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ng-Hwang Bird: Symbol of Corea and Peaceful East Asia

 

<Seoul : Prof. Jang, Gyewhang >

봉황의 나라 대고려국과 동양평화론

대고려국은 1917년 우리 역사 현장인 만주를 중심으로 한 대한국토 전역과 연해주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이었다. 이 당시 만주 일대는 무주공산이었고 조선족이 가장 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어 국가를 세우는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청이나 일본도 자국의 각자 이익에 의거 이를 승낙한 상태였는데 올해가 101주년 되는 해이며 그 중심에 정 안립과 양 기탁 등 독립투사들이 있었다.

봉황의 나라 대고려국을 설립하는데 있어서 정신적 바탕은 아마 안중근 의사가 주창하던 동양평화론을 근거로 하여 국가 설립을 주도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하여 본다. 이는 다름 아닌 대고려국을 건설 하는데 조선인만이 아닌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러시아인 등 이 지역에 함께 살아가던 모든 민족을 하나로 묶어 대고려국을 설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려순 교도소에서 집필을 하던 동양평화론과 맥이 일치 하는 것으로 동양의 민족이 한데 뭉쳐 서구에서 밀려오는 서양의 무차별적인 문물을 막아내어 동양을 철학과 정신을 지켜내자고 하는 것인데 대고려국의 설립정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대고려국 건설의 당위성은 일제의 대한국토 침략에 대한 항거이며 선열들의 얼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발로였다.

대고려국의 판도는 옛날 고구려(高勾麗)의 판도를 동남으로 줄이고 서북으로 늘린 것으로, 동으로는 장백산(長白山)으로써 한반도와 경계 짓고, 서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 야프로노보이 및 싱안링[興安嶺]으로 시베리아 및 몽골과 경계를 가르며, 남으로는 만리장성으로 지나와 구별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예상 판도는 산하이관[山海關] 이북, 장자커우[張家口] 이동의 즈리성[直隷省]과 내몽골과 성징성[盛京省]과 지린성[吉林省]과 러시아령과 지나령을 포함한 헤이룽장성[黑龍江省]과 연해주와 캄차카 전부이다. 이 지역은 옛날 정령(丁零), 견곤(堅昆), 숙신(肅愼), 옥저(沃沮), 말국(靺鞫), 부여(扶餘), 동호(東胡) 등의 여러 민족이 유목하던 땅이다.

봉황의 나라대고려국

대고려국 건립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고유의 판도를 설정하고 수도는 발상지인 간도로 정하였으며, 대고려국의 국기는 이미 제정된 건국규약의 헌장과 함께 어엿하게 존재하고 있다. 국기는 남색 바탕에 하얀 우물 정() 모양을 꿰뚫어놓고 중앙에 황색 곡옥 두 개를 포합(抱合)시켜 원구(圓球)를 만들고 그 원구로부터 홍색(紅色)의 오광(五光)을 팔방으로 나란히 내고 있다. 또 대고려국은 현대의 부패한 사회제도를 뿌리부터 파괴하고 먼 옛날 무위(無爲)로서 교화하는 제도로 돌아가 토지의 국유를 실시하고, 정전(井田)의 법을 시행할 터이므로, 깃발은 우물 모양을 표상으로 하여 이것으로 정전의 의미를 나타냈다.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한 법을 제정했는데 국가의 건국 규약은 소위 법3장으로 간단 명료하였다. 이 규약으로 형사, 민사의 재판은 물론 교통, 통신, , , 상 등 인간 세상의 필수 법칙을 모두 통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 쳬계 이외에도 국가로서 필요한 옥새 등을 만들어 국가의 기본 틀을 만들어 동양의 중심 국가로서 자리 메김을 하려고 준비를 한 것이다.

대고려국새(大高麗國璽)

이 당시 상해 임시정부도 함께 참여를 하는 것으로 계획을 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건국의 간부와의 교섭은 조선에 있는 권중관(權仲觀)이 이를 전담하고 있고, 상하이에 있는 지나인 간요우런[干右任]이 중개역을 맡고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건국의 군정부가 간도에 수립되자마자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여기에 참가하고자 준비 중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도 원래 자금은 없고, 내외의 평판은 나쁘고, 만사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정부 인사들은 모두 다 해산하여 간도로 갈 것을 바라고 있었다.

대고려국 건설은 유림에서 앞장을 섰다. 유림들이 나선 이유는 그들의 심사를 해부하면 대략 다섯 가지의 반일 이유가 발견된다. 첫째는 국모의 참혹한 죽음이고, 둘째는 병합이 강압적이었다는 점이며, 셋째는 양반 계급의 철폐가 급격했다는 것이고, 넷째는 합병 이후 일본인이 변함없이 선인(鮮人)을 경멸한다는 것이며, 다섯째는 일본보다는 유럽, 미국 쪽이 훨씬 강대하고 문명이며 관굉(寬宏)하다고 하는 사대주의이다. 이처럼 유림들이 나서서 일본의 횡포에 대항하는 방법론으로 대고려국 건설에 앞장을 섰으며 서서히 민주공화국으로 고국을 회복하려 한 것이다.

이 당시 유림의 중심인물에는 만주에 있는 배일 선인의 수령을 들면 류허현[柳河縣]에 전 한국 법무국장이었던 경성의 이시영(李始榮)이 있었다. 그는 양반이다. 지린[吉林]에는 똑같이 양반으로 경기도 사람인 정안립(鄭安立)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대고려국 건국에 열중한 사람으로 배일의 기상은 잦아들고 있었다. 류허 현에 있는 호걸 중에는 경기도의 양반으로 전 의병대장이었던 이범윤(李範允)과 전 참령(參領)이었던 함경의 이혜휘(李惠輝), 의병대장이었던 경기의 양반 홍범도(洪範道)와 이시영의 참모였던 경성의 양반 이동녕(李東寧)과 이씨의 사령관이었던 경성의 평민 장봉한(張鳳翰)과 경성의 양반, 의병 사령관 조욱(曹煜)과 황해도 주민으로 의병 수령인 조맹선(趙孟善)과 경상도 주민 이상룡(李相龍), 같은 도의 의병 수령 윤세복(尹世復)과 평안도의 주민으로 의병의 필두(筆頭)인 이탁(李鐸)과 경상남도의 토판(土辦)1)으로 의병대장인 허혁(許爀)이 있었다. 서간도에는 평안도의 양반인 양기탁(梁起鐸), 함경남도 주민으로 의병 사령관이었던 이홍주(李鴻周)와 출처 불명의 이세영(李世榮)이라는 인물이 활약하고 있었다.

