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망명은 허구, 미국에 의해 납치되다

(사진은 중앙일보에서 빌려옴(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을 버리고 대전으로 도망간 후, 다시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도망간 이승만 전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12월 27일(현지 시간) 뉴스로에 따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에 자유의지로 망명한 것이 아닌 미국에 의해 납치, 압송되었다고 밝혔다. 한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이승만 동상을 세우는데 앞장서는 한인들이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한인들은 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며 그를 기리는 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과연 믿을만한  진실인가? 지금처럼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기사를 읽으며 과연 이 기사가 믿을 만한 기사인지 하는 생각을 하며 요모조모 따져보고, 비슷한 제목으로 구글을 해서 찾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뉴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은 과연 어떠했는가?

뉴스로에 따르면, 이승만의 출국은 “망명” 이 아니었다는 월간 조선 기자 이동욱씨의 심층 분석 기사로 한국 내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아직도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는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며, 그를 위한 동상을 세우는데 열정을 다하고 있다. 김태환씨(현대사 연구가, 로스엔젤레스 거주,  남가주 한인 하버드대 동창회장)에 따르면, 미국 정부 자료와 미국의 외교관들의 회고, 회견 기록물등을 열람하면서 1960년 5월 29일 이승만 전 대통령 미국 망명설은 허구였으며, 3.15 부정선거, 4.19 혁명등과 아울러 틈만나면 북한을 침략한다는 발언으로 미국을 긴장하게 한 그를 더는 볼 수 없었던 미국 CIA 의 공작에 의한 납치였음을 밝혔다.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아이크가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한국전 (6.25 사변)휴전 달성을 목전에 두고 27,000 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은 이 박사가 휴전 협정 교섭을 중단시켜서 전쟁을 연장시키려 한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격노하게 만들어 그는 국가안전보장위원회 회의에서 (이미 작성된 이박사 제거 작전인) 에버레디 작전(Plan Everready)을 발동하여 이 승만 대통령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5) 주변에서 만류해서 당시엔 그냥 넘어갔다. 특히 아이크가 이 박사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반공 포로 석방 사건으로 휴전 조인이 약 5주가 연기되는 바람에 불필요한 미국인 자제들의 인명 피해(Casualties) 가 주당 약 1천 명으로 근 5천명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민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반공포로 석방은 근본적으로 불필요했다. 그 이유는 이미 그해 68(석방 10일 전)에 유엔측과 공산측에서 휴전 교섭상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문제를 자유 송환 방식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반공 포로 석방에 격분한 중공군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 평한 것 같이 (6), 북진 통일이 이 박사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을 본때있게 보여주려고, 713일부터 약 일주간 한국군이 담당했던 중부 전선의 금성천 돌출부(Kumsong River Salient)에 한국전 참전이후 최대 규모의 공격을 가해서 우리 장병 약 3만 명이 죽거나 다친 (공산측은 63천으로 발표) 한국전 발발이후 단일 전투(금성천 전투 또는 7.13 공세로 불리운다)로는 최대의 인명 피해(Casualties)를 당해서 (7), 이 박사의 노망기로 그 자신 조금만 젊었더라면 고 딘 디엠 신세가 될 뻔 했고 종내엔 권좌에서 축출(逐出) 될 빌미를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젊은 장병 3만 여명을 도살장으로 몰아넣었는데 아직도 이승만 추종자들은 영웅적 쾌거라고 읊어대고 있다.” <뉴스로 기사 발췌>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자신의 저술서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서 이승만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했다. <중앙일보 기사 발췌>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부산을 거쳐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히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갔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에 머문 시간이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시간은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는 아무런 정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국민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이리저리 도망다닌 대통령, 그는 마치 세월호 7시간동안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아이들을 버려둔 채, 롯데호텔에서 성형 수술을 한 현 대통령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 국가의 수반이었다.

그 당시 허정 과도 정부와 이승만 박사 본인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미국의 공작,  “이박사 출국 3일전에 미대사가 허정 수반에게 이 박사 출국을 알렸다” 는 것을 보면 어느정도 짐작할 수있는 시나리오다. 물론 그 당시 이기붕( 이박사의 양아들)씨를 부정선거를 통해 뽑았으나 이기붕역시 “기동도 못하고 의사표현도 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병신” 이었으며, 이 박사 역시 정신이 흐려져서 생각을 바로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미 병약한 자로 국정을 돌 볼 수 없었던 터라, 프란체스카 여사와 박한철씨가 국정을 돌보는 상태였다고 하니 과연 지금 정부와 대조해서 보면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기사를 뉴스로에서 불러와서 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역사를 바로 알자는 이유다. 너무나 왜곡된 역사로 우린 그동안 세뇌되어 왔다. 하지만 진실은 어둠을 뚫고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기에 이 기사를 현 시국과 관련하여 올려 보았다. 기사를 읽고 판단은 읽는자의 몫이다.

관련 기사는, 아래와 같다.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kth&wr_id=25

코리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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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이승만의 망명은 허구, 미국에 의해 납치되다

  1. 안녕하십니까?

    뉴스로에 나온 제가 발굴한 글을 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출처/발굴자가 “로스앤젤레스의 현대사 연구가 남가주 한인 하버드대 동창회장 김 태환” (뉴스로에 나옵니다) 으로 밝혀 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읍니까?

    감사합니다.
    LA 에서
    김 태환 드림
    213.784.6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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