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여기에서 문명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시민이 되다’ 혹은 ‘세련시키다’ 등의 뜻으로 쓰인 동사 civiliser 가 동명사로 바뀐 문명civilisation이라는 개념에는 근대 서구 국가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 즉 과학과 기술을 통한 생활 조건의 변화,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와 법체제, 예술과 학문 등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 이성을 통한 역사 진보에 대해 희망을 걸었던 계몽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헤르더를 위시한 대부분의 근대 지식인들도 거의 한결같이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이 문명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는데, 칸트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헤겔 역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인들을 일컬어 이른바 ‘문명의 선교사(die Missionarien der Zivilisation)라고 부르면서 세계 전역에 서양의 사고와 생활 양식을 확장하는 일을 인류률 위한 커다란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문화철학자 반 퍼어슨의 지적처럼 이제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 과학, 종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만남, 죽음과 삶, 성적 사랑, 재화 획득, 상품의 제조 등 모든 것이 문화를 구성하게 되었다. 문화를 이처럼 넓은 의미로 인간들의 삶을 위한 모든 생산 활동 혹은 그 결과물이라고 할 때, 이때의 생산이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활동과 그 산물이 아닌 모든 노동의 결과물, 즉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의 모든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세계에 대해 어떤 일정한 규정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세계를 개선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는 환경세계를 개선시키려는 인간들의 의지, 그 의지가 반영되어 나타난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서의 모든 생산물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 퍼어슨은 문화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본다. 왜냐하면 문화는 항상 변화에 관한 이야기요, 기존 문화 패턴의 변형에 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양한 행동 양식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의 변화 과정 자체로 파악된다. 문화는 예술 작품이나 책, 생활 도구 등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또 박물관과 대학 건물, 회의장이나 공공서류등을 그냥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문화는 이제 도구와 무기 제작, 춤과 서약송(誓約頌) 의식, 육아법과 정신 질환자 치료법, 성애와 사냥, 의회 소집과 칵테일 파티 등 다양한 행동 양식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문화 개념은 이제 훨씬 더 넓어졌고 역동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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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념의 변화

정신적 가치와 관련되었던 문화의 의미가 물질적인 것과 관련된 경제활동이나 신체적 노동을 통한 생산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민사회의 도래 이후였다. 근대 시민사회는 ‘욕구의 체계’라는 헤겔의 규정이 잘 말해주듯이 경제적인 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사회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전통적인 종교적 이념이나 윤리적 가치체계로부터 독립해서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제 경제적, 물질적 욕구는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규제만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활기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요소의 독립은 도시상인과 시민계급이 시민사회의 주된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서 가능하였다. 시민사회는 인간의 노동과 능동적인 활동을 강조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의식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 즉 자연, 사회를 더 이상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개발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시민사회의 출현과 함께 문화 개념도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문화와 더불어 문명 개념이 등장이 잘 보여준다. 볼테르와 튀르고 그리고 콩도르세 등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의 여러 저서에서 인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완성’, ‘완벽화’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면서 문화를 인류의 완성을 향해 진보해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였다. 인간 정신의 산물로서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독일의 계몽주의자인 헤르더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헤르더도 문화를 일차적으로는 정신의 도야, 정신의 형성(Bildung)으로 보았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류의 ‘인간화’, ‘문명화’, ‘개화’, ‘계몽’의 일정한 단계로 보았다. 

동시대인인 칸트 역시 비슷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칸트는 문화 개념 자체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조야한 것으로부터 좀더 세련된 것으로의 이행하는 문화과정을 자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문화 개념의 발전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문화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이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노동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문화적 행위와 그 산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문화 발전이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 보존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인간은 노동의 고통을 감수하며 지식을 추구하고, 법을 만들어 내며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문화화된(kultiviert)’상황이란 바로 ’문명화된(ziviliziert)’ 상황을 의미하고 이 것은 바로 학문과 예술, 법질서와 도덕화된 체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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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