북간도에는 충청도의 토변(土辯)으로 공주(供州)2)의 의병인 이규(李珪)와 충청도의 토변(土辨)으로 의병인 이종택(李鐘澤)과 경성의 양반으로 학사(學士)인 김교헌(金敎憲)이 있었다. 무쑹[撫松]에는 함경남도 사람으로 의병 사령관인 김호익(金虎翼)과 경기도 양반으로 의병인 성호(成浩)가 있었다. 지린[吉林]에는 수원의 양반 맹동전(孟東田)과 경기도의 토판으로 의병인 김붕(金鵬)과 경성의 양반생계회(兩班生計會) 회장인 여준(呂準)과 경기도 사람 박순(朴純)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쓰한뇬(ツハンニヨン)3)에는 평안도 주민으로 참령이었던 유동열(柳東悅)이 있었다. 무위안[木猿]에는 황해도 주민으로 이토 공[伊藤公]4)을 암살한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중칠(安重七)이 있었다. 창바이 부[長白府]에는 함경도 양반으로 의병이었던 오주환(吳周煥)이 있었으며 상하이에는 경기도 토판으로 의병인 신규식(申圭植)과 충청도 토판으로 매일신문(每日新聞)의 주필이었던 신채호(申采浩)와 안조한(安照漢)과 신종홍(申宗洪)과 김복(金復)과 여직지(呂直之)와 현() 아무개와 명() 아무개가 활약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에는 문창범(文昌範)과 보병 참령이었던 이동휘(李東暉)가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재향(崔在享)과 김규식(金奎植)과 안창호(安昌浩)가 있었다. 하와이에는 이승탈(李承脫)이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는 구짓쿠 기넨(クヂツク·キネン)과 안건근(安健根)이 있었다. 이들 인사들은 모두 극단적인 반일주의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일본에 대해 저항, 방해를 시도하고 있었으나, 스에나가 씨의 대고려국 건설을 듣자 흡연(翕然)하게 대고려국의 둑()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처럼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던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이 대고려국 건설에 앞장서고 있었으며 이는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되어 이 지역에 문화를 가지고 살아왔던 이민족까지 포함하여 고구려의 고유한 판도를 되찾아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기본질서는 아마도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이 기초가 되었을 것이며 인본주의에 의한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꿈꾸었을 것이다.

대고려국 건설에 함께 하는 한국역사영토재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꿈을 인지하고 대한국토에 매이지 말고 잠재적 영토관으로서 저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꿈꾸어야 할 것이다. 비록 시대상황으로 대고려국의 꿈은 그 당시 이루지 못하고 계획으로 끝이 났지만 우리의 정신과 마음속에는 항상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覺永堂 學人

靑島 장계황 / 行政學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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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cy is Korea’s Rice and Life (이선훈 박사의 일본에서 한국을 말하다)

<Japan : Prof. Lee, Sunhoon>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밥이며 생명입니다

박근혜의 탄핵과정에서 대통령 직무대행이던 황교안, 국가안보실장 김관진, 국방부장관 한민구와 새누리당의 잔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에 의해서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던 사드의 조기배치로 발생했던 중국의 경제보복조치가 정리되어 안정적인 한중관계의 구축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최근에 확대조정된 3%를 넘어서서 3.5%에도 육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필자는 유럽중앙은행의 금리인상, 미국 FRB의 금리인상에 이은 자산매각, 원유가인상에 따른 글로벌 경기회복으로 올해의 경제성장률 3%는 무난히 달성할 것이며, 여기에 문재인정부의 소방, 경찰 등의 공무원확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 그리고 복지확대정책이 효력을 발생시키고 북한문제와 관련된 사드조기배치에 의한 중국의 경제보복조치와 전쟁위험이 감소된다면 3.5%의 달성도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자의 예상은 문재인정부의 외교정책이 한반도의 전쟁방지와 비핵화를 일관성 있게 추진하며, 국제적인 신뢰를 회복하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낼 것이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 간의 불필요한 감정싸움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으며, 일본의 아베는 자신의 부정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한반도 전쟁위기고조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은 크게 호전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또한 문재인정부의 일관성 있는 외교정책으로 극복할 수 있으며, 조만간에 북미협상과 남북협상을 통해서 대화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협상으로 한반도 전쟁위기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개성공단의 재개와 남북경제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부족한 소방, 경찰 등의 공무원인력의 확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을 순조롭게 진행함과 동시에 최저임금의 인상과 복지정책의 확대로 가계소득을 확대해간다면. 내년도 2018년에는 4%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2018년에 4%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한다면, 세수의 확대로 더욱 가속적인 복지와 가계소득증가를 위한 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명박근혜의 9년간, 정권의 극심한 부정부패로 국가예산은 낭비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리한 부동산경기활성화를 시도하여, 가계부채가 급상승하고 내수경기는 침몰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업률은 급상승하였으며, 빈부격차는 극한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촛불혁명을 낳았습니다.  국민이 직접 나서서 수렁에 빠진 국가를 다시 부흥,재건하고자 하는 의지로 결집된 국민행동에 나서게 했던 것입니다. 촛불혁명은 헌법에 근거한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부정불법한 박근혜를 탄핵하였습니다.

이어진 대선에서는 이명박근혜의 9년간의 마치 북한의 세습일인독재와 같은 부정불법한 독재행위를 비호하며 국가를 혼란에 빠뜨려왔던 새누리당의 잔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그리고 정권을 잡기 위한 일념으로 하위사실의 조작을 일삼던 국민의당의 선전선동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을 제19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반독재정권을 탄생시켰습니다. 문재인정부를 민주정권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문재인정부가독재추종세력에 의해서 저질러져 왔던 이명박근혜의 9년간의 악질적인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독재추종세력의 근간인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되어 군사독재로 이어져오던 제왕적이고 세습적은독재를 추앙하며 국가를 혼란에 빠뜨려 왔던 정치세력과 이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국민을 착취해왔던 재벌들의 부정불법한 전횡을 뿌리뽑아야만 진정한민주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 국정감사에서 공안검사출신인 방송문화진흥회의 고영주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평상시의 행동대로 하였다면 대한민국은 적화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런 고영주의 발언은 단지 고영주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란독재를 막기 위해서 인류가 궁리하고 고민하며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 온 제도입니다. 고영주와 고영주를 내세워 공영방송을 장악해왔던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상대어가 공산주의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또 이런 무지한 논리로 국민을 거짓과 허위로 선동하려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상대어는독재입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대문에, 고영주를 내세워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며 독재를 정당화하려는독재추종세력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영주와 그 일당인독재추종세력들이 말하는 공산주의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도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며, 북한은전제적인 세습독재국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고영주와 그 일당은 북한과 같이 공영방송을 장악하여 정권의 선전성동의 도구로 삼고, 국정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정권의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세뇌공작을 획책하며, 정권에 아부하는 특정세력에게 부정부패를 허용하는 행위를 자행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대한민국을 북한과 동일한전제적인 세습독재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올해 2017년에 3.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하고, 내년 2018년에는 4%를 능가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며 이러한 성장세를 확대하고 국민이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문재인정부는 적폐를 척결하여 온전한 민주정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평화적인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도 한국의독재추종세력을 척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독재추종세력이 남한과 북한에서 자신들의 부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존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의 종식은 오직 한국에서독재추종세력을 척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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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Sa Ik : 3-Star Korean General in Imperial Japanese Army was still Anti-Patriotic

