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Park Cheong-Hee and the Incarceration of Park Geun-Hye <이선훈 박사가 본 한국 독재자의 길>

<Japan : Prof. Lee, Sunhoon>

박근혜의 구속과 아버지 군사독재자 박정희 인생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의 6명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박정희가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하며, 당시 직책은 중앙정보부 부장이었고, 지금의 국가정보원 원장에 해당하지만, 군사독재자 박정희 정권에서는 권력 2인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1974년 육영수의 사망 후부터 대통령 경호실장이었고,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이며 정권의 실세권력자로서 행세했습니다.

김계원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지만 권력의 중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군인, 정치가, 외교관,기업가 출신입니다.

심수봉은 당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인기여가수입니다.

신재순은 모델이라고는 하나 이화여자대학에 재학 중으로 박정희의 접대부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진 10.26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10.26사태로 18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왔던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정권의 2인자로 알고 있던 중앙정부부장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에 놀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대통령이란 사람이 청와대 내에 중앙정보부가 관할하는 안가라는 장소가 있어 자신만이 유흥을 즐기는 시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딸과 같은 연배의 여대생 접대부와 인기여가수의 접대를 받으며,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숨겨진 부도덕성에 놀라움을 감추지 하였습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시바스리갈이라는 양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국민도 적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부도덕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한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시절에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1968년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 4학년때인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공표되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제목인 국민교육헌장으로부터 마지막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까지 암기할 것이 의무화 되었으며, 암기를 하지 못한 학생은 방과 후에도 학교에 남아 암기해야 했으며, 등교 시에도 암기를 확인 받곤 했습니다.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은 일본의 군국주의시대인 메이지왕이 만들어 공표한 ‘교육칙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1969년 국민학교 5학년때에는 주변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과 고려대학교 대학생들의 데모가 격화 되어지며, 대학생들이 교실로 들어와 책상 사이에 엎드려 몸을 숨기곤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저희들에게 당황하지 말고 칠판과 자신의 얼굴만을 집중하라고 말했지만, 복도의 창가에는 몇 회에 걸쳐서 사람들이 교실 안을 들여다 보며 지나갔으며, 우리들은 쉬는 시간에도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담임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담임선생님의 신변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6학년때까지 지도를 받았다는 것은 저의 반의 학생들은 아무도 발설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1969년은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5.16군사쿠테타 당시의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2기의 대통령임기를 마치고, 3기에도 출마하기 위해 3선을 허용하는 헌법개정을 시도하던 시기로서 제가 다니던 동대문구 제기동의 종암국민학교 주변의 제기동과 안암동 주변은 온통 대학생의 데모로 골목골목에 전투경찰이 대기하고 있었고, 진압에 사용된 최루탄에 의해서 안방에 있던 사람들 마저도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으로 기억합니다만, 시골에서 서울나들이 온 친척들과 일요일에 경복궁을 가던 중에, 광화문에서 사진촬영을 하다가 사진기를 빼앗기고 모두가 인근의 파출소에 가서 사진기를 돌려 받고 필름은 압수당했으며, 광화문일대에서는 함부로 촬영을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주의를 들었습니다.

또한 국민학교 5학년때에 서울과 부산에서 중학교 입시제도가 폐지되고, 추첨입학제로 변경되었습니다. 당시의 이유로는 국민학교 때부터 혹독한 입시준비에 시달리는 것을 막고, 중학교의 실력을 평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부는 발표하였으나, 떠돌던 소문으로는 저와 같은 학년인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외동아들인 박지만이 공부를 못해서 중학교 입시제도를 철폐했으며, 아마도 고등학교 입시제도도 변경할 것이라고들 말했으나, 그 진위는 지금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1974년부터 또다시 고등학교 입시제도는 변경되어,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뉘어지고, 인문계는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을 공동학군과 일반학군으로 지망에 따라 나누어 추첨으로 진학하였고, 실업계는 학교별로 학생을 모집해, 당시 철도고등학교, 덕수상고 등의 학교들은 매우 높은 입학성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71년에 중학교에 입학하자, 중학교부터는 학생회장을 연대장으로, 규율부장(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우애부’라고 호칭했음)을 대대장으로 불렀고, 전교생이 모인 조회에서는 국기가 게양될 때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합창하였습니다. 연대장과 대대장은 완장과 양쪽어깨끈과 허리끈이 연결된 장구를 교복 위에 입고 조회에서 학생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중학교에는 없던 교련과목이 생겼고, 주로 하사관출신의 교련교관들이 교련선생님으로 불렸고, 교복, 체육복에 교련복이 추가되었으며, 일주일에 한시간씩 교련수업을 받았고, 수업내용은 주로 제식훈련이었습니다. 또한 1년에 한번씩 학교별로 교련검열이 있어서 어떤 직위인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교련검열관의 방문에 대비해서 학교전체가 사열과 행군훈련을 받았고, 교련검열을 1주일 앞두고는 수업을 전폐하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소문으로는 대학입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시기인 학년초기에 교련검열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교장과 교련교사가 열심히 실력자에게 선을 대고 있다는 말도 떠돌았습니다.

