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9<은우근 교수>

<Gwangju : Prof. Woogeun Eun>

부끄러움, 그리고 그 후,

김성룡 신부는 1985년 5월 18일 신학생들에게 행한 강론을 “그때 살아남은 부끄러움 때문에 죄인의 심정으로…(윤공희 외 김성룡 지음, “사막의 체험 “중에서)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5월민중의 항쟁이 무참하게 진압되던 5월 27일 새벽 가두방송의 애절한 호소를 듣고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5월민중은 함께 간진한 죄책감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5월민중은 배움의 길고 짧음,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의 부끄러움을 고백했을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죽어간 자들과 그리고 그것을 함께 간직한 다른 살아 있는 자들과 서로 연결되었다. 서로의 죄책감을 확인 함으로써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되었고, 죄책감을 긍지로 전환시킬 연대를 형성했다.

가공할 국가 폭력의 공포와 그것을 이기려는 투쟁안에서 5월민중의 역사의식이 부끄러움으로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공유된 부채의식과 죄책감은 민중을 역사 앞에서 깨어 있게 만들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조차도 함께 가질 때 역사를 밀고 나갈 힘이 된다. 부끄러움의 힘은 인간을 변화 시키므로써 역사도 변하게 만들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동력은 바로 5.18에서 비롯한 이런 역사 의식이었다. 교회와 민중이 행한 시대별 실천의 여러 사례가 그 점을 보여준다.

“외롭게 , 외롭게” 진행된 5월민중의 항쟁은 패배했지만 1980년 6월 한신대 류동운 (1961-1980)의 추모식 시위를 시작으로 대학가에서 용기있는 저항들이 다시 나타났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 사이 민주화 운동의 개별 사건에서 발표된 수많은 성명에서 5월민중항쟁은 죄책감과 때로는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비장한 다짐의 표현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1980년 5월 30일 서강대학생 김의기는 5월 학살 만행을 규탄하고 봉기를 호소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뿌리다 추락하여 사망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에서 :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5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가 : 1985, 김의기열사추모사업회 편) 김의기의 죽음과 관련한 하종강은 다음과 같이

“‘동포에게 드리는 글’ 에서 그는 …광주에서는 수백명의 시민이 죽고 있는데, 동포라는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억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나는 원미동 골목의 석유가게에 잘 숨어 있었다. …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울었다. … 그것이 80년대 십 년동안 나의 가슴속에 살아있던 화두였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부채감이 80년대 10년 세월동안 나를 비롯한 많은 운동권 학생들을 가위눌리게 했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붙들려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가면서도 학생운동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던 최소값은 그 부채감이었다. … 인간이라면 그 부채감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고백한다.

1981년 5월 27일에는 서울대학생 김태훈이 “내 작은 몸뚱이를 불싸질러 광주시민들과 학생들의 외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도서관 5층에서 투신했다.

1983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5.18 영령을 추모하면서 ‘죄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 가신 님 앞에선 모두 죄인인 우리들은 오늘 명복을 비는 추념의 자리를 빌어서…그날의 사태를 유발한 장본인들에게 속죄를 촉구하며,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라야 명복을 빌 수도 있고, 추모의 기도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위대한 광주의 정든 거리를 지키고자 싸우다 가신 꽃다운 혼들이시여!지금 우리는 부끄럽게 살아남아… 이 자리에 모여 고개숙여 추모의 미사나마 올리고 있습니다. …광주는… 세계의 것이며, 인류의 것이며, 양심과 정의의 본령이며, 위대한 민족의 성지임을 자부합니다.. … 이 미사나마 겨우 갖게 됨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며…(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광주의거 3주기에 부쳐:영원히 살아있는 혼들에게” 중에서)

또 1984년 김근태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5월의 참담했던 패배는 그 이전까지 우리가 쌓아 올렸던 역량의 한계를 일깨워 줌과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 보다 넓은 지평을 열어 주는 계기… ” 이며 “광주는 죽지 않았다. … 우리는 80년 5월의 불꽃 속에서 투혼을 안고 태어난 광주의 아들딸들이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처럼 5월민중의 영웅적 투쟁은 80년대 사회운동에서 도덕적 반성 기제의 핵심요소였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5월민중에게 빚졌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년 5월 수만 명이 광주를 찾았으며, 전국에서 매년 수십만 명이 5월민중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투쟁했다. 민주화 운동은 한층 치열해졌고, 과감해졌다. 5.18은 87년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밑불이자 거름으로 작용했다.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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