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n Lee-Sang’s World of Music: View, Smell, and Sound of the Korean Peninsula Composed into Music – Thoughts

<Japan : Prof. Lee,Sunhoon>

윤이상 (尹伊桑, Isang Yun, 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3일) 은 일제 식민시대에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군 충무면에서 짧은 유년기를 보낸 후, 통영면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현대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로서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본관은 칠원이며, 동백림사건 이후에는 서독에 귀화하여, 한국 땅을 밟지 못하였지만, 북한은 여러 번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살부터 3년간은 한학을 배우기 위해 서당에 다녔고, 8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3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고 직접 선율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마을 영화관에서 자작의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들으며 작곡가가 되기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음악가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한 윤이상 작곡가의 아버지로 인해,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2년후에 경성에서 군악대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부터 화성법을 배웠으며, 도서관의 악보를 보고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상업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1935년에 일본 오오사카시의 상업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오오사카음악학원에서 첼로, 작곡, 음악원리를 배웠습니다. 1937년에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최초의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썼습니다. 1939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동경의 이께우치 도모지로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고,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돌아와 있다가, 1944년에 항일독립운동으로 2개월간 투옥되었고,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1945년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 김춘수, 정윤주 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윤이상 본인은 음악부문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통영고등학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으며, 고려대학교의 교가도 그의 작품입니다. 그는 음악활동 이외에도,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1948년에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습니다. 이듬해 1950년 1월 30일에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를 하고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고, 같은 해 8월에 첫딸 정이 태어났습니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습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가 서울에서 ‘한국작곡가협회’로 새로 결성되며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같은 해에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저술했고, 1956년 4월 [현악4중주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1956년에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유학하던 중에, 20세기 전반으로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현대음악계를 견인했던 작곡가인 올리비에 메시앙 (Olivier-Eugène-Prosper-Charles Messiaen)을 만나게 되어, “프랑스는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서독 쪽의 환경이 좋은 편이니, 다름슈타트 강습회에 참가하면 좋을 것이다” 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서독으로 옮겨 1957년에 베를린예술대학에 입학하였고 당시에 윤이상의 나이는 이미 40세에 달해 있었습니다.

서독에서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음악학자인 요세프 루퍼로부터 십이음기법을 엄격히 전수받았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작품목록으로부터 위에서 소개한 동요집과 같은 종류의 작품들을 모두 삭제하고, 대학입학 후의 작품만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윤이상의 유럽 데뷔작으로는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 ‘현악4중주곡 제3번’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은 프란시스 트래비스(Francis Travis)의 지휘로 레코드로서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프란시스 트래비스는 이후에도 윤이상의 음악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윤이상은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것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에는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하였고, 1965년에 초연한 불교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약’은 그를 국제적인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4년 4월 처음으로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고, 김일성과도 친교를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한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수차례 방북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방북행적을 포착하여 내사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동백림사건입니다.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중앙정보부를 이용하여 행해진 대표적인 간첩조작사건으로 발전되었습니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서울로 끌려와서, 당시의 유럽에 있던 유학생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간첩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후에 이골 스트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이 주도한 한국정부에 대한 윤이상의 청원운동에는 루이지 다라피코라, 한스 베르나 헨쩨, 하인쯔 호리가, 마우리시오 가겔, 요세프 카일베르트, 오토 크렌페라, 리게티 제르쥬, 아르네 메르네스, 페아 노아고, 칼하이즈 슈토크하우젠 등 약 200명의 예술가가 서명했습니다. 1967년 12월 13일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재심에서 감형되었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특사로 석방되었습니다.

구속기간 중이던 1969년 자살을 시도했었고, 이를 계기로 음악작업이 허용되어,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으며,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서 서독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 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의 커다란 호평을 받았습니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도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1969년에 서독으로 추방되었으며, 한국국내에서는 윤이상의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었습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는 하노버음악대학에서 재직하였고, 1971년에 서독에 귀화했습니다. 이 후에, 조국통일범민주연합의 유럽본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다음 해인 1981년에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했습니다. 작품활동을 계속하며, 틈틈이 북한을 방문하였고, 1982년부터는 매년 북한에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되었고,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고,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에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윤이상의 음악세계는 ‘’상처받은 용’ 등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국의 민속음악에 기초하였고,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의 최첨단 작곡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윤이상이 고안하여 도입한 주요음 기법과 주요음향 기법은 12개의 음의 어디엔가에 중력을 주어서, 하나의 선율선에 개성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윤이상의 음악은 1970년대에 전위예술이 정체기에 접어들며, 선율의 회복이 강렬하게 요구되면서, 당대의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예술대학교수로서 재직하였고, 작곡과 교수로서 호소까와 도시오 (細川俊夫), 시마쯔 타께히또 (嶋津武仁), 후루카와 키요시 (古河聖), 미와 마사히로 (三輪眞弘), 타데우유 뷔에레쯔키, 베른프리트 G 쁘레붸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 아시안인의 작곡교수로서 유럽에서 제자가 있었던 것은 독일전체에서는 윤이상이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인 제자로서는 강석희가 알려져 있습니다.
말년에는, 쁘폰짜임, 슈트트가르트, 브레멘 등에서 작곡강습회를 열었고, 제자들의 요청으로 제자들의 제자의 육성에도 열의를 다했습니다. 쁘폰짜임 강습회에서는 이규본이 참가했으며, 이규본은 수년후에 일본의 최고권위의 작곡상인 이리노 상 (入野賞)를 수상하기도 합니다.

1994년 동경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의 중단을 발표했고, 같은 해 9월에 서울, 부산, 광주 등에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되었습니다. 윤이상은 참가하려 하였으나 건강의 악화로 입원하게 되었고, 당시에 그의 소지품에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레코드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95년에는 최후의 오케스트라작품 ‘화염에 휩싸인 천사(1994)’가 동경에서 연주되었지만, 이미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연주회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1995년 11월 3일 4시 20분 독일 베를린의 병원에서 폐렴으로 서거하였습니다.

출판작품은 모든 곡이 Bote & Bock로부터 발매되었고, 독일에 체류했던 기간의 모든 윤이상의 작품은 출판발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에, Bote & Bock가 파산하여 Boosey & Hawkes에 흡수합병되었고, 이와 동시에 저작권사용료 등도 급등했다는 것이 음악계의 소식입니다. 일본에서는 생전에 비해서는 최근의 북한문제와 혐한분위기의 영향으로 2010년 이후에는 윤이상의 오케스트라 작품이 정기연주회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든 실정입니다.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나고야의 아이찌 에술문화센터에는, 윤이상의 출판악보의 상당수가 소장되어 있으며, 전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인도 열람은 가능한 상태입니다.

필자는 음악전문가도 아니며, 삶에 있어서도 위대하고도 처절했던 윤이상을 평가하거나 추론할 수 있는 자격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40세에 이르러 독일 땅을 밟고, 그 이후에 40여년을 이국땅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고국 땅에서 느꼈었던 모습, 냄새, 소리를 모두 음악에 담아 스스로를 찾고, 또 그것을 세계인들에게 알리려 했던 윤이상의 모든 일들은 분단된 한반도의 아픔인 동시에 소중한 자산이라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자는 한국인들이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에서 만들어졌던 모든 사상적인 갈등을 초월하여 윤이상의 음악세계로 표현된 한반도의 도도한 기상과 아울러 어제와 오늘의 모습 그리고 이를 기본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자부심과 희망을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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