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trolls in Culture ~ How to Read Cinema? 영화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과 접근법 7< 이강화 교수>

Movie : A Good Year

<Daegu, Prof. Lee, GangWha>

5. 영화에서 문학으로

1960년대 텔레비전 시대 작가들은 구텐베르크식의 활자 문화를 무력화시키는 영상매체의 막강한 위력 앞에서 소설의 위기와 죽음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책장을 넘기는 대신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켰고 허구를 읽는 대신 사실을 보는 편을 택했다. 일관성과 연속성, 그리고 인과성과 단성성에 의존해오던 활자문화는 이제 복합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찰나성과 다성성을 특징으로 하는 영상매체와 불안한 심정으로 경쟁해야만 했다. 마샬 맥루헌의 말처럼, 문어적인 활자문화는 이제 구어적이고 시각적이며 청각적인 영상문화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맥루언이 예언했던 것과는 달리, 활자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점에 나가보면, 사라지기는커녕 하루에도 백여 권의 신간서적들이 쏟아져 나와 진열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런데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여전히 불황이고, 순수문학 작품들은 더더욱 팔리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책을 읽을 시간에 사람들은 이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한다. 그리고 예전에 소설을 읽으며 웃고 울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스크린을 보며 웃고 운다. 영상매체는 마치 예전에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가상의 리얼리티를 창조해 제시하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실제 현실로 착각한다. 그러므로 소설은 이제 살아 남기 위해서 강력한 라이벌인 영상매체와 경쟁하거나 그것과 제휴해야만 하게끔 되었다. 영상시대에 문학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과감히 스크린과 제휴해야 한다고 처음 주장했던 사람은 미국의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였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초에, 문학이 영상매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답적이고 귀족적인 스스로의 패각에서 벗어나, 영상매체가 갖고 있는 대중 문화적 요소들을 적극 수용해야만 된다고 제안했다. 그는 물론 영화의 상업주의적 속성과 대량복제로 인한 문제점들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소설 역시 대량복제에 의한 상업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은 원래 귀족들을 위한 장르였던 시나 희곡(비극)과는 달리 대중을 상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들처럼 스스로를 귀족화, 고급화하는 것은 독자의 상실로 인한 소설 장르의 자멸을 초래하게 된다. 30여 년 후의 상황을 정확히 예시했던 피들러의 통찰력은 오늘날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과연 지금 소설은 날마다 엄청난 숫자의 독자들을 영상매체에 빼앗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서점에 가는 대신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마치 책처럼 서가에 꽂혀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고르며 주말저녁에도 책을 펴는 대신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고 <주말의 명화>를 본다. 출판인들 역시 영상세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요즘에는 시각디자인과 표지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제 우리가 본격적인 <영상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시나리오와 아주 홉사한 소위 <영상소설>들도 출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마이클 크라이튼의 <주라기 공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한 편의 영화대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특이한 소설이다. 특히 전체 구성과 장면 전환, 그리고 <카메라의 눈> 기법과 스케치식의 간결한 문체는 이 작품이 원래부터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데도, 그 소설이 영화화될 때, 크라이튼은 데이비드 코프와 더불어 <주라기 공원>의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물론 그 영화 대본은 원작보다 훨씬 더 못했으며, 영화 역시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룡을 제외하고는 별로 괄목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한 가지 교훈, 즉 그 어떤 영상소설도 바로 영화대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을 바꾸면, 제아무리 영화대본처럼 보이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소설과 시나리오는 엄연히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라기 공원>은 영화를 의식하고 씌어졌다기보다는 영상매체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을 겨냥하고 씌어진 소설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작가들 가운데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할리우드식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뉴욕주립대의 마크 셰크너 교수는 요즘에는 영화화될 것을 미리 의식하고 쓴 소설, 또는 아예 영화용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튜디오 소설>도 산출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을 든다. 