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흔적 그리고 이별
시간을 거부한 채
비켜서있는 나에겐
산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은
같은 색채의 다른 그림일 뿐이다
10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회색의 세월들을 어둠 속에서
하나씩 불러오지만
낡은 교과서의 활자처럼
시간과 기억들은 흐리게 남아
있을뿐이다
글자들이 지워지고
골목이 지워지고
해장국집이 지워지고
친구마저 지워진다
사라져버린 것들과
이별하고 귀가하는
나를 아내는 담벼락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빈한 모습으로 맞이한다
*** “글자, 골목, 해장국집, 친구 마저 지워진다” 의 절에서 문득 지나간 세월들도, 썼다 지웠던 수많은 활자들의 행방도, 해장국집의 아침분위기도, 그리고 함께 했던 친구들도 지워진다는 것은 결국 시.공간의 수평적, 또는 수직적 이동이란 생각이든다. 얼마나 많은 골목길을 우린 지나왔는지, 또 얼마나 많은 해장국집을 들락거리며 먹고 마시며 살았는지, 언젠가는 희미해질 친구에 대한 기억도, 추억도 모두 어느 순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화자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을 이 시는 가장 겸허하게 받아 들이고 있어서 읽는 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아직은 식지 않은 해장국과, 친구들이 있는 인생의 골목에서 글자로 왕래하며 살다가 어느 날 나의 시간이 온다면 그 시간을 맞이하는 가장 가벼운 마음이 될 것 같은 이 시는 아주 깊어서 아주 무겁지만 또 가볍다. 세상에 크게 매이지 말고 이별하는 그 모든 것들을 마음 편하게 맞아들이자는 숨은 의도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별을 통해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을 기대한다는 뜻에서 결코 이별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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