<Japan : Prof. Lee, Sunhoon>

일제식민시대의 한반도 출신 일본군 육군중장 홍사익

홍사익(洪思翊)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출신의 일본육군군인으로서 조선의 왕족이었던 이은(李垠)과 함께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한반도출신으로서 가장 높은 계급인 중장에 오른 인물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에, 전범으로서 필리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889년 조선시대의 경기도 안성의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홍씨입니다. 일본에 의한 한반도지배가 사실상 시작된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9년에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됨에 따라서 일본의 중앙유년학교에 국비유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한 후에, 곧바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는 대한제국으로부터 파견유학생이 몇 명 재적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그 충격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홍사익은 “지금 궐기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을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실력을 쌓은 후에 투쟁에 나서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14년 25세에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742명중 31등(26기)으로 졸업하고, 육군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동경에 본부를 둔 제1사단 제1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34세인 1923년에는 육군대학교(35기)를 졸업하였습니다. 일제식민시대에 육군대학교에 입학한 조선출신은 이은, 이건(李鍵), 이우(李鍝)의 3인과 홍사익을 합한 4인이 전부이며, 홍사익 이외의 3인은 모두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던 조선의 왕족들이었습니다. 36세인 1925년에는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전사편찬에 임했으며, 40세인 1929년에는 육군 소좌(한국의 소령에 해당)가 되었고, 42세인 1931년 8월에는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재직하였으며, 44세인 1933년 4월에는 관동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에 고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때에, 봉천군관학교(奉天軍官學校: 만주국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함)를 지도한 이외에, 군관학교의 모집대상에 만주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이전까지 만주국군 장교의 자격으로는 일본인, 만주인, 연안계조선인에 제한되어있었지만, 처음으로 조선인 이민자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 45세인 1934년에는 육군보병 중좌(한국의 중령에 해당)가 되었고, 47세인 1936년까지 관동군사령부 참모부에서 근무했습니다.

홍사익은 대한제국군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동료이던 한국광복군 사령관 지청천(池靑天)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조선의 독립에는 아직 시기상조이며 지금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지청천의 권유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청천을 포함한 대한제국군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들과 비밀스럽게 우정을 유지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가족을 자비로 지원하였으며, 창씨개명이 단행되었을 때에도 최후까지 개명하지 않았다고 하며,  홍사익은 일제식민지 상태에 있는 조선인의 입장을 ‘영국에 있어서의 아일랜드인과 같은 상태’로 자신의 아들에게 설명하였고, 고종황제가 하사한 대한제국의 군령을 생을 다할 때까지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도 있습니다.

1936년에 육군보병학교의 교관으로 전근하고, 38세인 1937년에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12월에 중국에 파견되었고, 1938년 3월에는 대좌(한국의 대령에 해당)로 승진하여 흥아원조사관이 되었고, 상해의 화중연락부에 배속되어 정보수집과 정치공작에 종사했습니다. 흥아원조사관이란 원래 문관에 해당되지만, 당시의 군의 권한확대에 의해서 군인이 배속되게 되었습니다.

41세인 1940년 8월에는 제1사단 사령부에 배속되었고, 42세인 194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해서 화북의 하북성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 108 부대의 여단장이 되어, 화북의 팔로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팔로군 산하에는 조선의용군의 화북지대가 있었지만, 같은 해 12월에 후지아주앙(胡家庄)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공격을 받아 주요한 대원들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43세인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는 육군공주령학교의 간사(부교장에 해당)로 재직했습니다.

45세인 1944년 3월에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했고, 같은 해 10월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12월에는 필리핀 제14방면군 병참감이 되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을 맞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홍사익이 평생 고대하던 조선해방의 순간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인 한반도에서 교사로서 조용히 살기를 갈망하였지만, 결국 홍사익은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을 수는 없었습니다.

연합국으로부터, 포로수용소장 시절에 식량부족 때문에 포로에게 충분한 급식을 하지 않은 책임을 추궁 당하자, 군인으로서 자신의 죄상에 대해서는 일체의 변명과 증언을 하지 않은 반면에, 다른 전범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변호를 펼친 것으로 재판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당시 한국국내에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언론에서 구명운동을 펼쳤지만, 끝내, 마닐라군사법정에서 전범자로서 1946년 4월 18일에 사형판결을 받아, 같은 해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66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인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의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홍사익의 묘는 유품을 담은 빈 관과 함께 부인 조씨의 묘 옆에 조성되었고, 비석은 1947년 4월에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부인 조숙원은 오랜기간 병상에 누웠다가 1943년에 병사했으며, 첫째 아들인 홍국선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1984년에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둘째 부인 이청영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이청영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 홍현선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거주했지만, 한국전쟁후에 친일파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로스엔젤레스에서 유학을 하였으며, 1978년에 교통사고로 로스엔젤레스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언론인 송건호는 홍사익에 대한 비판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송건호의 홍사익에 대한 평가에 의하면 ‘일본의 한국민족에 대한 식민통치는 한국민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한국인을 한국민족이라 부르지 않고 ‘반도인’이라고 했으며 일본을 ‘내지’라고 추켜세우는 판이었으므로 한국인으로서는 같은 동족이 중장까지 승진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민족적 긍지를 높혀주는 구실을 했으며 홍장군을 친일파로 욕하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제시대의 홍장군을 보는 눈과 해방 후에 홍장군을 평하는 가치판단은 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송건호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홍사익이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중장까지 진급한 것은 순수하게 홍사익의 능력이 일본인에 비해서 월등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민족적인 긍지로서까지 해석하는 것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제식민시대에 일본이 한국민족을 철저하게 비하하고 노예와 같이 혹독하게 다루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홍사익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일제식민시대를 미화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용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배의 미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사익이 자신의 출세를 자신의 월등한 능력에 의한 결과인 것으로만 생각했다면, 여러 번의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살았던 친일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그렇게 혹독한 평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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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14<은우근 교수>

<Gwangju : Prof. Woogeun Eun>

역사는 “단지 돌아보고, 회상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며, 미래에 어떤 방향성을 부여할 것인가를 질문 속에서 역사를 재해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계(Limit)는 곧 경계 (boundary)다. 우리가 너와 나를 구별해서 인식하는 것은 경계 때문이다. 우리는 구별하는 인식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경계는 나와 너, 나와 우리 그리고 나와 신 사이를 구분짓는다. 따라서 나와 나의 타자가 서로 만나기 위해 경계는 우리가 넘어야 할 한계이기도 하다. 죽음의 공포, 이기심, 게으름, 등 무엇이 경계를 구성하든 지 간에 그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경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80년 5월 27일 해방광주의 마지막 새벽, 5월민중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이 도시에서 난 한 번도 주인으로 행세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주인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 한 셈이다. 5월민중항쟁 초기인 5월 18일 이후 며칠동안, 5월민중은 공수부대의 압도적 폭력이 유발한 죽음의 공포라는 절대적 한계를 넘어서 생명 공동체를 이룩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어둠속에 울리는 마지막 가두방송을 들으면서도 집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5월민중은 공포라는 한계안에 갇힌 자신을 다시금 발견했던 것이다.

