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5<은우근 교수>

(사진은 전 광주 도청앞 분수대 에서 촛불 시위하는 시민들: 5.18광주 민중항쟁때는 그 곳에 전남도청이 있었다. 현재는 무안으로 이사가 있다. 그때도 그곳에서 촛불 시위를 했다.

<Gwangju : Prof. Woogeun Eun>

3) 부끄러움과 무력감으로 고뇌하던 사제들, 시위를 기도하다(5월 21일)

21일 아침 도시 외곽에서 골목별, 동네별로 시민군에 대한 지원이 활성화되면서, 시위는 광주 전역에서 전 민중이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이 날 오전, 광주 지역 본당 사제들 대부분이 호남동 성당에 모였다. (당시 광주시에 소속된 성당은 모두 12곳이었고 사제는 시내 본당 7명, 교구청 근무 2명이었다. 따라서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사제수는 9명이었다. 여기에는 1명의 외국인 사제가 포함된다.). ‘신도들이 사제들을 책망’했다. “이런 곤란한 시기에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민중의 지도자로서 신부들이 앞장서줘야 하지 않느냐. 한시라도 빨리 대주교님을 모시고 플랑카드를 선두오 수습에 나서야 [한다]” 고 요구했다. 김성룡 신부는 당시의 심정을 “부끄러운 일이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 너무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나 자신을 돌아다 본다. ” 고 (“분노보다는 슬픔이” 저항과 명상)표현했다.

마침내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떨치지 못하고 고뇌하던 사제들은 평화로운 수습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의했다. 윤공희 대주교의 재가도 받았을 뿐 아니라, 윤 대주교 자신도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학운동의 숙소에서 호남동 성당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인정할 것과 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분노한 민중과 공수부대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자임했지만 실상의 시위를 기도한 셈이다. 이 시위는 계엄군에 의한 헬기에서의 기총소사와 도청 앞 공개 발포로 무산되고 말았다. 신군부의 듸도대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될 상황이 임박한 만큼 이를 무산시키려고 발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중재자로서 교회의 최초 시도는 계엄군이 거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4)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다 : 계엄군의 공개 발포와 무장 (5월 21일)

한편 사실상 사제들의 시위 기도가 좌절된 시점인 오후 1시경, 계엄군은 금남로 도청앞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발포했다. 5월 민중은 군용 장갑차, 무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30만 명의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치선에서 민중은 계엄군과 백병전과 다름없는 시가전을 벌였다. ” 고래가 [정어리 떼를] 사냥하듯이 ” 시체 또는 부상자들을 끌고 골목으로 흩어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모여들고 다시 총격이 가해지면 또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었다. 시민들은 ” 총! 총! 총을 외쳤다.”.

다음 한 시민군 이세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지금 군인들 상대로 하고있는 일 [총으로 군대에 대항하는것]이 잘한 일인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호응하는 모습을 보며 그 [꺼리는 ] 마음이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계엄군의 끔찍한 폭력을 겪으며 형성된 ‘국가가 우리에게 이래도 되는거야?’ 라는 의문은 무장을 계기로 ‘우리가 국가에 대해 이래도 되는 거야?’ 라는 의문으로 전환되었다. 이 증언은 시민들의 인정을 통해 무장에 대한 의문이 확신과 긍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5월민중은 투쟁을 통해 공포와 자기 모멸감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5월민중은 목숨을 바치는 결단을 통해 이룩한 공동체를 자기 자신으로 체험했다. 자기중심적으로 타자화된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민중은 국가 폭력이 강요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전면적 투신. 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하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극복하는성스러운노동과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한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성스러운 노동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해방과 평등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제 민중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느낀 자기모멸감과 부끄러움은 목숨을 건 투쟁 과정에서 이룬 공동체적 환희의 체험을 통해 긍지로 전환되었다.

5월 22일 : 공수부대가 물러간 ‘해방 광주’에서 시민 자치가 구현되었다.

5월 24일: 사제들이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도청 수습대책위에 전격적으로 참여했다. 남동성당에서 사제들과 모여온 재야 인사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5) 사제들이 무기회수와 시민군 무기로 사수에 참여하다(5월21일-26일)

계엄군과 협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무기 회수가 이루어졌다. 조철현 신부와 남재의 신부가 직접 무기 회수에 참여햤다. 5월 25일 : 사제들이 TNT를 사수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도청 지하에 있는 TNT 를 포함한 시민군의 무기고를 지키기위해 김성용 신부가 남동 성당에서 2명, 조철현 신부가 계림동 성당에서 1명을 모집하여 모두 3명의 청년을 도청 무기고에 배치했다.

6) 사제들, ‘죽음의 행진’을 결행하다. (5월 26일 낮)

5월 26일 오전: 새벽 상무대에서 탱크가 농성광장으로 진격 중이라는 급전을 수신하면서 도청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함께 밤을 새웠던 수습위원들은 극도로 당황했다. 김성용 신부가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죽음의 행진”을 제안하고 수습대책위원 17명 전원 찬동했다.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이 앞장을 섰고 수백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다. 진격한 탱크가 도로를 차단 중인 농촌진흥원 앞에는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아침 9시였다. 김성용 신부는 ‘총 맞아 죽을 각오로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5월 26일 오후 : 마지막 협상이 실패했다. 이 협상의 결렬로 중재노력은 파국을 맞았다. 계엄군을 설득하러 갔던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은 되돌아와 무기회수를 위해 시민군을 설득하러 나서게 되었다. 계엄군은 처음부터 사제들이 포함된 수습위원의 중재 노력을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끌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과 시민군을 분리시키는 한편, 시민군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시민군 내부의 분열과 이탈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즈 심재훈 기자의 말처럼 “광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바다에 외로이 떠있는 고도” 였다.

목숨바쳐 이룬 생명공동체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5월민중은 무장과 최후의 결전을 선택하면서 다시 분열을 경험했다. 무장을 계기로 총기를 나누고 그 사용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돌연 그 곳에서 계급 (class)을 보았다. 무장한 민중은 대부분 항쟁 이전에 이 도시에서 언제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무장이 시작되자 이전에 이 도시의 주인이라 느꼈던 계급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 분열의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심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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