하나는 문화 비판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적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그의 대표작인 <국가>에서 시인의 위치에 대한 비판과 소피스트의 활동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플라톤이 보기에 문화를 생산, 보급하고 시민을 교육하는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시인과 철학자가 서로 경쟁적인 위치에 있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는, 단지 시인이 모방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반면 철학자가 추상적 개념에 의한 직관적 인식에 의존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하되 지향하는 현실이 다른 데 있다. 그들은 다같이 ‘모방자(mimetes)’이지만 철학자는 참된 현실(이데아의 세계)을, 시인은 단지 겉으로 나타난 현실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참된 교육을 위해 의존해야 할 지식은 시인이나 예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현실, 참된 존재 질서를 파악하는 철학자에게서 얻을 수 있다. 철학만이 유일하게 참된 현실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을 교육하는 파이데이아는 철학적 파이데이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철학적 파이데이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생성에서 존재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불변의 세계로 정신적 눈이 향하도록 조정하는 활동이다. 달리 말해서 지식에서의 최고의 기준, 척도 중의 척도, 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불변하는 영원한 질서에 대한 관조이며, 영원한 질서에 대한 관조는 인간의 영혼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형성시킨다. 영원한 질서를 관조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그 질서를 ‘모방’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을 ‘형성’하고 ‘동화’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질서, 즉 영원한 퓌시스의 질서에 따라 산다면 영혼의 건강과 균형은 보장될 수 있다. 플라톤의 파이데이아에 관한 생각은 로마를 거쳐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시민사회의 문화 개념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문화 개념을 주도하는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의미를 가진 이러한 문화 개념은 계몽주의가 시작된 17, 18세기에 이르러 또 다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의 지배자로서 적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 자신의 문화적 노력을 통해서 이 자연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화라는 말은 종교, 예술, 과학, 국가운영의 기술과 같은 인간의 고도의 지적, 정신적 활동의 다양한 표현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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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이념

동양의 전통문화는 농경문화다. 농경이란 일정한 공간의 토지를 이용하여 계절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기후 조건에 맞추어,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재화의 생산은 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노동, 즉 그 생산과 가공의 인적 최소단위는 가정이다. 이처럼 가정으로부터 농경문화의 모든 것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인간의 전란 등을 극복하기에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기에, 농경사회에서는 노동에서 관, 혼, 상, 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들을 가정을 단위로 형성된 마을공동체 안에서 영위한다. 그리고 ‘이웃’과 ‘마을’은 주로 혈연과 친분관계로 조직되므로, 이들의 인간관계는 이해타산을 초월한 원초적 감정으로 형성된다. 전통사회에서 ‘효(孝)’와 ‘제(弟)’가 강조된 것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가 한 가정 내의 질서를 구현하는 정감행위라면, ’제‘는 공동체 안의 관계질서를 선도하는 정감행위이다.

농경은 자연질서에 따라 일정 공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농경에서 생산하는 재화는 주로 동, 식물 등을 생육하는데 쓰여지고, 그것의 생육은 천지자연의 화육(和育)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다만 그 결과를 가지고 이용후생(利用厚生)할뿐이다. 동시에 농경은 공간(토지)의 한계와 시간(계절)의 변화를 절대적인 여건으로 삼아 ‘생산(生産)과 제산(制産)의 원칙’을 강구했다. 이것이 바로 농경은 ‘생성된 재화’만을 이용하지 ‘내재되어 있는 자원’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왜냐하면 농경이라는 생성체계에 놓여 있는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이용하는 것을 곧 되돌려 주는 과정이므로 농경에 의한 자원의 생성과정은 계속될 수 있으나, 이 생성체계에 놓여 있지 않은 자원은 그 자체가 유한한 것이어서 꺼내어 쓸 경우 고갈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경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자원을 채굴하여 쓰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원의 이식을 최대한으로 취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천지의 화육생성작용을 돕는 일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생성체계에 속해 있는 땅은 최대한 개간하여 농경지를 넓히고(地盡其利), 개간된 땅에 알맞는 곡식을 적절한 시기에 뿌리고 가꿈으로써 가급적 많은 수확을 확보하여 그것을 가급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요긴하게 쓴다(物盡其用).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물건을 아껴 쓰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줄이지 못하면 한정된 물질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욕망충족은 욕망의 자가발전이라는 족쇄에 걸려들어 결국은 더 많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한한 물질은 고갈되고 사회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설계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생활관이다. 같은 물량이라도 그것을 아껴쓰면 오래 가고, 같은 재화라도 아껴서 잘 이용하면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이것이 ‘절용애물(節用愛物)’의 정신이다. ‘수분지족’과 ‘절용애물’은 물질 쪽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속한 ‘도덕’의 문제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정덕(正德)’이라고 했다. 이처럼 유한을 극복하고 ‘안빈락도(安賞樂道)’를 추구한 것이 농경문화의 슬기이다. 따라서 농경문화는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들과 화합(順天應人)하는 순리와 평화의 삶이며, 인간관계의 질서가 ‘정감’ 위주로 유지되고 해결되는 삶이다.

