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and Space are Inextricable- 2(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2.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로서 제논의 운동부정이론은 스승인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한 존재불변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이다. 그의 역설적 주장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이(二)분(分)의 역설’, ‘경주의 역설’ 그리고 ‘날으는 화살의 역설’ 이다. 이중에서 ‘날으는 화살’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분의 역설’을 보면 어떤 지점 A 에 도달하기 위해서 한 운동체는 우선 출발점에서 지점 A 까지 전체거리의 절반을 움직여야하고, 그 다음에는 나머지의 절반을,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을,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 이런 식으로 무한히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전체 거리를 주파한다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운동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 ‘경주의 역설’도 비슷한 논리다. 빠른 발을 가진 아킬레우스는 느린 거북이와 경주를 시작한다. 이때 거북이의 속도는 아킬레우스보다 열배 정도 느리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출발은 아킬레우스는 A지점에서, 거북이는 이보다 앞선 T 지점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제논은 아킬레우스가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T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아킬레우스가 달린 거리의 1/10 거리만큼 나아가기 때문에 거북이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항상 아킬레우스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날으는 화살의 역설’에 의하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로의 매순간 화살은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화살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화살이 그 순간 정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살은 날아가지 않고 영원히 정지해 있는 것이다.

제논은 왜 이러한 학설을 주장했을까? 그리고 그 오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제논의 오류는 운동체가 지나간 궤적을 구체 지속 속에서 체험된 운동 자체와 혼동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운동을 측정하는데 쓰이는 공간은 실상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는 분할이 불가능하다. 운동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의 진행 자체, 다시 말해서 계기적인 위치들과 그 위치들의 종합인데 제논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자가 등질적인 공간이라는 양의 집합이라면, 후자는 시간이라는 의식내부의 질의 차원인데도 평면위에서 좌표화 한것을 운동의 전부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좌표와 하는 것이 운동을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고찰하는 데는 편리할 지 모르나 운동의 본질적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은 그 본성상 연속적이지 분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운동이 보여주는 이러한 질적, 구체적 지속은 베르그송에 의해서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오성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연역논리가 시간의 부정이라는 것도 쉽게 증명되는데 그 이유는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연역해 낸다는 것은 두 명제가 동일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미래를 연역해낸다는 것은 미래와 현재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역논증에서의 논리적 동일성은 시간적 계기를 사상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결과를 원인에 환원시켜 동일시함으로써 시간적 비 가역성을 모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연역 논리가 실패한 이 문제에서 변증법적 논리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변증법은 동어 반복이 아니라 모순극복의 방법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물과 개념들을 운동과 상호작용,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변화와 생성, 그들의 발전과 쇠퇴 속에서 고려하는 이 변증법적 방법은 변화나 생성 그 자체를 법칙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상반되는 것들과의 대립 및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순과 상호대립은 비약에 의한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구체적이고도 본래적인 시간이해를 우리의 의식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음을 다른 어떠한 양식 보다도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영화에서의 심리적 시간이란 이러한 양적 시간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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