5월민중의 자부심은 바로 이 한계를 한 때나마 넘어서 이룩한 신비로운 생명공동체에 대한 긍지였으며, 동시에 그들의 부끄러움은 이 한계를 온전히 넘지 못함으로서 동지의 긴급한 연대의 호소를 외면한, 경계 앞에 선 자신에 대한 반성의식이었다.

누가 이름없이 죽어간 전사들의 죽음을 깊이 간직하고 있겠는가? 그들이 속한 계급은 여전히 이 도시에서 배제되고 있지 않은가? 우람한 규모의 기념탑이 망월동 국립묘지에 우뚝 서 있는 지금 이 도시의 진정한 누구인가? 5.18당시 우리가 넘지 못한 경계는 무엇인가? 역사의 진보가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실천’을 통해 이룩된다면, 지금 우리가 넘어야 할 경계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노력 속에서 5.18의 영성화의 실마리도 잡히지 않을까.

지난 14회동안 광주대학교 은우근 교수님의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을 통해 지난 37년전의 광주로 시간과 공간 이동을 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에서 필자를 비롯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2000년 전, 새벽에 닭이 세번 울었을 때 고뇌하고 번민하는 베드로의 죄책감이 함께  떠 오르기 때문이다. 믿었으나 함께 하지 못했던 죄책감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에 화인된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스피커로 들려오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할 것을 외치던 시위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뿌리친 결과는  수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계엄군에 의해 자유에 대한 의지와 권리를 한 동안 찾을 수 없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연합하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이불을 덮어쓰고 구석진 방에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 은우근 교수님, 비록 행복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지난 37년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여행이었습니다.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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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13<은우근 교수>

<Gwangju : Prof. Woogeun Eun>

반성을 통한 행동하는 시민 의식의 부활_ 촛불 혁명으로 불타 오르다

5월 민중항쟁을 통해 국가 폭력의 만행을 뼈저리게 느꼈던 민중들은 다시는 그러한 일들이 발생되지 않게 하기 위해 퇴보가 아닌 발전하는 역사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투쟁, 30년이 흐른 뒤, 이명박 박근혜의 실정에서 허덕이던 국민들이 장장 6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촛불을 들어 국정농단으로 국민들을 우롱하고 국위를 땅 바닥에 내 팽개친 정부를 심판하기에 이른것이다.

5월 민중항쟁은 타자에 대한 감정 이입적 이해 능력.공감 능력이 대중들 사이에 최고로 고조된 공동체의 체험이었다. 이 공동체적 결속은 신군부의 폭압을 일시적으로 극복했다. 그것이 신비로운 공동체의 실현 곧 해방광주다. 해방광주에서 민중은 잠재된 능력을 스스로 확인했다. 따라서 해방광주는 하나의 깨달음이자 깨달음의 실천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 실천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끄러움은 죄책감, 부채의식으로 남았다. 하지만 죄책감과 부채의식이라는 역사 의식을 지닌 민중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민중은 한 덩어리로 싸우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형성했다. 그 근거는 역설적이게도 부끄러움이었다. 그것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이었다. 5월민중항쟁 이후, 10년이 지난 90년까지도 부채의식이 살아 있는 한, 5.18은 계속되는 현재였다.

5월민중의 부끄러움은 반성 능력으로서의 자의식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해 그들이 나 대신 죽었다는 의식이다. 부끄러움이라는 도덕 감정은 일종의 도덕적 염치 곧 도덕적 반성 능력을 강화 시켰다. 부끄러움을 느낄 때 우리는 적어도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숨은 아담과 하와처럼,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인간은 신과 역사앞에서 뻔뻔해지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메꾸고자, 부족함을 반성하고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5월민중은 나 안에서 부족함을 발견했으므로 겸손할 수 있었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서로 연대했다. 부끄러움은 역사의식으로 작용한 것이다.

5월민중은 5.18의 고난을 통해 역사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진 인간, 반성적 성찰이 가능한 인간, 역사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 민중 대다수는 특별한 변혁적 사상, 이념의 체계로 무장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슬픔, 고통, 절망을 깊게 함을 느낄때 역사는 전진한다.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인간, 그 고통을 끝까지 끌어 안으려는 실천이 역사를 앞으로 가게 만들 수 있다. 5월 민중의 위대한 항쟁은 그것을 증명했다.

신군부의 억압은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억압 당하는 민중이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 죄책감, 부채의식이라는 오래 유지된 역사의 질문이 인간을 변화시켰고,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로 구원한 것이다. 역사의 변화와 인간의 변화는 상호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누리는 주체의 각성과 그에 따른 실천의 수준만큼 전진한다. 역사의 발전은 인간의 성숙이라는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각성된 새로운 인간형이 역사 발전의 주체이다.

5월 민중항쟁과 그 이후 10여년 간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은 우리 밖에 명확히 존재했다. 과거 80년대 사회의 민주적 발전의 장애가 우리 밖에 있었다면 이제 그 한계가 상당 부분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음을 자각하는 도덕적 반성 능력의 회복이 필요하다.

역사의식을 가진 민중은 항상 역사 안에서 살아있는 현재를 체험하고 질문을 찾아낸다. 5.18 이후 5월민중은 부끄러움, 죄책감, 부채 의식을 통해 이 질문을 함께 지니고 있었지만, 어느새 이런 역사의 질문이 휘발되어 버렸다. 신과 역사 앞에서 내가 떳떳한가라는 물음이 중단될 때 반성과 갱신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실종된 5.18이고, 우리가 다시 5.18로 돌아가야 할 이유이다. 5월 민중항쟁을 단지 미화하거나 추상화하는 것은 참다운 계승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의 반성과 결부되지 못하며 따라서 미래를 향한 질문과 과제를 과거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5.18로 돌아가되, 5.18에 머물러선 안된다. 5월민중항쟁에서 이룩한 아름다운 공동체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할 미래에 있다. 2016년 촛불 혁명에서 보았듯이 아름다운 5월항쟁의 공동체는 36년동안 세월을 지나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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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zing the Negative Press Reactions on Pres. Moon’s Foreign Policy Announcement <이선훈 박사, 일본에서 한국을 말하다>

<Japan : Prof. Lee, Sunhoon>

6월 21일,

문정인 외교특보의 발언에 대한 부정반응의 평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정인 특보의 발언에 대한 한국의 일부 언론, 새누리당의 잔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그리고 이들의 패악을 이용하여 문재인 정부과 더민주에게 권력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국민의당은 격렬한 비난을 표시하며 국민을 선동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한미외교를 미국에 대한 복종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친미사대주의에 몰입한 나머지 진정한 한미외교가 어떻게 행해져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며, 한미방위조약을 포함한 한미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갖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행위를 당연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에 대북관계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협상과 결정에서 미국, 중국, 북한, 일본, 러시아에 의존해 왔습니다.