그는 그 소설의 “공허하고도 스케치적인 언어는 마치 그 공백을 영화제작자가 채워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셰크너 교수는 오늘날 영화와 문학의 관계는 상호보족척이며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만일 우리가 문학양식에 끼치는 시장의 힘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영화가 소설의 가장 강력한 시장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리우드는 소설의 보물섬이다.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영화는 소설의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자이다. 더 나아가 나는 현대 미국소설의 건강은 전적으로 영화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소설은 적어도 부차적 판권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충분한 소설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10년 동안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작가들을 나열하면 그야말로 문인사전이 될 것이다. – 윌리엄 스타이론, 앤 비티, 월리엄 케네디, 로버트 스톤, 아이작 베셰비스 싱거, 매헐린 로빈슨, 제이 맥키너니, 앤 타일러, 존 어빙 등 영화는 새로운 촉진제가 되었고, 작가들에게 금항아리가 되었으며, 그 매개체 사이의 공식적이고 상업적인 교류는 두 장르 모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문학과 영화는 앞으로 더욱더 긴밀하고 활발한 관계를 갖게 되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의 영화화나 작가들의 영화제작 관여는 194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예컨대 리처드 라이트(<미국의 아들>), 노먼 메일러(<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트루먼 캐포티(<냉혈>),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 버나드 밸러머드(<내추럴>), 필립 로스(<컬럼버스여 안녕>), 커트 보네것(<제5도살장>), 저지 코진스키(<정원사 챈스의 외출>), 존 바스(<여로의 끝>), 앨리스 워커(<칼라 퍼플>), E. L. 닥터로(<래그타임>) 등이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문학작품들 역시 끊임없이 영화로 만들어져 왔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살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토머스 하디의 <테스> 같은 작품들은 벌써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으며, 최근에는 멜 깁슨과 글렌 클로스 주연의 <햄릿>(셰익스피어)과 제라르 드파르듀 주연의 <제르미날>(에밀 졸라), 마틴 쉰 주연의 <삼총사>(알렉상드르 뒤마), 대니얼 데이 루이스 주연의 <라스트 모히칸>(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또는 데미 무어 주연의 <주홍글자>(나사니엘 호손) 같은 문학작품들이 다시 만들어졌거나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원작의 격조를 망쳐놓은 실패한 영화들도 있다. 피들러는 그 대표적인 예로 허만 멜빌의 <모비 딕>과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든다. 예를 들어 <모비 딕>은 주로 어떤 배우들, 예컨대 에이허브의 역을 맡고 싶어했던 존 베리모어와 그레고리 펙 같은 배우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자주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에이허브가 추구한 지적 동기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데다가 감독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에이허브를 그만 미친 사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레고리 펙의 경우에는 (그는 차라리 고래 역을 맡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고 당시의 평론가들은 빈정대었다) 미친 에이브러햄 링컨을 만들었으며, 베리모어의 경우에는 미친 베리모어를 만들었다. 사무엘 골드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가장 최근의 파괴자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이 작품에 진실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론에 입각해서인지 미시시피 강변 장면을 새크라멘토 강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섹스는 당혹스럽지만 로맨스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톰 소여를 여자로 설정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허크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그 영화는 차라리 그랬더라면 재미라도 있었을 테니까.

