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4<은우근 교수>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Gwangju : Prof. Woogeun Eun>

II. 부끄러움 또는 역사의식의 공동체

먼저 5월 민중항쟁에서 민중과 사제들의 실천을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의 형성과 역사의식의 각성에 초점을 맞춰 재구성하겠다. 필자의 주 관심사가 이 정서의 형성과 발전을 통한 역사적 주체의 교양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재구성은 사제들, 시민군, 외신기자,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1. 5월민중항쟁의 전개와 민중 정서의 변화

광주에 5월이 오면 적어도 금남로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금남로 없는 5월 광주를 생각할 수 없듯이, 카톨릭센터를 빼고 5월의 금남로를 말할 수 없다. 벗겨진 신발들이 나뒹굴었던 금남로 거리 이곳저곳에는 5월 민중의 핏자국이 배었고, 금남로 주변 골목들에서는 절규와 탄식, 외침과 함성이 울렸다.

1)미친 폭력에 대한 공포를 체험한 민중과 사제들,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끼고 국가에 대한 의문을 갖다. (5월 18-19일)

30여 년 전, 금남로 거리에서 벌어지는 공수부대의 인간 사냥과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공방을 목격하기에 카톨릭 센터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없었다.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와 직원들은 인근 빌딩의 시민들과 함께 그 현장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축제도, 유희도 아니었다. 그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은 끊임없이 교회와 사제의 역할,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럽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며 그에 대한 응답을 실천하게 하는 일이었다.

5월 18일과 19일의 상황을 겪은 사제들은 ‘일생을 통해 처음 본 무지막지한 장면 (신고르넬리오) 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윤공희 대주교) 무차별 살상을 저지르는 ‘공수대원들에 대한 두려움'(조철현)과 ‘이런 끔찍한 상황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감( 이영수)’을 느꼈음을 토로하고 있다.

윤공희 대주교는 19일 카톨릭센터 6층 집무실에서 인근 골목에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서는 빨리 병원에 데려가서 응급 치료를 받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그 사람은 일어나려고 비틀거리다 다시 쓰러졌다. 그때 윤 대주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성경의 비유를 떠올리며 ‘저걸 보고도 내려가지 못하니 내가 강도당한 동족을 외면하는 제관이 아닌가’리고 자책했다. 윤 대주교는 다른 곳에서 ‘나 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쫒아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 아프고,…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라고 “5.18민중항쟁사료전집” 에서 밝히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도 윤 대주교가 5월 19일 “괴로운 심정”과 “양심의 가책”을 자신에게 고백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정규완 신부(당시 북동성당 주임)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군인들이 성당까지 쫒아와 학생들을 찾으려고 뒤졌다는 보고를 받고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두려움을 이기고]앞장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반성한다.

인간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공수부대의 미친 폭력에 대해 분노와 공포을 체험한 5월민중과 사제들은 동시에 공포를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도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게 바로 인간인가? 개다. 도야지다” 라는 김성룡 신부의 고백은 바로 이런 반성이다. “6.25 때도 이러지 않았다. ”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마구 사람을 죽인대요”, “이북사람들이 내려온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안 할 것이다” 등의 표현은 곧 “국가가 우리에게 이래도 되는 거야?”라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었다.

2)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다 : ‘생명공동체’의 연대감이 가장 고조되다(5월 20-21일)

20일 오후부터 공동체적 투쟁이 본격화 되었다. 20일밤 시위에 영업용 택시와 버스, 트럭등 약 200대의 차량과 20만 명의 민중이 참여했다. 당시 광주 인구가 73만명이었으니 집보는 사람, 노약자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민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 셈이다. 이날 야간 시위를 도청 옥상에서 목격한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의 취재기는 당시 상황과 5월 민중의 정서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우리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이 갖는 그토록 피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                    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방송국, 파출소 등이 불타 시내 곳곳에서 검은 연기                    가 치솟는 가운데 광주 외곽으로부터 도청앞 광장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                        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피속에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전율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                       른다. 아리랑은 애잔한 음률이 전하는 서정보다 더 강렬한 욕구와 울분, 그리고 불타는 전의                   를 함축하고 있음을 처음 느꼈다.

20일 밤 5월 민중은 신비스런 ‘공동체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 잔치는 민중 스스로 목숨을 바쳐 준비한 것이었다. 5월민중은 자신을 “개나 도야지”로 만든 원시적 공포에 처절하게 맞섰다. 5월 민중은 공포에 결코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연대하여 싸웠다. 1980년 5월 25일, 김성룡 신부의 미사 강론의 일부는 당시 상황과 시위에 나선 5월 민중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제야 말로 우리는 결단의 때를 맞았다. 비굴해져서 짐승같이 천한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운 민주 시민으로서 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 이날 시위는 밤을 새우며 계속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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