한편 서양의 문화 이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παιδεία; (영어) paideia;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교육, 학습”; “일반교양 교육” 이란 의미의 철학과 인식을 바탕에 둔 문화 이념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식과 행위의 규범을 인위성 또는 자의성에서 찾지 않고 퓌시스(Physis), 즉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고자 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역시 퓌시스에 의해 주어진 것을 퓌시스에 알맞게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활동이 된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의해 파괴된 퓌시스와 노모스(Nomos)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파이데이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면서 퓌시스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탁월한 품성과 자질, 즉 ‘아레테’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길, 즉 파이데이아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파이데이아, 특히 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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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의 개념

1) 문화의 정의

문화라는 용어만큼 일상생활에서나 학문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개념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문화라는 개념이 우리들의 일상적 삶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정확한 정의가 쉽지 않다는 것이 이 개념의 특징이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월리엄즈는 “문화는 영어 단어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몇 단어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문화라는 개념이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복잡하다는 것은 이 개념이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다양하다는 것은 이 개념이 확정된 의미도 없이 여러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한다.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이 개념이 사용되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올바른 정의 역시 여러 학문간의 상호 교류를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거부터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어 왔지만 근래에 이르러 문화에 대한 접근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관념론적 접근방식으로 문화를 주로 이른바 인간의 정신적 산물로서의 고유한 표현양식으로 이해하려는 전통적인 문화 이해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유물론적 방식으로서 여기에는 두 영역이 있는데, 첫째는 문화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과 구조로 이해하려는 문화인류학이 있고, 둘째는 현대에 이르러 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는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모든 문화현상을 그 물적 토대와 관련해서 파악하려는 다양한 문화이론이 있다.

‘문화’란 영어 culture, 혹은 독일어 Kultur의 번역어이다. culture 혹은 Kultur는 라틴어 cultura를 어원으로 하는데, 이 말은 ‘보살핀다’, ‘경작한다’, ‘재배한다’, ‘양육한다’는 뜻을 갖는 동사 colo에서 유래하였다. 그 형용사가 cultus이고 명사는 cultura이다. 그러므로 문화라는 말에는 자연 상태로 있는 어떤 것을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변형시킨다는 뜻이 포함되어있다. 인류 역사를 볼 때 가장 원시적인 도구 제작이 일종의 ‘도구 혁명’으로서 문화의 탄생이라면, 이러한 도구에 의한 자연의 가공으로 이루어진 ‘농업 혁명’이야말로 ‘경작하는 것 cultura’으로서 보다 높은 문화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원래 정신적 의미가 없던 문화라는 개념이 ‘도야’, ‘교양’ 등의 정신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로마시대부터였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이러한 교양 내지 도야라는 개념은 그리스철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물론 아직도 이러한 전통적인 개념은 많이 잔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업(agriculture), 양식진주(cultured pearl), 박테리아 배양(bacteria culture), 토양경작(cultivation of soil), 포도재배(viniculture)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 가치에 대한 인식 없이 아레테(Arete 덕)는 제대로 개발될 수 없고, 아레테의 개발 없이 평화롭고 정의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다고 생각한 플라톤에게 있어서 절대적 가치, 즉 이데아(Idea)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교양과 교육의 목적이었다.