한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에 있어서 최대의 위험을 느끼고 있으며,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신속하게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의 이익에 종속되어 이명박 정권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박근혜 정권에서는 개성공단을 폐쇄와 더불어 북한과의 모든 대화통로를 차단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미.일 군사정보 교환협정의 체결을 기화로 한일간에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던 일본군 종군 위안부문제인, ‘소녀상’의 철거를 주장해오던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여, 한일 위안부 협상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압력을 통해서 이루어 내었습니다. 2011년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소녀상’은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를 한국의 허위와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군국주의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오던 일본의 아베정권에 대해  일본군국주의의 전쟁범죄와 여성인권문제의 참상이 세계적인 화두로 등장시킨 한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외교할동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며, 일본의 아베정권과 한일 위안부 협상에 합의하여 최대의 외교실정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에 따라서 일본의 아베정권는 군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전쟁범죄에 대한 역사를 왜곡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침략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만들어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가속화시켰고, 박근혜 정권은 ‘소녀상’의 철거를 주요내용으로 한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이러한 일본 아베정권의 야욕을 실현하는 것에 가장 강력한 도움을 주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전시작전권의 환수를 무기한 연기하며, 한미군사훈련을 확대해왔고, 미국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비용의 일부를 일본에게 부담시키기 위해서 한일 위안부 협상의 강요하며 한미일 군사정보 교환협정을 성사시켜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허용해주는 상황을 형성하였습니다.

박근혜의 탄핵으로 정권교체가 예견되던 제19대 대선을 앞두고 사드를 조기배치하여 미국본토방위를 위한 미사일방위체계인 MD system을 완성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MD system은 강력한 X-Band 레이더와 요격미사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격미사일은 그 성능이 아직 정확히 입증되지 않는 상황에 있으며, 2017년 5월 30일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공격에 대비한 요격 훈련에 성공했다고 미 국방부가 밝혔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요격미사일은 한국에 배치된 요격미사일과는 다른 신형무기로서 한국에 배치된 요격미사일 보다 성능이 훨씬 향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사드 레이더기지가 2006년에 일본 북부지역의 아오모리껜 샤리키와 2014년에 일본 중부지역의 쿄오토오후 교가미 사키에 설치되었으며,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X-Band 레이더만을 설치하고 요격미사일은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요격미사일이 없는 사드레이더의 설치를 보면, 미국은 미국본토방위를 위해서 요격미사일 보다는 X-Band 레이더를 동북아시아 지역에 설치하는 것이 목적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도 아직 성능이 검증되지 않은 요격미사일을 설치하지 않더라도 기존에 설치되어 있는 페트리어트 등의 요격미사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사례를 통해서 명확해진 사실은 미국은 X-Band 레이더를 설치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며, 요격미사일의 설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에 반해서 한국의 경우에는 X-Band 레이더와 함께 요격미사일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방어시스템인 것으로 강조하며, X-Band 레이더의 설치에 극력 반대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극심한 반발에 대응하고, 한국에서 격렬하게 일고 있는 사드배치에 관한 찬반논쟁에서 찬성세력에게 북한 미사일에 대한 요격미사일이 배치는 현재와 같은 한반도의 전쟁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쳐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사드배치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일본국민에게 한국이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해서 사드배치를 조기에 결정할 정도로 극단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일본국민에게 강력하게 인식시켜, 일본의 아베정권이 평화헌법의 개정으로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순조롭게 진행하려는 의도와 함께, 미국과 함께 중국의 태평양진출을 차단하여,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마저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의 성장속도를 지연시키고, 그에 따른 군사력의 확장을 막는 것이 주요한 목적입니다. 즉,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북한, 중국, 러시아의 3국과 한국, 미국, 일본의 3국이 편을 갈라서 대립관계를 이루는 ‘신냉전체제’의 최전선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국의 사드조기배치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의 제19대 대선에서 사드배치에 찬성하지 않는 문재인 정권으로의 정권교체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미국의 이런 의도에 편승해서 대선에서 한일 위안부 협상의 폐기 또는 재협상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문재인 정부의 대선승리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나타내었으며, ‘신냉전체제’로 남북대치상황을 고착화하여 일본이 1998년 이후에 일본의 새로운 경제성장동력으로 간주하고 있는 시베리아 공동개발을 한국에게 선점당하지 않기 위한 술책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를 고려해볼 때,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한반도의 고조되고 있는 전쟁위기를 완화시켜, 한반도의 평화상태를 유도해내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필수적인 것이며, 이를 위해서 남북회담을 이끌어내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정인 외교특보는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회에서, “북한인 핵과 미사일실험을 중단한다면, 미국과의 협의 하에서 전술핵무기의 배치와 한미합동훈련을 축소 조정할 수도 있다”고 발언을 하였습니다. 문정인 특보의 발언은 한미정상회담에 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철폐로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남북대화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서 위와 같은 조건을 예시함으로 미국의 의향을 타진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문정인 외교특보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일부 언론,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은 한미군사동맹을 파괴하는 발언이며, 미국을 격노하게 하여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더욱 고조될 수 있는 반국가적인 발언’이라고까지 혹독한 매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전혀 터무니 없는 억지주장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이미 미국은 비공식적인 채널로 북한과 협상에 임한 바가 있으며,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이 핵무기의 실험을 중지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북한의 현체제를 위협할 의사는 없으며, 성실하게 회담에 임하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핵도발이 중지되고 대화에 나서는 경우에 북한의 핵무기 실험에 대해서 강화해왔던 대북위협수단들을 축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문정인 외교특보의 발언은 미국을 격노하게 할 문제도 아니며, 한미동맹을 무력화시킬 내용도 아닌 당연한 발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정인 외교특보의 발언에 대해서 격렬히 매도하고 있는 일부 언론,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의 발언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대화의 필요성제기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이며, 남북대치상황을 고착화하여,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저하시켜, 이를 국내정치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의 이런 격렬한 반발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외교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친미사대주의의 발현이며,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강화시켜주는 친일적인 발상에 기본을 두고 있는 반국가적 행위로 단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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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7<은우근 교수>

