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문화의 이념

동양의 전통문화는 농경문화다. 농경이란 일정한 공간의 토지를 이용하여 계절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기후 조건에 맞추어,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재화의 생산은 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노동, 즉 그 생산과 가공의 인적 최소단위는 가정이다. 이처럼 가정으로부터 농경문화의 모든 것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인간의 전란 등을 극복하기에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기에, 농경사회에서는 노동에서 관, 혼, 상, 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들을 가정을 단위로 형성된 마을공동체 안에서 영위한다. 그리고 ‘이웃’과 ‘마을’은 주로 혈연과 친분관계로 조직되므로, 이들의 인간관계는 이해타산을 초월한 원초적 감정으로 형성된다. 전통사회에서 ‘효(孝)’와 ‘제(弟)’가 강조된 것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가 한 가정 내의 질서를 구현하는 정감행위라면, ’제‘는 공동체 안의 관계질서를 선도하는 정감행위이다.

농경은 자연질서에 따라 일정 공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농경에서 생산하는 재화는 주로 동, 식물 등을 생육하는데 쓰여지고, 그것의 생육은 천지자연의 화육(和育)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다만 그 결과를 가지고 이용후생(利用厚生)할뿐이다. 동시에 농경은 공간(토지)의 한계와 시간(계절)의 변화를 절대적인 여건으로 삼아 ‘생산(生産)과 제산(制産)의 원칙’을 강구했다. 이것이 바로 농경은 ‘생성된 재화’만을 이용하지 ‘내재되어 있는 자원’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왜냐하면 농경이라는 생성체계에 놓여 있는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이용하는 것을 곧 되돌려 주는 과정이므로 농경에 의한 자원의 생성과정은 계속될 수 있으나, 이 생성체계에 놓여 있지 않은 자원은 그 자체가 유한한 것이어서 꺼내어 쓸 경우 고갈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경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자원을 채굴하여 쓰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원의 이식을 최대한으로 취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천지의 화육생성작용을 돕는 일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생성체계에 속해 있는 땅은 최대한 개간하여 농경지를 넓히고(地盡其利), 개간된 땅에 알맞는 곡식을 적절한 시기에 뿌리고 가꿈으로써 가급적 많은 수확을 확보하여 그것을 가급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요긴하게 쓴다(物盡其用).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물건을 아껴 쓰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줄이지 못하면 한정된 물질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욕망충족은 욕망의 자가발전이라는 족쇄에 걸려들어 결국은 더 많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한한 물질은 고갈되고 사회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설계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생활관이다. 같은 물량이라도 그것을 아껴쓰면 오래 가고, 같은 재화라도 아껴서 잘 이용하면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이것이 ‘절용애물(節用愛物)’의 정신이다. ‘수분지족’과 ‘절용애물’은 물질 쪽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속한 ‘도덕’의 문제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정덕(正德)’이라고 했다. 이처럼 유한을 극복하고 ‘안빈락도(安賞樂道)’를 추구한 것이 농경문화의 슬기이다. 따라서 농경문화는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들과 화합(順天應人)하는 순리와 평화의 삶이며, 인간관계의 질서가 ‘정감’ 위주로 유지되고 해결되는 삶이다.

한편 서양의 문화 이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παιδεία; (영어) paideia;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교육, 학습”; “일반교양 교육” 이란 의미의 철학과 인식을 바탕에 둔 문화 이념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식과 행위의 규범을 인위성 또는 자의성에서 찾지 않고 퓌시스(Physis), 즉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고자 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역시 퓌시스에 의해 주어진 것을 퓌시스에 알맞게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활동이 된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의해 파괴된 퓌시스와 노모스(Nomos)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파이데이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면서 퓌시스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탁월한 품성과 자질, 즉 ‘아레테’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길, 즉 파이데이아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파이데이아, 특히 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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