플라톤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파이데이아(Paideia)는 바로 이러한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한 교양 혹은 도야를 의미하였다. 그런데 절대적 가치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인 파이데이아는 오직 철학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플라톤에게 있어서 철학을 통한 ‘교육’ 또는 ‘문화’는 최상의 지식을 통해서 한 인간을 최고의 윤리적 존재로 만드는 정신적 활동이었다. 파이데이아에 관한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서양의 문화 개념을 주도하는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키케로의 “영혼의 문화는 철학(Cultura animi est philosophia)”이란 표현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나아가서 키케로는 본래의 의미가 변용된 은유적, 철학적 의미에서 영혼의 도야(cultura animi)를 말하는데 여기에서 도야(cultura)는 성취된 상태라기보다는 성취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때부터 문화(cultura)는 물질적 영역을 가꾸는 것보다 마음(정신)을 가꾸는 특히 도덕적 정신을 함양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문화개념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 이념적 토대를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문화 인류학의 시조인 E. B. Tyler (Oct.2,1832-Jan 2,1917) 는 주로 19세기의 문화 인류학적인 접근에서 문화의 의미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지식, 믿음, 예술, 도덕, 법, 전통, 등 인간이 사회안에서 획득한 모든 것, 습관적인 것 까지도 포용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문화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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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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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영화

한국 영화에서의 여성의 한은 무속영화라는 장르에 의해서 다시 독특하게 그려지고 있다. 대다수 한국인의 무의식적인 정신 구조에 녹아있는 문화적 침전물로서 무속은 단순히 표현방식으로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제의적 양식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전통 사회의 억압적 질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동반한 근대화로 인해서 한국 여성들 의식 내면에 잠재해있는 상처와 고통 등을 치유하고 포용하려는 화해적 양식이 무속은 한국 고유의 신앙으로 일반 민중의 현세적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탐구하여서 얻어진 각종의 선험적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하는 신앙체계이며 동시에 인간의 모든 경험 내용이 침전된 민족고유의 집단적 연행 형태를 띤 예술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무속은 상류층보다는 일반 대중, 특히 여성들을 위한 민간종교이다. 이리하여 과거 지배계층들은 무속을 미신시하고 배척했지만 민중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소멸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근원적 정신구조로 남아있었다. 무엇보다도 무속은 부계 중심의 사회제도로 인해 소외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포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과 주체의식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무속이 사회에 내재해 있는 갈등과 모순을 사회적 또는 종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메카니즘으로 기능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공포영화, 역사물, 문예영화, 통속물 등 다양한 장르의 틀을 빌려 나타나고 있는 무속영화의 중요한 특징이며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시에 한국 사회의 은폐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존질서에 대해서 저항하고 해체하는 문화적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유현목의 <장마>는 좋은 예로 제시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G1U7IADQo&feature=youtu.be