1974년 고등학교 1학년 말에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의한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 광고게재금지가 행해지며, 동아일보가 백지로 발행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저희 학급에서는 학급비의 일부를 동아일보에 기탁하기로 학급회의(당시에는 HR이라고 칭함)에서 결정하며 ‘XX고등학교 1학년 X반 일동’으로 조그만 광고를 실었으나, 그 결과로 학생은 특별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로 좌천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간 시행되어오던 혼분식 장려운동이 강화되어 도시락에 30%이상의 잡곡이 의무화 되었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도시락검사를 위해서 준비가 안 된 학생들은 쌀밥과 보리밥을 교환하는 진풍경도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필자는 1년 재수를 한 후, 1978년에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자 월요일 1교시부터 4교시가 교련이었습니다. 교련수업은 2회 이상 불참하면, 즉각 강제로 군입대를 해야 한다고 말해졌고, 교련복, 학생모, 명찰, 군화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월요일은 학교가 온통 교련복투성이였습니다. 그리고 1학년 중에는 대학교별로 지정된 군 훈련소에 1주일간 머리를 빡빡 깎고 입소하여, 제식훈련, 각개전투, 유격훈련을 받았습니다. 필자는 11월 말경에 성남의 남한산성에 있는 문무대의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학교의 용원실에 사복경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띠였고, 특정수업시간에는 강의실의 맨 뒷줄에 낯 선 조금 나이를 먹은 듯한 사람이 앉아있곤 했습니다.

필자는 대학에서 지리학과를 다녔기에, 한 학기에 한 번씩 지방답사를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장발족이라고 해서 정부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월남전에 대한 반전운동이 히피족을 중심으로 행해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만, 필자의 경우에는 이것으로 인해서 재미있는 일화를 경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1학년 때에 강화도답사를 위해서 학생들은 신촌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모였습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은 장발족이라고 불리 울 만큼 머리를 기르고 있었으나, 대구출신의 한 학생만이 군인처럼 짧게 머리를 깎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머리를 짧게 깎고 온 학생은 필자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에 대해서 “너희들은 검문소를 통과할 때 장발족으로 적발당해서 모두가 강제로 머리를 깎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후, 우리 모두는 상당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지만, 버스탑승시간이 되어 버스에 탑승하였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은 학생은 버스의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버스는 얼마간 달리다가 드디어 강화대교 앞의 검문소에 도착하였고, 헌병과 경찰이 차에 올라 경례를 하며, 주민등록증을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헌병과 경찰은 한 명씩 주민등록증과 얼굴을 대조하며, 장발단속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우리들의 사이를 통과해 갔습니다. 모두들 약간 안도는 했지만, 맨 뒷좌석까지 간 후에 돌아오면서 단속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고 머리를 짧게 깎고 온 학생의 앞에 선 헌병은 그에게 하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지도교수가 함께 하차하여 잠시 후에 돌아 올 수는 있었지만, 그의 설명에 의하면, 군인으로 의심을 받아 정밀검문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이것이 1958년 한국에서 태어나서 1979년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여대생 접대부와 인기여가수를 거느리고 부도덕한 여흥을 즐기던 중에 자신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간의 취중간의 권력투쟁으로 발생한 말다툼에 참견하다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며,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시대가 종결된 암울하고도 이유가 불분명했던 시대의 한 단면입니다.

오늘 2017년 3월 31일 새벽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구속되었습니다. 박근혜는 국민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서 국민들이 이런 일들을 당하며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박근혜가 이런 사실들을 체험하고 주변의 고통을 함께 했다면, 국정역사교과서로 자신의 아버지를 미화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군사독재자에게 달콤한 말로 아부,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에만 귀 기울이고,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함구하게 하려는 것이 결국 수많은 비리와 사건 사고를 낳게 한 주범이 되었고, 결국 수인번호 0000가 찍힌 수의를 입고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것과 한편 법 위에 군림하던 제왕적 대통령의 말로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합헌적인 귀결로 이어지게 된 점에는 이견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박근혜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권력의 최고 자리인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을 무시하고 위배한 지도자는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는 판례를 남겨주어 후임 대통령에게 교훈이라도 남겨준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일본에서 이선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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