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은 참는 인내
말言이 절寺안에 깃 들었으니,
염화미소로 화답하듯
제 몸 속에 말을 가두어야 하는게 시詩일 터…
몸속에 말을 가두는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니, 내 생에 詩라는 장르는 없다.
대신,
말하고 싶을 때 열 번은 참는 인내는 내 가슴에 불 도장으로 새겨둔다.
<미래로 가는 시인들의 나라 1집: “우리들의 언어, 그 영혼의 아름다움” 중에서>
*** 시를 짓는 일이 집을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토대를 세우고, 기둥을 세우고, 방과 부엌을 구분짓고, 화장실에 욕조를 들여놓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붕도 덮고 장판도 깔고, 구들 밑에는 막히지 않게 열이 잘 소통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말씀이 절안에 있는 “詩”는 절제와 품격을 지키며 도를 수행하는 선인은 아닐까?
전상훈 님의 “열 번은 참는 인내” 를 통해서 시가 얼마나 깊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 해서 그것이 결코 시는 아닐터, “몸속에 말을 가두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니…”고 고백한다. “열 번은 참는 인내” 는 절제된 감정과 사유로 사리처럼 맑고 고운 보석같은 언어의 알갱이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 시를 짓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러한 고백이 “가슴에 불 도장으로 새겨” 두는 일이 시는 아닐까 생각해 보는 저녁이다. 토요일 밤, 갑자기 내려간 기온에 펑펑 폭죽을 터뜨리던 벛꽃은 달빛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풀어진 옷 고름을 다시 여미고 있다. 개나리꽃, 벚꽃, 하얀 배나무꽃, 꽃꽃꽃…봄은 왔는데 진정한 봄은 채 맛보지 못한 채 뜨거운 여름으로 내 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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