그러나 친할머니는 길준의 죽음을 천수에 따를 운명으로 얘기하고 점장이에게 점을 보고 순철의 살아 있음을 믿는다. 이 과정에서 대립은 지속되지만 외할머니의 성스러운 의식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나아가서 두 할머니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으로 인해서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서로 갈등을 보여주지만 결국 무속신앙에 의해 혈연과 사상의 갈등이 전격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나아가서 외국에서 유입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갈등이 한국 고유의 신앙인 무속에 의해 해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외할머니는 그 망자를 가족들과 상면시키고 저승으로 배웅하는 무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서술의 원인과 결과는 모두 무속신앙에서 비롯된다. 이리하여 무속적 요소는 사건과 인물들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우선 영화는 자신의 꿈을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받아들이는 외할머니와 아들의 무사귀환을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친할머니를 대립시킨다. 이 과정에서 외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미래를 예언하는 계시로 알고, 집에 들어온 구렁이를 순철의 환생으로 보고 주술적 의식을 베풀어준다. 무속에서 억울한 죽음은 천수를 다하지 못한 불행한 사건이다. 이리하여 육체는 죽지만 그 영혼은 떠돌거나 다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구렁이는 저승에 가기 전의 순철의 원혼이며 죽음의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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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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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의 공동묘지> 이 영화는 <장화 홍련전>을 통해 일찍부터 여귀의 모태로 여겨져 온 가정비극과 기생의 인생 유전을 담은 30년대 신파의 구조를 근간으로 하면서 이 시기에 새롭게 부각된 ‘모성의 담론’을 주제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런 차원에서 가족과 가족담론의 재조직화를 핵심으로 사회전반의 재구조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무렵에 제작되었던 <월하의 공동묘지>가 일제강점기 가족으로부터 그 서사를 출발시키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여학생 명순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오빠와 애인의 뒷바라지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편승하여 갑부가 된 한수의 아내가 된다. 그러나 명순은 부르주아 가정의 아내이자 가부장의 계승자인 아들의 어머니가 되고서도 과거의 훼손된 순수성으로 인해서 고통받는다. 한편, 수난당하는 민족을 상징하는 오빠 춘식은 명순 가족의 도덕적 정당성을 희생시키면서 부와 명예를 추구한 한수의 부르주아 가정을 위협하는 과거의 망령이다.