영화가 원작을 왜곡하고 훼손한 경우는 포크너와 헤밍웨이의 경우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포크너의 <성단>은 그 역을 맡은 이브 몽땅같은 유명배우의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악한을 다분히 풍자적이고 동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헤밍웨이가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일어나 나가버렸다는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작품의 마지막에 죽어야만 되는 주인공이 버젓이 구출되어서 살아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원작보다 더 잘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원작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들도 많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지 스티븐스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는 거칠고 직선적인 문체로 씌어진 시어도르 드라이저의 소설 <미국의 비극>을 원작보다 훨씬 더 감미롭고 세련된 작품으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또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경우에도 영화가 원작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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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trolls in Culture ~ How to Read Cinema? 영화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과 접근법 6 < 이강화 교수>

 

(위의 영화들은 모두 문학작품을 영화한 것들이다.)

<Daegu, Prof. Lee, GangWha>

4. 제 3의 문학으로서의 영상문학

이처럼 오늘날 영화는 문학 텍스트의 확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앞에서 이러한 차원에서 새로운 장르로서의 영상문학에 대한 탐구는 지극히 당연하다. 우선 영상문학의 개념을 푸는 실마리로서 시나리오를 보자. 시나리오는 우리말로 영화 각본으로 번역된다. 시나리오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의 종류는 영화 제작만을 위해 쓰여지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기존의 작품, 즉 소설, 희곡, 신문기사 등을 시나리오화하는 각색으로 분류된다. 어떻게 분류되던 각색 혹은 시나리오는 서술을 위한 구조나 형태를 창조할 수 있도록 어떤 것을 변경하거나 적절하게 짜맞추는 가능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나리오는 영상화를 위한 문학장르이니 당연히 영상문학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 동안 시나리오를 보고 영상문학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화가 통속적이고 저급한 대중문화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고, 이러한 보수적 사고의 영향으로 문학이론가들은 영화에 관한 것을 문학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이런 풍토에서 영상문학이란 말이 학술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영화는 문학이 아닌 제7의 예술로 불리어졌다. 대신 영상소설, 영상시, 영상문학이라는 말은 출판계나 영화계에서 상업적 차원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한편, 서울대 김성곤 교수는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 다시 말해 시나리오와 흡사한 소설을 영상소설로 보았다. 즉 스튜디오 소설의 우리말 번역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나 영상소설이 영상문학에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대에 구비문학이 있듯이, 현대에 영상문학이 있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이 구비문학이라면 그것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 활자문학이라면 그것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 영상문학이다. 제1의 문학이 구비문학이고 제2의 문학이 활자문학이라면, 제3의 문학이 영상문학이다. 이 3자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조신의 설화이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꿈에 대한 설화이다. 이 설화를 토대로 춘원은 중편 <꿈>을 썻고, 이 소설은 세 번이나 – 신상옥이 두 번, 배창호가 한 번 – 영화화되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신라인들은 설화로, 현대인들은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다시 영화로 보고 들었다.

이처럼 영상문학은 영화를 문학 텍스트의 확장으로 보고, 이 양자의 상관관계를 탐색하는 학문이다. 즉 문학과 영화가 손을 잡아야 서로 발전한다는 전제 아래, 문학의 논리성과 영화의 구체성을 결합시키려는 학문이다. 영상문학은 문학이란 의미가 그러하듯이 작품을 뜻하는 의미와 그것을 연구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즉 소설이 영화화된 작품으로 영상화를 위한 문학(시나리오)이나 영상효과를 극대화한 문학을 뜻하며, 또 소설이 영화로 전환되는 과정과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영상문학 연구의 핵심은 소설과 영화의 상호 텍스트성 규명에 있다.영상문학은 문학적 성격과 영화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좁은 의미로 본다면 문학작품이 영화화된 것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문자모드가 영상모드로 바뀌는 과정과 그 결과물(영상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효과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제작 기술과 상업적 흥행성에 관한 언급을 배제하며, 순수 학문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영화평론과 영상문학는 구별된다. 영상문학은 영화의 문학적 성격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문학이 영상매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학문이다.

영상매체는 문자매체보다 장점이 많다. 영상을 매개로 전달되기 때문에 신속 정확하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만큼 전달력이 강하고 영향력이 크다. 물론 영상은 활자보다 장점이 많지만 단점도 있다. 문자보다 순간적이고, 비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영상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영상문학은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영상문학은 문학의 성격과 영화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협의의 개념으로 본다면 영화의 하위장르요, 광의의 개념으로 본다면 영화의문학적 연구를 의미한다. 즉 활자문학이 첨단과학의 힘을 빌어 새롭게 태어난 문학이다.

동시에 영상문학은 열린 문학이며 사회 지향적이다. 영상문학은 관람을 위한 문학이다. 그만큼 관람의 성격을 잘 살려야 한다. 관람의 특성은 독서와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독서는 혼자하는 행위이고 관람은 여럿이 함께 하는 행위이다. 독서는 타인과 차단된 공간(방)에서 이루어지고 관람은 타인과 열린 공간(상영관)에서 이루어진다. 영상은 활자와 달리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광장의 문학이다. 이는 영상문학이 열린 문학이며 사회 지향적이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는 또 영상 문학이 문학 텍스트의 확장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시대적 의미가 얼마나 큰가를 잘 말해준다. 활자문학에 비해 영상문학은 그 만큼 사회 지향적인 열린 문학이다. 추상보다 구상을 ,관념보다 사실을, 논리보다 감각을, 설명보다 묘사를 고백보다 행동을, 밀실보다 광장을 중요시하는 문학이다.

