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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usation and Freedom, Holistic View 2<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허구적 진실, 그 충만함과 자유로움

학제적(學際的 interdisciplinary)라는 말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은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학문과 학문 사이의 경계가 와해되고, 여러 지적 영역 사이에서 유동적이고 상관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 자연과학과 인문학, 문학과 역사, 철학과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상호간 적극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과학자들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단절을 우려하였고, 신역사주의자들은 문학과 역사의 벽을 허물려고 노력하였고, 해체주의자들은 문학과 철학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를 거부하였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과 종교를 함께 아우르는 개념으로 ‘통섭’을 주장하였고, 역사학자 로렌스 스톤은 “역사학에서 실재하는 것은 문학에서의 상상과 마찬가지로 상상으로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데리다 역시 “철학도 궁극적으로 문학 장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함을 강조하면서 문학과 철학의 전통적 구분을 일종의 ‘지적인 폭력’으로 여기는 로티와 의견을 같이 하였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많은 논쟁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고대철학에서 문학, 혹은 예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예술은 열등한 것을 모방해서 더 열등한 것을 낳는 행위이기에 화가는 실재가 아닌 가상을 모방하면서 그 모방 기술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며, 시인 역시 언어라는 물감으로 자신의 시에 채색을 하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보다 시가 더 보편적이라는 차원에서 철학적임을 주장하였지만 플라톤의 견해가 이후 문학과 예술에 관한 관점을 형성하는데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문학작품을 멀리하라고 수차 경고하였는데 이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 극도로 불안감을 드러낸 개신교, 특히 청교도주의자들에 의해서 다시 반복된다. 데카르트 역시 뛰어난 수학자로서 인간의 합리성을 사유의 기초로 삼으려고 했기에 문학과 철학에 대한 플라톤적 구분은 당연히 귀결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경향은 여전하였는데 특히 분석철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들에 의하면 정의적이고 가치적인, 이른바 수행적 언어행위로서의 문학이 아닌, 실증적이고 인식적인, 이른바 기술적 언어행위에 포함되는 철학 혹은 과학이야말로 이상적인 언어로 분류되는 것이다.

플라톤을 비롯한 몇몇 철학자의 주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문학이 미토스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시인은 구체적인 영상을 정서적 언어를 통해서 그려내지만, 로고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철학이 논리적 언어를 통해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을 전개를 전개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다. 이런 차원에서 시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매우 비합리적이고 심지어 무질서하게 보여질 수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호메로스와 관련된 전설이 잘 보여주듯이 시인들이 고대 이래로 ‘뮤즈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람’ 혹은 ‘신들린 사람’, 좀 더 심하게 말해서 ‘미치광이’ 등으로 호칭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합리성에서 시인의 위대함이 비롯된다는 것이 문학의 역설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 혹은 예술의 근원적 상상력이 이러한 ‘광기’에 있으며, 무질서한 상상력을 통해서 문학가는 특유의 신비하고도 황홀한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물론 시인도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대상에 눈을 던질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지만, 철학자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영원한 존재라든가, 사고의 정확성 혹은 궁극적인 가치 등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문학이 언어를 통해서 생생하고, 감각적인 형상을 창조하는데 반해서,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표현 대신, 진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에 전념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오히려 과학과 흡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의 고유성을 철학을 비롯한 다른 합리적인 사유방식과의 비교에서 확인할 수 없다. 즉 객관적인 사태나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시는 그 존재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시에 대한 하이데거적 설명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인이란 은총의 천후(天候)에 순응하는 자들이다. 그들만이 생명을 예감하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대지에 버티고 있다. 신은 이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가운데 인간을 두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기에 그 둘의 직접적 접촉은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시인을 신과 인간과의 매개자로 하여 신이 인간에게 주려고 했던 ‘사랑’을 이들을 통해서 드러내게 한다. 이제 엄밀한 ‘간접성’에 속하는 시인은 신의 성스러운 ‘법칙’에 속하게 되고, ‘은총’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유한한 것을 앞질러 현존하는 ‘무한한 것’에 의지하고 또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원형인 ‘포도의 신’ 디오니소스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핀다로스의 시를 인용하면서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시인의 광기를 이렇게 비교한다. “그리하여 이제 대지의 아들들은 위험을 모르고 하늘의 불을 마신다. 그러나 시인들이여!! 우리에게 온당한 것은 신의 풍우 가운데 맨머리에서서 그것을 마셔야 하리니…” 여기에서 ‘하늘의 불’은 바로 ‘시인들의 영혼 가운데 전화된 불, 즉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축제의 밤을 지낸 후 “어둠 속에서 노심초사 새벽을 기다리는 디오니소스처럼” 긴 기다림 끝에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어둠과 카오스로서의 이 세계를 빛과 로고스의 세계로 이행하고 대지는 마침내 밝은 태양 아래서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모든 과정이 전문적 지식으로부터 빠져 나온 예술적 충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예술은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

플라톤의 지적처럼 시인과 예술가가 거짓말쟁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잠시 우리를 현혹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적 사유가 객관성을 위해서 우리에게 강요하였던 주객분리라는 이원론도 사라지고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여하한 믿음도 붕괴된 이 시점에, 환타지와 비합리성으로 재무장한 시와 예술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생태학자들의 실증적인 연구물이나 국제정치학자들의 정치(精緻)한 논문들 대신, 시각적 환상의 극치인 <아바타>라는 시물레이션을 통해서 생태파괴에서 나타난 인간의 야만성과 패권적 대외정책이 초래할 특정국가의 비극적 결말을 확인하게 되는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시(poet)라는 단어가 그리스어 poiesis에서 유래하였고 그 의미가 ‘무에서 유의 창조’였다면 시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세계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언어가 존재의 집”이며, “인간이 존재의 목동“이라고 말했을 때, 하이데거는 이른바 비은폐성(aletheia)으로서의 시적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으며, 들뢰즈가 “이 시대의 진정한 철학자는 바로 예술가”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이른바 ‘허구’를 들려주는 시와 예술이 철학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진실’을 담보하는 사유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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