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내용과 관계 없음: 목련은 늘 부모를 생각하게 하는 꽃이다. 손바닥 처럼 넙죽한 꽃 잎이 마치 어머니가 두 손을 모아 자식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라…)
< Japan : Prof. Lee, Sunhoon>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하는 한국
필자는 한국을 방문하면 , 종종 지하철을 타곤 했습니다. 60대로 보이는 한 강건한 모습의 노인이 좌석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학생의 정면에 서서 좌석에서 일어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맞은 편의 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우렁찬 노인의 주장을 명확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노인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은 좌석에서 일어나며 비어있는 제 옆의 빈자리로 이동해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지하철에는 여기저기 자리가 비어 있었으며, 학생이 앉아 있던 자리는 노약자석도 아니고, 출입구에 가까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매우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한국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라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은 충분히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간주하고 싶습니다.
위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지하철을 타면,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지하철이 상당히 붐비는 상황에서도 노약자석이 비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노약자석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상황도 자주 목격하게됩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노약자석이란 노약자만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아니고, 노약자가 우선적으로 앉을 수 있는 좌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노약자석이 비어 있는 상황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가 동방예의지국이며, 매우 예의 바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여기서 동방예의지국이 혹시, 노인에 의해서 또는 연령에 의해서 지배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국가의 사회구조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상대에 비해서 연령이 높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은 권력과 우선권을 가지며, 연령이 높은 사람의 재량권에 의해서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간의 언쟁이 벌어지는 경우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상대에게 ‘나이가 몇 살이냐’ 고 추궁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누가 보아도 언쟁의 내용의 옳고 그름 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의 발언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현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필자는 예의란 스스로 보여주며 상대에게 합리적인 동의를 구해야 하는 매우 이성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장자가 자신 보다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언쟁이 벌어질 경우에, 연장자가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장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을 살려가며, 상대인 젊은 사람을 포용하며, 대화를 유도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의 잃어버린 연장자의 주장에 대해서 굴복을 강요 받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면, 그 사회는 연령대에 따라서 심한 분열현상을 발생시키게 될 것이며, 사회는 심각한 분열로 소통불능의 상황에 빠지게 되어 포용력 없이 강직하게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노인과 연장자의 경직된 독선에 대한 불신감을 극대화하며,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적인 의견의 창출과 질서의 확립마저도 심각하게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한국사회는 심각한 연령대별 갈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연령대별 갈등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어떠한 사안이든 상대적인 책임을 말하는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한 쪽의 책임으로 몰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연령대별 갈등의 책임이 젊은층의 노년층에 대한 예의 없는 행동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젊은층의 무례한 행동은 어디서부터 발생한 것일 까요. 현재 노년층이 된 사람들도 과거에는 젊은층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에도 당시의 노년층에게 이런 젊은층에 대한 무례함을 지적 받고, 비난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노년층이 젊었었던 시절에 노년층에 의해서 부당하게 무례함을 지적 받고, 꾸중을 들었을 때에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 까요. 나이가 어리다는 것만으로 하대 받으며, 부당하고 부적절하게 지적 받고, 무례한 사람으로 치부 되어 버리기도 했던 상황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 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상황에 따라서는 내가 나이가 많았다면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한 분들도 상당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을 다짐했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즉, 내가 연장자의 입장이 되더라도, 나보다 나이 어린 상대가 나와 같은 부당한 대우에 억울함을 삼키는 상황을 재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연령에 의해서 정당성과 우월성이 결정되는 사회적인 관습은 권위주의적인 사회풍조를 만들어 냅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2013년말 무렵에 한 종편방송에서 정치평론가들이 매우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논쟁의 끝부분에서 한 정치평론가가 상대에 대해서 나이가 7살이나 아래인 사람이 엄연히 xxx이사장이라는 호칭이 있는 데에도 xxx씨라고 불러가며 무례하게 대했다며 몹시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발언을 했던 정치평론가는 얼마 후에 국무총리 비서실에서 공직을 역임했고, 현재는 시청자미디어재단의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씨라고 호칭을 하는 것이 무례한 것이라고 인식될 수 있으며, 반드시 이름의 뒤에 직위를 붙여야만 하는 것이 예의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필자는 2013년 8월에 24년간의 해외생활에서 일시 귀국한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선훈씨 또는 이선훈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다고 말해왔던 것이 어쩌면 주위의 분들에게 상당한 불편함을 끼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한국에서는 느닷없이 ‘사장님’ 또는 ‘회장님’이란 호칭이 붙여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도 떠올렸습니다.