사진: 윤태호 기자

<Gwangju : Prof. Woogeun Eun>

8)”광주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5월 민중의 장엄한 싸움은 일단 패배했으나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싸우다 우리를 대신해 죽은 열사들에 대한 하나된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리고 부채 의식으로, 또 함께 투쟁했던 긍지 안에서 이미 싸움은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18 구속자 가족들이 1981년 가장 먼저 외쳤다. “광주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 이 나라에 진정한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는 양심의 공화국이 세워지지 않는 한 양심과 정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제도와 권력의 폭압 밑에서 공공연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한 광주 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82년 5.18을 맞아 천주교 광주 대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함세웅 신부는 1985년 5.18 추도 미사에서 “광주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2. 부끄러움 또는 질문

5월민중과 사제들에게 나타난 부끄러움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느낌(feeling)이 아니었다. 감정과 이성의 전통적 이분법에 따를 때 감정은 도덕적 판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니만 감정, 정서는 이성의 표현이다. 도덕 판단에서 감정 이입이 매우 중요하다. 감정 이입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 능력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능력, 곧 “감정이입적 이해력”(empathic understanding) 이다. 이 점에서 부끄러움은 하나의 도덕 의식을 반영한다. 감정이입적 이해력은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으로서 공동체적 연대, 사랑의 능력과 직결된다.

80년 5월 19일, 카톨릭 센터 6층 집무실에서 윤공회 대주교가 느낀 가책은 미친 폭력의 만행에 대한 공포와 무력한 자신에 대한 역사 앞에서의 부끄러움이었다. 사제로서는 신 앞에서의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자의식으로서 이 부끄러움은 자신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신과 역사가 던지는 질문이었다.

5월민중과 사제들은 국가 폭력의 잔인성을 날것으로 목격하며,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어떻게 행할 것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그 질문은 삶 전체로, 때로는 박관현(1953-1982), 김의기(1959-1980), 김태훈(1959-1981), 신영일(1959-1988) 등에서 보듯이 생명을 바쳐 응답할 것을 요구했다.

5월민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5월 26일 광주를 ‘탈출’하는 김성용 신부 역시 같은 질문을 안고 있었다. “이 순간 이 장소를 뜨면 도망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비겁한 신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라고. 그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여러 사제들에게 5월민중항쟁의 진상을 전하며 같은 질문을 늘 간직했다. 여러 차례의 사제단 성명서와 강론 등에 나타나듯이 투옥되거나 연행되지 않은 다른 많은 사제도 이 질문을 항상 품고 있었다. 이 [카]톨릭 사제들에게 역사 앞의 부끄러움과 신 앞의 부끄러움은 분리되지 않았다.

이 부끄러움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그 날…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부름을 받은 총학생회장으로서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 죽어간 영령들에게, 또 죄없이 끌려가 고문을 겪은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총학생회장으로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 “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들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 라고 부끄러움을 거듭해서 토로하고 있다.

같은 시기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었던 양강섭은 ” 내 친구들이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에 쓰러져 가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에 심한 혐오감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고통스러움과 죄책감…” 속에 있었다고 고백한다.(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5월 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529)

80년 가을 필자는 광주지역에서 예비군 훈련에 참여했다. 첫날 자기 소개 시간에 한 예비군이 30여명의 소대원들 모두에게 대뜸 큰소리로 “비겁한 사람들! 살아있으니까 만나네요” 라고 말했다. 그는 공수부대 하사관 출신으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죄책감은 이처럼 5.18이후 사제들과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평범한 민중 사이에 공유되었다. 이처럼 자발적인 반성적 의식으로서 부끄러움이 집단적으로 출현했으며, 그것이 지식인 또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뿐 아니라 기층 민중에게 일반화되었고 장기적으로 유지되었다. 5월 민중의 정서로서 부끄러움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5월민중항쟁에서 국가 폭략의 폭압적인 행사를 겪으면서 특정 시기에 집단 정서로 형성되었다.

둘째,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10여년 이상 장기간 지속되었다.

셋째, 억압에 대한 저항과 좌절, 고립이라는 민중의 집단적 체험 과정에서 부채의식, 죄책감 같은 연관된 정서로, 한편 자부심과 긍지 같은 일견 모순된 정서로 표현되었다.

신진욱은 테일러(Charles Taylor) 의 연구를 토대로 도덕 감정이 “강한 도덕적 가치판단” 곧 고도의 도덕적 의식의 산물이고,  “성찰성”, “심층성”, “사회적 배태성” 이라는 세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요약한다.

성찰성은 반성능력과, 심층성은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과, 사회적 배태성은 사회. 문화적 자산과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월 민중이 함께 지녔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다.

부끄러움은 심리적으로는 우리의 자아를 반성하는 의식으로서 하나의 자기의식 (Self-consciousness), 자기에 대한 의식이다. 자기를 객관화, 대상화 시킨,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의식이다. 자기를 반성하는 의식은 곧 자신의 현재 삶의 정당성에 대한 자기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 자체는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므로 자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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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lelight Protest Continues: Seeking Direction of Civil Rights Movement? For Whom? Why?

<Seoul : Prof. Kim, Kwangsik>

23차 촛불범국민행동 “촛불개혁과제 실종, 대선주자에 경고”: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맞습니까?”

대선전 마지막 촛불이 4월 2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타올랐다. 23차 범국민행동의 날 “광장의 경고! 촛불 민심을 들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집회에서 5만여 시민들은 촛불개혁과제들이 실종된 데 대해 대선주자들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사회를 맡은 ‘박근혜정권퇴진 범국민행동’ 김덕진 대외협력팀장은 본 행사의 진행에 앞서 “선관위가 퇴진행동에 경고 공문을 보내왔다”며 이는 “이날 집회가 선거법을 위반할 위험이 매우 높으니 지켜보겠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이번 이 대선을 과연 누가 만들었나”고 반문하며 “광장에 모인 촛불 시민이 만든 대선입니다. 그런데 감히 누구를 감시하고 경고하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본행사가 시작되자 ‘대선에 바란다’는 주제로 촛불혁명 완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마이크를 잡은 인천 효성고 3학년 김현모 군은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투표권이 없는 저희 청소년들을 위해 대변인이 되어 선거에 임해달라”며 “빼앗긴 청소년들의 투표권을 어른들인 여러분들이 올바르게 대변해달라”고 당부를 했다. 김 군은 언론인들을 향해서도 “현재 중고생들의 대선 주자 지지율을 최대한 면밀히 조사해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해달라”며 “비록 (여론조사에 실제로)반영이 되지 않더라도 국민과 대선주자가 알 수 있도록 보도 해달라”고 덧붙였다. 원불교 성주성지수호 비상대책위원회 강해윤 교무가 무대에 올라 규탄 발언을 이어갔다.

