, 꿈, 무의식 등을 통해서 담아내면서 현존과 부재, 현실과 상상을 공존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의 설명을 잠시 빌려보도록 하자.
영화를 근본적으로 시간성의 매체로 파악하는데, 시간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 헐리우드 영화의 경우, 공간 속에서 행동이 일어나는 방식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왔으며, 플래시백(flashback)이 사용된다고 해도 시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동반됨으로써 영화에서 시간은 간접적인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에서 꿈을 꾸는 장면마저도 현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에서의 시간성 전달 방식은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시간성의 불확실함 자체가 영상을 통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전통적인 헐리우드적인 시간성을 대치하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는데 (헐리우드 고전 영화인 경우, 역사 혹은 시간은 인과론적 관점에서 서사가 발생하고 전개되는 동질적 배경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후 유럽에서 대두된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서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과거의 역사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인간의 기억 혹은 무의식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기억이 현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80년대 이후의 일련의 헐리우드 SF 영화에서 좀 더 변형된 방식으로 재현된다.)
첫째,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종합적 상황이 아닌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상황으로 나타난다.
둘째,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상투성과 진부함이라는 인식에서 영화에서 일상성의 장면이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사건의 연속성이 끊어짐으로써 영화에는 빈 공간과 우연성이 나타나게된다. 프랑스의 누벨 바그가 이를 대표한다.
셋째, 액션과 리 액션이 이어지는 대신 영화의 인물들은 이리저리 소요하며 부유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마지막은 세계대전 직후의 필름- 누아르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 양상은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에서 출발하는데 이들은 운동, 동작, 공간이 아닌 시간성 자체를 보여주는 시지각적, 음향적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운동 – 이미지에서 시각 – 이미지로의 이동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전까지 시간은 몽타주의 중계를 통해 운동에 의존해 왔으며, 운동에 종속된 형태로 몽타주로부터 흘러나오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현재에 귀속된다면, 시간은 몽타주를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는 것 이외에는 재현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재는 과거. 미래와 불가분하게 공존하고 있으며, 들뢰즈는 영화가 이미지를 통해 이처럼 현재와 공존하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착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리하여 현대 영화에서 인물들은 순수한 시지각적, 음향적 상황에 사로잡혀 일상적인 것 자체에 내맡겨진다. 이리하여 이제까지 시간이 운동에 의존하던 관계는 완전히 전복되어, 일탈적 운동이 시간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인물이나 움직임이 부재하는 빈 공간- 정물과 풍경 등을 찍은 장면- 들은 순수한 관조와도 같은 절대성에 도달하면서,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주체와 대상, 세계와 자아의 일치를 촉발 시키는 것이다. (Gilles Deleuze, Cinema 2, Pg 180)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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