여기서 지하로 스며든 독립운동가 춘식의 역사적 정당성이 동생의 행복을 위한 오빠의 애정이라는 사적 감정으로 치환되는데 이것 역시 60년대 후반의 여러 멜로드라마가 부당한 사회적 권력의 압박을 재현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따라서 명순의 원귀는 해원(解怨)을 현실권력에 의존함으로써 기존 질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승인했던 장화홍련과는 달리, 스스로 원수를 갚음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위한 상상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명순을 원귀로 만든 불의의 세력에서 그녀는 분리는 되었지만 이것이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한수와 모든 명분을 잃어버린 채 떠돌이가 되어버린 춘식과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불온한 결말이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신파적 요소가 <월하의 공동묘지>에 이르러 괴기와 결합함으로써 한국 괴기영화의 불온한 상상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후의 괴기영화의 한 전범이 되었다. 이처럼 <월하의 공동묘지>가 다른 공포(괴기)영화들과 공유하는 지점은 전통적인 여인의 한을 특정한 수용계층에 호소하는 그 양식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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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rector’s Role in the Creative Movie Artistry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헐리우드 장르영화의 특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특정한 플롯과 캐랙터 그리고 주제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이러한 누적적 과정을 통한 특정한 표현방식에 대한 친숙화에 있다. 인간의 다른 체험들과 마찬가지로 장르체험도 특정한 지각과정에 따라 구성된다. 같은 유형의 체험을 반복해 감으로서 우리는 계속적인 보강에 의해서 규칙으로 굳어지게 마련인 기대감을 키우게 된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운동게임에서 볼 수 있는데 운동게임이란 불변의 규칙과 시합의 성격을 결정짓는 구성요소들 간의 복합적인 체계이다. 한 운동게임에서 두 가지 규칙이 있을 수 없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그 운동 자체의 차별성이 존재하듯이, 특정한 장르 역시도 그 서술 구조 내에서의 규칙과 구성요소들의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영화의 주제나 스토리의 정형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어떤 주제가 장르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일관되게 가치를 반영하는 네러티브 체계로서 지위를 인정받음을 의미한다. 관객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소재를 즐겨 찾기 마련이고 이러한 관습적 관람행위가 영화제작주체가 요구하는 안정된 수입과 직결됨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르영화가 관습적이고 타성화된 서술방식을 지향하는한 작가적 창의성이 장르의 경직성을 극복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관객과 영화를 정서적으로 일치시키는 탁월한 동화능력이다. 헐리우드 영화는 내러티브와 플롯을 철저하게 관객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적용한다. 내러티브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내러티브는 다시 스토리와 플롯으로 나누어지고 스토리는 영화에서 명확히 제시되는 사건과 그 밖에 부연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플롯으로 바뀌어진다. 즉 스토리의 시공간적 순서나 흐름을 플롯에서는 몇 가지의 사실만을 보여줌으로써 바꿀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장르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에게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로서 제공된다. 영화 속의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이 플롯을 통해서 제시된 사실들로 부터 다른 여러가지의 사실들을 유추해서 구체적인 원인 혹은 결과를 예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게되고 동화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특정한 영화작가의 플롯이나 주제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핍진성(verisimilitude)이다. 핍진성이란 실제의 현실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의 사건들이 충분히 현실성있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핍진성은 영화의 내러티브의 완결성과 스타일 상의 규칙들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내러티브의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맞아떨어질 때 관객들은 그 사건이 충분히 현실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심지어는 그 사건을 실제 현실의 사건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비현실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한 순간이나마 실제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 일어날 수 없는 것, 그러나 경험하고 싶고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을 가져다준다. SF장르가 대표적인데, 불가능과 구속의 세계인 실제 세계에서 탈출하여 가능과 자유의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관객들은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또 이렇게 현실을 왜곡시킴으로써 관객들에게 현실로 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공통적으로 말해주듯이 장르영화가 궁극적으로 현실도피를 통한 미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데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포드나 혹스처럼 판에 박힌 플롯이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성격화를 두고 독창적인 예술성 운운한다는 것은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채, 헐리우드 영화에 지나치게 경도된 혹은 예술가라는 낭만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유럽인들의 과잉의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작가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 반박하기를 자신들도 헐리우드 장르의 관습들이 어떠한 것이며 그 한계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장르들이 새로운 의미들을 사전 봉쇄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독들로 하여금 자신의 독특한 주제를 일관되게 다룰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어떠한 규칙의 체계라도 항상 위반의 가능성을 동반하기 때문에 장르는 의미의 새로운 변주를 위한 장을 제공해주며, 따라서 장르는 감독을 가두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웨스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 장르는 오랫동안 미국 건국과정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건국신화를 유포시키는 장르로 기능했지만 70년대 이후의 웨스턴은 미국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면을 드러내어 고발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주의는 결국 장르주의와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그 존재의미를 확인 할 수 있다. 만약 장르 제작이 상업적인 흥행을 지향함으로써 작가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만 기능한다면 적어도 헐리우드에서는 작가주의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장르영화가 그런 식으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한계가 창조적인 작가들에 의해서 극복되어서 장르의 관습성을 자신의 고유한 표현방식을 위한 기회로 사용한다면 작가주의는 적어도 장르주의의 한계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논쟁의 가장 커다란 공헌은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를 고급예술의 관점에서 진지한 논의의 대상에 까지 오르게 하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장면화에 대한 작가주의의 주목은 도덕적이거나 미학적 성격에 집중되었던 이전의 논의를 극복하고 영화적 특수성에 관한 분석을 위한 기초작업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는 가치평가와 이를 근거한 서열화는 비판적이고 이론적인 쟁점들이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쟁점들과 맞물리는 보다 광범위하고 초 학문적인 논쟁으로 부터 벗어났음을 잘 보여주는데 이것은 작가주의가 보여준 몰 역사적인 사유를 잘 말해준다. 사실 특정한 감독들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개성적 스타일, 퍼스낼리티를 추적하는 수색자로서의 비평작업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정확한 분석틀의 결여와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주관적인 태도는 작가주의 비평을 비 정치적이고 낭만적인 주관성의 미학으로 변질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로빈 우드와 같은 평론가들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누가 미국영화의 최고작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서열화에 대해 어떻게 보면 영화예술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칭 감식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도락적인 언쟁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가주의’ 이론이 유럽과 헐리우드의 몇몇 장르감독들을 발견해내는 데는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제작과정에서 제한된 감독의 기능을 지나치게 무시함으로써 무분별한 ‘헐리우드 숭배’ 혹은 ‘작가숭배’로 빠지는 우를 범하였다는 비판은 끝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성기에는 쉽게 확인될 수 없었던 이러한 작가주의의 한계는 68년 혁명 이후 대두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그리고 형식주의와 논쟁에서 결정적으로 구체화되었음을 이후의 영화이론사가 잘 보여주는 것이다.