강해윤 교무는 사드배치 철회를 촉구하며 현재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여 이날로 단식 3일째를 맞았다. 그는 “그날 새벽 성주 김천으로 통하는 모든 길은 봉쇄되었으며 마을안 골목까지 막아선 경찰은 주민 움직임마저 통제했다”며 “마치 계엄령이 내린 것과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강 교무는 “대통령 없는 데서 대통령 노릇하는 황교안과 주인 없는 청와대에서 주인 행세하는 김관진을 비롯한 적폐세력들이 아직도 여전히 국민을 짓밟고 있는데 아무런 정치적 제어가 작동하지 않고 오로지 대선에만 몰두해 있는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뭐가 더 나아질까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어 “매일 소성리는 전쟁터와 같다”며 “수시로 날아다니는 시누크 헬기 소리와 비상을 알리는 마을방송의 사이렌소리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할매들이 통곡하고 절규할 때 대선후보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호소했다. 그는 촛불 시민들에게 “당장 사드배치를 중단하고 반입된 장비들을 철수 할 수 있도록” 함께 외쳐달라”고 갈구했다.

다음은 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에 시달리다 지난해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경씨가 발언대에 섰다. 김씨는 아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게 된 이유에 대해 “한빛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CJ E&M이 인정해야 하고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한빛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비록 거대한 괴물인 재벌기업과의 힘겨운 싸움이 되겠지만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이를 촛불혁명이 가르쳐주었다”고 끝까지 함께해달라”고 당부했다. 김씨에 이어 발언을 이어간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고 이한빛 PD와 콜 수를 채우지 못해 목숨을 끊은 콜센터 현장실습생의 죽음을 언급하며 “언론이 그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였다면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적폐는 언론이 귀를 닫았을 때 시작한다”고 언론현실의 나쁨과 언론현실의 비도덕성을 지적했다. 차별금지법 제정과 군 동성애자 ‘색출’ 중단을 촉구하기 위해 성소수자들도 무대에 섰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운영위원장은 “그토록 청산하고자 외쳤던 혐오를 촛불이 세운 대선에 후보들이 퍼뜨리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혐오는 멀쩡한 사람도 쉽게 짓밟는다. 그런데도 성소수자 권리는 시기상조라고 한다. 합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한다”며 “시기상조의 이십년 동안 성소수자는 차별과 혐오를 견디며 생존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광화문 광장에는 남대서양에서 침몰한 화물선 스텔라데이지호의 실종 선원 가족들이 촛불집회에 참석해 도움을 호소했다. 가족들은 “구명벌 하나에 의지하여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대한민국 국민 8명’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수수방관하는 정부!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맞습니까?”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관심을 호소하며 오열했습니다. 촛불 에너지는 선거혁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지금 19대 대선은 기초가 되어야할 촛불정신, 촛불혁명을 무시하고 진행되고 있다.

이번 모임은 여기에 대한 경고로 모인 것으로 보인다. 촛불정신은 앞으로 모든 우리나라 정치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촛불이 변화시켜 온 것은 놀라울 정도로 많다. 박근혜의 퇴임은 촛불의 힘이었다. 그러나 양적개념이 아니고, 촛불이 변화시켜 온 것은 질적개념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사실 이 기초적인 사실조차 모른다면 절대로 안될 일이다.

대선 주자들은 촛불 국민들의 진정어린 나라 사랑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또 다른 촛불을 계속 들게 만들 것이며, 반복되는 악순환을 불러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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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6<은우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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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u : Prof. Woogeun Eun>

7) “살아남은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마지막 가두 방송과 최후의 저항 (5월 26일 밤-27일 새벽)

5월 26일 17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 기자들과 마지막 인터뷰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당일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시켰다. 이날 밤 24시, 광주 시내의 전화가 일제히 두절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어차피 씻겨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일단 목욕이나 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목욕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차분히 마지막 전투를 맞이했다.”

5월 27일 새벽: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잠들고자 했다. 죽음도 어차피 잠자는 것이니까…, 도청 앞으로 모여주기를 호소하는 여성의 애끓는 가두방송은 칠흙 어둠이 뒤덮은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메아리쳤다.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때뜨렸다. … 그녀의 목소리는 캄캄한 도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애띤 목청으로 소리치는 동안 울려 나온 말들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슨 말일까? 지금이 마지막이다! 골자는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시민들에게… 합류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아닐까?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열리는 문소리, 길거리를 대닫는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집안에 들어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문고리를 푸는 소리, 거리에 걷는 발자국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 아무것도….(Hebrt Scott Stokes, NYT Seoul correspondence )

‘시민 여러분 도와주세요! 공수부대가 오늘 밤 도청을 함락합니다.’ 라는 가두방송을 듣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당시 교사 박행삼의 증언) “전투를 하면서도 빨리 날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시민들이 모여들고 그러면 계엄군이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의 증언) ” 잠을 들지 못했다. … 도청쪽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나와달라!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뛰어나갈 용기라 나지않아… (당시 광주대교구 관리국장 박상수의 증언)

“도청 청년들 최후다. 그들은 모두 죽는다” 엉엉 울었다. 신자도 울고, 나도 울고..탈진하여 사제관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깼고, 마지막 가두방송을 들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도청으로 모여 주십시오. 어서 도통으로 모여 총을 나눠서 도청을 사수합시다….(당시 계림동 성당 주임 조철현 신부의 증언) 새벽 3시경 시민군 가두방송을 들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시내 전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우리 학생들을 살립시다.” … 뼈를 깍는 듯한 애절한 절규에 시민들은 흐느꼈다. (윤공희 주교 외)

” 5월 26일 가두방송차량 운전원이 고향인 목포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설마 모두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다. 칠흙 어둠이 뒤덮은 거리를 승용차로 돌며 방송했다. ‘시민 여러분! 도청 앞으로 모여주세요. 계엄군이 쳐들어 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라고 다급하게 호소했다. 나는 이미 며칠간 밤낮으로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계속해왔고, 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웠었다. 시민들은 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방송을 듣고 많은 시민이 모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다 주택가 창문으로 세어나온 불빛이 꺼지는 것을 보며,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불을 끄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청에 돌아와 아무도 모이지 않았음을 확인했을 때, 살 떨리는 배신감을 느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외로움과 막막함, 허전함이 밀려왔다.’ (은우근 교수, 이경희 학생 인터뷰 (2012.5.10)

계엄사는 새벽 3시 30분 군 병력을 광주 전역에 투입하여 5시 10분 경 시내 일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만일 20만 명의 시민이 10일간 금남로에 계속 모일 수만 있었다면, 5월 민중항쟁의 결과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민들은 ‘도청에 나가야 하는데, 그 사람들 지금 죽어가고 있을텐데, 내가 나가야 하는데…’ 라고 마음속에서 외쳤을 뿐 집을 나설 수는 없었다.(주: 계엄군은 25일 도청에서 일어난 ‘독침사건’에서 보듯이 오열을 침투시켜 민중 내부에 불신과 공포를극대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가두방송이 거리에서 울려 퍼질때, 문을 걸어 잠그고,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민중은 마지막 순간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지 못했다.(주: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참조. 이 시는 5월 민중항쟁이 진압된 직후인 6월 2일에 지어졌다.