소설의 영상화는 독자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 작품이 흥행에도 성공한다면 사회적 의미는 더욱 크다. 앞으로 소설의 가치는 영상화에 달렸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영상화되어 소비될 때 문학적 가치는 더욱 극대화되고 또 사회에 대한 영향도 커지며, 그 존재 의미도 확대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상문학은 한 작품의 문학적 가치와 영화적 가치를 동시에 확대시키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영화한 것을 보고 마치 한편의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영화화했을 때 장르상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두 작품은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소설이 영화로 각색될 경우 소설가의 뜻과 각색자의 뜻이 일치되지 않을 수 있다. 인생관이나 예술관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작품이 영화화되기 위해서 거치는 시나리오과정 때문이라 할 것이다. 시나리오는 활자매체인 문학작품을 영상화하기 위한 준비단계다. 문학작품을 시나리오화하는 것을 흔히 각색이라 한다. 각색은 크게 문학작품에 충실한 것과 문학작품과 유사한 것 그리고 변형한 것이 있다. 문학작품은 각색의 과정을 거치면서 문학성보다는 영상미를 부각시키는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문학작품과 영화는 매체 자체의 특성에 따라 표현되는 양상이 대부분 다르다. 이러한 장르상의 차이 때문에 문학작품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된다. 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의 시각이 첨가되기도 한다. 여기에 감독의 존재는 더욱 중요하다. 영화는 전적으로 감독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텍스트가 소설에서 시나리오로 바뀌고 다시 영화로 제작되어 궁극적으로 대중에게 소비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그 의미와 효과를 밝히는 것이 영상문학 연구의 핵심이다. 앞으로 소설의 영상적 수용양상을 연구하는 작업은 소설 연구의 중심과제가 되어야한다. 그것이 영상시대의 문학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영화화되면서 또 한번의 변화를 겪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상매체인 영화로 다시 태어난다.

특히, 소설을 각색할 때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그 특징에 따라 다르게 변화된다. 문학작품의 서사성을 대표하는 소설은 작품의 구조와 길이로 크게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로 나눌 수 있다. 단편소설은 하나의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이야기 구조를 지닌다.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에 시나리오 작가는 제2의 플롯을 도입하고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거나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다. 그들은 작품을 대중에게 다가가기 쉽도록 변형시킨다.

동시에 소설가는 수많은 개인을 위해 글을 쓰는 반면 시나리오 작가는 대중적인 관객을 위해 글을 쓴다. 영화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인물의 성격을 뚜렷하게 하거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거나 플롯을 진전시켜야 한다. 소설상의 대화는 길고 산만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짧고 강렬한 것이어야 한다. 영화의 형태가 극적인 반면 소설의 형태는 대화적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은 소재의 세심한 선택과 기술적인 극적 배열을 필요로 한다. 단편소설을 각색할 때는 원래의 이야기를 확대해야 하고 장편소설은 압축하고 극화해야한다. 시나리오는 극의 재미를 위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이어지면서 각 단락의 후반부에 중심되는 사건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미를 잃지 않게 된다. 단편소설의 각색인 경우는 없는 사건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장편소설은 작품의 긴 내용을 전부 영화화할 수는 없다.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재배열하거나 축소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학작품은 또 다른 작품으로 재창조된다.

활자매체인 문학작품은 각색되면서 영상매체에 적합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내면심리를 다룬 소설은 그러한 내면을 표면화시킬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여러 등장인물과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진 장편소설은 각색하는 방향에 따라 주요 인물에 초점을 맞추거나 사건을 축소한다. 문학작품은 이러한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각색의 과정을 문학작품의 1차적 재창조라 한다면, 영화화되는 과정에서는 2 차적 재창조를 겪기도 한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은 시나리오가 아니라 영화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상미률 살려 영화를 만든다. 이때 시나리오는 감독의 관점에 따라 다시 한번 변화된다. 감독은 작품에 시대적 상황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흥미를 가미하기 위해 극적인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나리오에는 없는 인물을 창조하기도 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물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의 관점에 따라 인물이나 사건이 재배치된다.

동시에 문학작품은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로서 다양한 시각들과 생각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특성으로 문학작품을 각색할 경우, 작품을 이해하는 다양한 가능성들 중에 하나의 면을 강조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각색도 또 다른 창작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진행되지만 감독의 관점이 강조된다. 그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회성, 오락성을 생각한다. 영화는 이런 점 때문에 사회성이 부각되기도 하고 흥미를 이끌기 위해 보다 극적인 사랑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것이 문학작품이 변모하는 또 한 번의 과정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문학작품과 영화를 인식할 때 그들 각각의 특성을 살필 수 있다. 영화는 문학작품에서 소재를 얻고, 문학작품은 영화를 통해서 또 다른 작품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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