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 Sa Ik : 3-Star Korean General in Imperial Japanese Army was still Anti-Patriotic

<Japan : Prof. Lee, Sunhoon>

일제식민시대의 한반도 출신 일본군 육군중장 홍사익

홍사익(洪思翊)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출신의 일본육군군인으로서 조선의 왕족이었던 이은(李垠)과 함께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한반도출신으로서 가장 높은 계급인 중장에 오른 인물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에, 전범으로서 필리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889년 조선시대의 경기도 안성의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홍씨입니다. 일본에 의한 한반도지배가 사실상 시작된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9년에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됨에 따라서 일본의 중앙유년학교에 국비유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한 후에, 곧바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는 대한제국으로부터 파견유학생이 몇 명 재적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그 충격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홍사익은 “지금 궐기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을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실력을 쌓은 후에 투쟁에 나서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14년 25세에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742명중 31등(26기)으로 졸업하고, 육군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동경에 본부를 둔 제1사단 제1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34세인 1923년에는 육군대학교(35기)를 졸업하였습니다. 일제식민시대에 육군대학교에 입학한 조선출신은 이은, 이건(李鍵), 이우(李鍝)의 3인과 홍사익을 합한 4인이 전부이며, 홍사익 이외의 3인은 모두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던 조선의 왕족들이었습니다. 36세인 1925년에는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전사편찬에 임했으며, 40세인 1929년에는 육군 소좌(한국의 소령에 해당)가 되었고, 42세인 1931년 8월에는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재직하였으며, 44세인 1933년 4월에는 관동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에 고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때에, 봉천군관학교(奉天軍官學校: 만주국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함)를 지도한 이외에, 군관학교의 모집대상에 만주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이전까지 만주국군 장교의 자격으로는 일본인, 만주인, 연안계조선인에 제한되어있었지만, 처음으로 조선인 이민자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 45세인 1934년에는 육군보병 중좌(한국의 중령에 해당)가 되었고, 47세인 1936년까지 관동군사령부 참모부에서 근무했습니다.

홍사익은 대한제국군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동료이던 한국광복군 사령관 지청천(池靑天)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조선의 독립에는 아직 시기상조이며 지금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지청천의 권유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청천을 포함한 대한제국군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들과 비밀스럽게 우정을 유지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가족을 자비로 지원하였으며, 창씨개명이 단행되었을 때에도 최후까지 개명하지 않았다고 하며,  홍사익은 일제식민지 상태에 있는 조선인의 입장을 ‘영국에 있어서의 아일랜드인과 같은 상태’로 자신의 아들에게 설명하였고, 고종황제가 하사한 대한제국의 군령을 생을 다할 때까지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도 있습니다.

1936년에 육군보병학교의 교관으로 전근하고, 38세인 1937년에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12월에 중국에 파견되었고, 1938년 3월에는 대좌(한국의 대령에 해당)로 승진하여 흥아원조사관이 되었고, 상해의 화중연락부에 배속되어 정보수집과 정치공작에 종사했습니다. 흥아원조사관이란 원래 문관에 해당되지만, 당시의 군의 권한확대에 의해서 군인이 배속되게 되었습니다.

41세인 1940년 8월에는 제1사단 사령부에 배속되었고, 42세인 194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해서 화북의 하북성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 108 부대의 여단장이 되어, 화북의 팔로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팔로군 산하에는 조선의용군의 화북지대가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에 후지아주앙(胡家庄)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공격을 받아 주요한 대원들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43세인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는 육군공주령학교의 간사(부교장에 해당)로 재직했습니다.

45세인 1944년 3월에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했고, 같은 해 10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12월에는 필리핀 제14방면군 병참감이 되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을 맞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홍사익이 평생 고대하던 조선해방의 순간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인 한반도에서 교사로서 조용히 살기를 갈망하였지만, 결국 홍사익은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을 수는 없었습니다.

연합국으로부터, 포로수용소장 시절에 식량부족 때문에 포로에게 충분한 급식을 하지 않은 책임을 추궁 당하자, 군인으로서 자신의 죄상에 대해서는 일체의 변명과 증언을 하지 않은 반면에, 다른 전범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변호를 펼친 것으로 재판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당시 한국국내에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언론에서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끝내, 마닐라군사법정에서 전범자로서 1946년 4월 18일에 사형판결을 받아, 같은 해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66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인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의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홍사익의 묘는 유품을 담은 빈 관과 함께 부인 조씨의 묘 옆에 조성되었고, 비석은 1947년 4월에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부인 조숙원은 오랜기간 병상에 누웠다가 1943년에 병사했으며, 첫째 아들인 홍국선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1984년에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둘째 부인 이청영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이청영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 홍현선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거주했지만, 한국전쟁후에 친일파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로스엔젤레스에서 유학을 하였으며, 1978년에 교통사고로 로스엔젤레스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언론인 송건호는 홍사익에 대한 비판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송건호의 홍사익에 대한 평가에 의하면 ‘일본의 한국민족에 대한 식민통치는 한국민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한국인을 한국민족이라 부르지 않고 ‘반도인’이라고 했으며 일본을 ‘내지’라고 추켜세우는 판이었으므로 한국인으로서는 같은 동족이 중장까지 승진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민족적 긍지를 높혀주는 구실을 했으며 홍장군을 친일파로 욕하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제시대의 홍장군을 보는 눈과 해방 후에 홍장군을 평하는 가치판단은 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송건호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홍사익이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것은 순수하게 홍사익의 능력이 일본인에 비해서 월등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민족적인 긍지로서까지 해석하는 것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제식민시대에 일본이 한국민족을 철저하게 비하하고 노예와 같이 혹독하게 다루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홍사익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일제식민시대를 미화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용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배의 미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사익이 자신의 출세를 자신의 월등한 능력에 의한 결과인 것으로만 생각했다면, 여러 번의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살았던 친일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그렇게 혹독한 평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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