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Years, Child Tracks Down Father’s Murderer

 

Photo from Google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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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현지 시간) 1986년 뉴욕 맨하탄의 주택지역에 위치해 있던  호세 마티네즈 (사망자) 가 운영하던 도미니칸 익스프레스 레스토랑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사망자의 딸이 오랜 시간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던 범인을 찾아서 길고도 긴 추적을 벌인 뒤 드디어 범인인 유스토 산토스( 그 당시 16세)을 찾아 법의 심판대에 앉게 했다고 마리 클레어지가 밝혔다.

사망자의 딸인  요셀린 마티네즈는 그 당시 9 살의 나이였으며, 어머니 이달리아 마티네즈와 아버지 호세 마티네즈의 외동딸로 자라났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충격을 넘어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꼭 찾아서 다시 심판대에 앉게 하겠다는 각오로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범인의 행적을 파악했다.

사건은 1986년 11월 22일 저녁에 발생했는데, 산토스가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마티네즈가 운영하던 레스토랑에 와서 웨이트레스에게 욕을 하고 심하게 다루자, 주인인 마티네즈가 손님들에게 나가줄 것을 요구하자 갑자기 범인인 산토스가 총을 난사해서 결국 마티네즈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며칠 후 산토스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뉴욕시로 와서 도미니칸 공화국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물론 산토스는 법정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절대 잊을 수 없던 요셀린은 25년동안 범인을 추적해왔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누구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사건이 그대로 미궁에, 기억속에 사라진 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뉴욕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요셀린은 가수, 배우, 모델이 되는 것이 꿈이 었다. 그 꿈을 이루는데 있어서 늘 아버지의 죽음이 장애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고 한다. 요셀린이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된 어느 날 그녀가 살던 지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자신은 진정한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닌 어떤  직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34지역 경찰서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확인한 사실은 그때 당시 그녀의 아버지 사망 사건을 조사한 수사관이 1987년 산토스와 통화를 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통화 내용엔 산토스가 범행을 자백했는데, “자기 방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에는 두 나라간에 범인 본국 송환조약이  없었다. 산토스는 도미니칸 공화국에서 살고 있었다.

산토스는 1988년 도미니칸 공화국에서 이 살인 사건으로 1년 형을 살고 있었으며,  뉴욕 법정은 요셀린 아버지 케이스를 클로스 했다. 요셀린은 대학을 졸업하고 앨범을 제작하고 도미니칸 공화국에서 발행하는 지역 신문 지상에 자신의  음악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지난 시간 도미니칸 공화국과 아버지 사건이 다시 머리속에서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난 눈물을 한없이 흘렸어요. 마치 내 아버지가 내 마음에 다시 오신 것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만약에 아버지가 나의 음악이 아버지의 조국에서 히트를 치게 된것에 자랑스러워 하실 것 같은 생각에서요.” 그 후, 그녀는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가 재혼을 한 뒤로 그녀에게 두 명의 동생이 있었지만 오직 자신이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유스토 산토스를 찾기 위해 온라인을 뒤지고, 정보를 사서 확인하였지만 결국은 산토스의 생년월일을 알 지 못하여 헛수고가 된 채 돈 만 낭비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결국 요셀린은 34지역 경찰서에 아버지에 사망사건 파일을 요구하였고, 지난 2013년 1월 경찰은 그녀에게 사건 내용을 취합한 서류를 건네 주었다고 한다. 그 파일에서 요셀린은 범인의 생년월일을 파악하였고, 결국은 그 정보를 이용해서 확인을 한 결과, 범인 산토스는 미국의 마이애미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20년이 넘게 미국안에서 체류하여 시민권자가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1989년 미국으로 건너온 뒤 결혼을 하고 5명의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직업도 청소부에서, 정부청사에서 청소원으로, 그리고 회사에 소속되어 재산관리를 담당하는 매니저로 철저히 세탁되어 살고 있었다.

요셀린이 34지역 경찰 수사관과 뉴욕 경찰서 미궁사건 담당에 이 사건을 재소하였으나, 뉴욕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이몬드 켈리  폴리스 커미셔너는 ” 이 사건은 덮여져서는 안된다.” 라고 말했고, 결국 2013년 여름, 듀허스트 형사가 마이애미로 출장을 간다고 요셀린에게 전화를 하였고, 요셀린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요셀린은 듀허스트형사의 전화를 받았으며, 내용은, “그가 자백을 했다.” 고 말한 뒤 경찰로 인계되었고, 몇 개월 뒤 뉴욕 법원에 섰다.  그 당시 요셀린은 ” 그를 본 순간 내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인식해야 했다. 그것이 더 슬펐다.” 라고 술회했다. 그리고 산토스는 직장을 잃고, 마이애미에 있는 집도 잃고 리커스 섬에 있는 감옥으로 갔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브롱스로 올라와 집이 없는 홈리스로 살고 있다.  요셀린은 그 동안 살해 협박 메일을 받았다. 경찰은 그들을 추적하지 못했다. 2014년 뉴욕 법원 스톨즈 판사는 ” 이 사건이 1988년 클로즈한 사건으로 다시 이 사건을 2013년 오픈한 것에 대해 ‘reasonably diligent’ they were nonexistent.” 로 이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 2014년 12월 크리스마스 전, 맨하탄  사이러스 벤스 주니어  지역 검사는 스톨즈 판사의 판결에 이의 있음을 제기했다.

산토스는 “legal jeopardy” 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플로리다 주 기준, 그는 현재 3건의 기소건에 걸려있으며, 2009년 불법적으로 시민권을 획득한 점과 최대 30년형을 살게 되어 있으며, 최종 판결은 2016년 4월에 열릴 예정이다. 어린 9살 소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가게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본 후, 억울한 죽음에 대한 공정한 법적 심판을 인도한 셈이다.

 

코리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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