 

*** 이강화 교수님의 영화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님은 전 세계의 한국 독자, 또는 한국의 교육 문화를 알고 싶어하는 세계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면을 빌어 교수님의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편집자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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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rector’s Role in the Creative Movie Artistry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영화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영화가 예술로서 본격적인 자리매김을 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예술적 장르의 한 분야로 인정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표현양식에 관한 논의보다는 표현 내용, 즉 도덕적이거나 미학적 성격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영화를 문학이나 연극과 같은 서술적 양식으로 이해하였다는 것과, 이러한 양식에 대한 전통적 비평기준이 구조적 분석이나 설명 보다는 미학적 혹은 도덕적 가치평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서구의 지식인들이 영화의 예술성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예술품의 창작주체와 관련된 문제였다. 낭만주의 이래 서구 미학이론의 주류는 창작주체로서의 예술가들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가 중심의 미학이론은 예술품을 형식적인 표현 양식에서 뿐만아니라, 예술가의 천재성이 보여주는 예술적인 비젼과 표현성의 화신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볼 때 수많은 기능인들의 철저한 분업에 의한 결합과정이라는 영화 특유의 제작방식은 어떤 위대한 영화 창작 과정 전체를 주도하고 조절하는 한 개인의 비젼과 통일된 지성의 소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영화란 결국 결과물인 고로 완전성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조립라인을 통한 합성물에 불과 하였다. 제작자가 대본과 감독과 배우들을 결정하고 이어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 그리고 편집기사, 음악 담당자, 그 외 많은 분야의 기술자들이 모여서 만들어 진다는 점에서 영화 창작에서의 진정한 주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서명하는 작품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지는 극작가나 소설가와는 달리 누가 영화라는 결과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가? 창작 주체에 관한 이러한 오래된 논쟁은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평론가들에 의해서 해결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작가주의 (politique des auteurs – 정확하게 번역하면 ‘작가정책’이 된다) 이론이다. 영화에서의 ‘정책’이라는 단어는 알렉산더 아스뜨뤽의 논평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 : 카메라 스타일” 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아스뜨뤽은 흔히 ‘카메라 만년필 (La Camera Stylo)설로 불리워지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카메라를 창조적인 감독이 자신의 사고와 감성을 표현하는 펜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정책이란 예술가 자신의 사상 표현 혹은 카메라로 하여금 삶의 철학, 세계관을 기술하기 위한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작가주의’ 이론 만큼 영화이론사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없을 것이다. 혹자는 50년대 중반에 생성하여 60년대 후반이후 그 영향력이 서서히 사라져 버린 이 이론을 전 시대의 낡은 비평방식으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논쟁의 결과들 –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 정신분석학, 형식주의 등 -들을 고려한다면 작가주의 이론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모습을 달리한 채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당시 프랑스의 소장 평론가였던 프랑소아 트뤼포는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ema) 誌 에 ‘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 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처음부터 앙드레 바쟁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소위 ‘까이에 그룹’이라고 불리우는 일단의 평론가 집단, 즉 프랑소아 뜨뤼포, 자크 리베트, 장-룩 고다르, 끌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등이 주된 기고자들이다. 이들이 나중에 모두 영화 연출 쪽으로 전향하게 됨으로서 이른바 프랑스 누벨바그 (nouvelle vague) 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트뤼포는 이 글에서 과거 추앙받던 감독들을 격하시키고 새로운 영화전통을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때까지 프랑스 예술 영화의 거장으로 인정받던 르네 끌레망, 앙리 끄루조, 줄리앙 뒤비비에, 마르셀 까르네 등-젊은 평론가들은 이들이 만든 영화를 아버지의 영화 (le cinema de papa)라고 불렀다 – 을 프랑스 영화를 망친 감독들로 단죄하였는데 그 이유는 심리적 사실주의에 탐닉하여 영화를 문학적 전통의 예속물로 만들었을 뿐, 진정한 영화의 전통은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문학적 소재를 단지 자기 취향으로 변조하기보다 특유의 생명력과 숨결을 불어넣는 로베르 브레송, 장 꼭또, 장 르노아르 등을 추앙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트뤼포를 비롯한 젊은 평론가들이 정의하는 영화작가(auteur du cinema)란 문학작품을 소재로 하여 단순히 그럴듯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자신만의 개인적 특성을 부여하는 감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인 영화의 개념, 즉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 뒤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영화의 개념을 옹호하였다. 이리하여 문학적 테마와의 상관성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이른바 ‘질의 전통’(La Tradition de La Qualie)을 거부하면서 영화특유의 표현방식이 얼마나 구사되었느냐가 영화의 진정한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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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Screen as Reflection of the Ego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1970년대의 정신분석학은 ‘기구’로서 영화가 어떻게 기능하는가에서 부터 ‘스크린과 관객간의 관계’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념들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핵심 학문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과’현대 영화이론’은 이제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더들리 무어는 영화에 나타나는 상징과 ‘기호’와 관객들에게 비치는 그들 의미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정신분석 학자들마다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분석학 이론의 사용은 실제 또는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하기 위한 진행과정의 일부로서 계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파커 테일러가 말한 이른바 ‘정신 분석적-신화적'(Psychoanalystic-mythological) 방법이라고 부른 영화 분석법 역시 이러한 현상을 두고 말한다.