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권위주의의 전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평론가는 방송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객관적인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 시청자를 설득하며, 토론을 진행해 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일 것입니다. 한편, 정치평론가가 방송을 통해서 자신이 7살이나 연장자이며, xxx이사장이라고 불리워야 할 만큼 권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나이가 어리고 직위도 낮은 토론의 상대보다도 객관적이고 논리적일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하는 것에는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권위주의적 상황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물론 이 정치평론가의 주장이 모든 시청자들에게 상식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치평론가가 살아왔던 생활과 주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정치평론가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방송에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치평론가의 연령과 직위에 입각한 부당한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연령은 위이지만, 직위가 아래이고, 출신학교의 후배인 경우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질 경우, 모든 경우에 연령이 우선될 수는 없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직위와 선후배 관계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공사구분이라는 상황이 요구됩니다. 상식적으로는, 공적으로는 직위를 인정하며, 사적으로는 연령과 선후배관계가 성립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하나의 직장에서 발생하는 경우에는, 일상생활을 공유해야 하는 직장생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서로간에 상당한 혼란을 가져 올 수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직장의 인사에서는 직위, 입사순위, 연령 등의 조건들이 역전되지 않도록 조정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사에 관한 고려사항들은 인사의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직위에 대한 적합도에 우선하여 적용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사기업에서는 상당부분 해소된 것으로 보이지만, 공직사회에는 뿌리깊게 남아있어, 진급에서 누락된 사람은 퇴직이 당연시되는 서열문화가 형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서열문화는 서열의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에 의해서 공정성을 잃고 임의적으로 결정되어짐으로 불공정한 사회질서를 만들어내는 불합리한 사회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의 크기만큼,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의무와 책임 보다는 권한만을 의식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권한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권한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과해진 의무와 책임에 대한 과실을 은폐 또는 부하와 타인에게 전가하는 경우마저도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사회의 한 부분, 단지 한 사람의 권력자에 의해서만 발생하더라도, 그 영향은 그 부분, 그 사람, 그 경우에서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파급효과는 외견상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훨씬 광범위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주어진 권력이 크기에 비례해서 파급효과도 크게 나타나며, 가장 극대화해서 나타나는 것이 정치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의 경우에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최우선적을 보장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정보를 독점하며, 헌법준수의 의무를 위배하고, 법적 권한을 확대해석 하여, 부당하게 적용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부작용 또는 부정비리를 은폐 또는 전가하기 위하여, 또 다른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국가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의 극단적인 예가 이번의 박근혜의 탄핵으로 결과된 일련의 사태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장자가 자신의 젊은 시절의 불편부당했던 상황들을 고려하여, 젊은이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연장자로서의 권한이 아닌, 연장자로서 책임과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에 의한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를 인내심 있게 설득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예절이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연장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연장자가 모범을 보여 젊은이를 감동시켜, 재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의 없는 젊은이는 예의 없는 연장자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의 무례함을 직면하는 연장자는 무례함을 꾸짖기 이전에 자신의 젊은 시절과 자신의 행동을 먼저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식이 편안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나의 자식의 친구와 또 그 친구들,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편안하게 잘 살아 갈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직위에 의해서 부여된 권한을 생각하기 이전에, 직위에 부과된 의무와 책임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자신의 직위가 가지는 권한의 범위를 의무와 책임을 기준으로 객관적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고려되지 않았던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권한이 아닌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납득시켜 가야만 할 것 입니다.
필자는 대한민국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자랑으로 삼는 국가가 아닌,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이 되어, 아픔, 억울함, 불편함을 대화와 설득으로 풀어가며,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일본 에서, 이선훈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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