한편, 사회과학에서 영화 텍스트와 영화 관객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영국의 영화잡지 ‘스크린’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알튀세와 라캉의 영향력 아래 있던 <스크린> 학파 이론가들은 관객의 주체성은 항상 언어 속에서, 언어를 통해서 확립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어떤 주체로 구성되는가를 분석하였다. 관객이 텍스트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주체로 호명 Hailing 당할때 그 호명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주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비평이론에 수용자의 주체구성 과정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스크린> 학자들은 결정론적 시각을 토대로 텍스트 속의 수용자 구성방식에만 주목함으로써 이들에게 수용자의 내면적 심리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용자의 권력에 대한 재발견을 주장하는 비판적 의견은 텍스트와의 만남을 경험하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독자는 그 텍스트 속에 묵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독자와 텍스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독자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다시말해서, 담론으로서의 텍스트가 구축하는 이상적인 독자의 위치를 모든 독자가 동일하게 택하리라는 확신이 없으므로 수용자와 텍스트가 만날 때 그 관계가 텍스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스크린파의 논지는 매우 취약한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드리, 벨루르, 메츠 등 프랑스 이론가들은 영화의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스크린 학파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차용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관객이 영화를 관람할 때 성적 차이, 언어, 그리고 자율적 자아 혹은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무의식적 과정이 수행되며 이것은 매우 일방적이며 또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드리에 따르면 영화적 장치는 그 체계와 재현의 메카니즘을 통해 독특한 위치를 생산한다. 이 위치는 이데올르기적인데 지배적인 서술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생산 과정에서의 물질적 과정을 잊게 함으로써 관객 자신이 영화 이미지에 대해 영화적 텍스트의미의 저자라고 믿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적 현실효과라는 관념론과 공모하게 하며, 보드리가 ‘초월적 주체로서의 관객’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현상은 관객이 텍스트의 의미에 의해 구성되며 영화적 장치는 주체를 텍스트의 효과로서 호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 호명개념이 알튀세의 이론에서 비롯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문화연구에 끼친 알튀세의 공헌은 그의 이데올르기개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몇가지 정의를 내렸는데 그 중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정의가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제 존재상황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그들과 그들 조건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조건간의 관계를 실현하는 방식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제 존재상황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그들과 그들 조건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조건간의 관계를 실현하는 방식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해내는 기능이 있으며 이 기능에 따라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육체적 행위에 종속되는 주체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서 광고도 호명을 통해서 기능하며 따라서 그 광고의 의미와 소비 패턴에 종속되는 주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 호명당하며 결국에는 사고 소비하고 또 사고 소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와 문화 이론, 존 스토리저, 박모 역, 서울: 현실문화연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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