순수하고 순결했던 생명 공동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5월 민중은 두려움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왜? 하나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현실은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다. 5월 민중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하나됨의 신비와 환희를 체험했지만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생명공동체적 연대의 감격과 환희가 강렬했던 만큼 부끄러움과 죄책감, 부채 의식도 더 강하게 자각되었다.

5월 26일 밤 -27일 새벽 사이의 시민군 가두방송은 5월 민중항쟁의 집단 정서로서 죄책감의 형성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 가두방송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지금까지 5.18 연구에서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5월 민중이 80년 5월 22일 공수부대를 시내에서 몰아내고 공유했던 해방감과 환희는 죄책감으로 변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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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5<은우근 교수>

(사진은 전 광주 도청앞 분수대 에서 촛불 시위하는 시민들: 5.18광주 민중항쟁때는 그 곳에 전남도청이 있었다. 현재는 무안으로 이사가 있다. 그때도 그곳에서 촛불 시위를 했다.

<Gwangju : Prof. Woogeun Eun>

3) 부끄러움과 무력감으로 고뇌하던 사제들, 시위를 기도하다(5월 21일)

21일 아침 도시 외곽에서 골목별, 동네별로 시민군에 대한 지원이 활성화되면서, 시위는 광주 전역에서 전 민중이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이 날 오전, 광주 지역 본당 사제들 대부분이 호남동 성당에 모였다. (당시 광주시에 소속된 성당은 모두 12곳이었고 사제는 시내 본당 7명, 교구청 근무 2명이었다. 따라서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사제수는 9명이었다. 여기에는 1명의 외국인 사제가 포함된다.). ‘신도들이 사제들을 책망’했다. “이런 곤란한 시기에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민중의 지도자로서 신부들이 앞장서줘야 하지 않느냐. 한시라도 빨리 대주교님을 모시고 플랑카드를 선두오 수습에 나서야 [한다]” 고 요구했다. 김성룡 신부는 당시의 심정을 “부끄러운 일이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 너무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나 자신을 돌아다 본다. ” 고 (“분노보다는 슬픔이” 저항과 명상)표현했다.

마침내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떨치지 못하고 고뇌하던 사제들은 평화로운 수습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의했다. 윤공희 대주교의 재가도 받았을 뿐 아니라, 윤 대주교 자신도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학운동의 숙소에서 호남동 성당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인정할 것과 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분노한 민중과 공수부대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자임했지만 실상의 시위를 기도한 셈이다. 이 시위는 계엄군에 의한 헬기에서의 기총소사와 도청 앞 공개 발포로 무산되고 말았다. 신군부의 듸도대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될 상황이 임박한 만큼 이를 무산시키려고 발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중재자로서 교회의 최초 시도는 계엄군이 거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4)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다 : 계엄군의 공개 발포와 무장 (5월 21일)

한편 사실상 사제들의 시위 기도가 좌절된 시점인 오후 1시경, 계엄군은 금남로 도청앞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발포했다. 5월 민중은 군용 장갑차, 무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30만 명의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치선에서 민중은 계엄군과 백병전과 다름없는 시가전을 벌였다. ” 고래가 [정어리 떼를] 사냥하듯이 ” 시체 또는 부상자들을 끌고 골목으로 흩어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모여들고 다시 총격이 가해지면 또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었다. 시민들은 ” 총! 총! 총을 외쳤다.”.

다음 한 시민군 이세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지금 군인들 상대로 하고있는 일 [총으로 군대에 대항하는것]이 잘한 일인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호응하는 모습을 보며 그 [꺼리는 ] 마음이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계엄군의 끔찍한 폭력을 겪으며 형성된 ‘국가가 우리에게 이래도 되는거야?’ 라는 의문은 무장을 계기로 ‘우리가 국가에 대해 이래도 되는 거야?’ 라는 의문으로 전환되었다. 이 증언은 시민들의 인정을 통해 무장에 대한 의문이 확신과 긍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5월민중은 투쟁을 통해 공포와 자기 모멸감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5월민중은 목숨을 바치는 결단을 통해 이룩한 공동체를 자기 자신으로 체험했다. 자기중심적으로 타자화된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민중은 국가 폭력이 강요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전면적 투신. 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하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극복하는성스러운노동과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한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성스러운 노동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해방과 평등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제 민중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느낀 자기모멸감과 부끄러움은 목숨을 건 투쟁 과정에서 이룬 공동체적 환희의 체험을 통해 긍지로 전환되었다.

5월 22일 : 공수부대가 물러간 ‘해방 광주’에서 시민 자치가 구현되었다.

5월 24일: 사제들이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도청 수습대책위에 전격적으로 참여했다. 남동성당에서 사제들과 모여온 재야 인사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5) 사제들이 무기회수와 시민군 무기로 사수에 참여하다(5월21일-26일)

계엄군과 협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무기 회수가 이루어졌다. 조철현 신부와 남재의 신부가 직접 무기 회수에 참여햤다. 5월 25일 : 사제들이 TNT를 사수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도청 지하에 있는 TNT 를 포함한 시민군의 무기고를 지키기위해 김성용 신부가 남동 성당에서 2명, 조철현 신부가 계림동 성당에서 1명을 모집하여 모두 3명의 청년을 도청 무기고에 배치했다.

6) 사제들, ‘죽음의 행진’을 결행하다. (5월 26일 낮)

5월 26일 오전: 새벽 상무대에서 탱크가 농성광장으로 진격 중이라는 급전을 수신하면서 도청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함께 밤을 새웠던 수습위원들은 극도로 당황했다. 김성용 신부가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죽음의 행진”을 제안하고 수습대책위원 17명 전원 찬동했다.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이 앞장을 섰고 수백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다. 진격한 탱크가 도로를 차단 중인 농촌진흥원 앞에는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아침 9시였다. 김성용 신부는 ‘총 맞아 죽을 각오로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5월 26일 오후 : 마지막 협상이 실패했다. 이 협상의 결렬로 중재노력은 파국을 맞았다. 계엄군을 설득하러 갔던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은 되돌아와 무기회수를 위해 시민군을 설득하러 나서게 되었다. 계엄군은 처음부터 사제들이 포함된 수습위원의 중재 노력을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끌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과 시민군을 분리시키는 한편, 시민군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시민군 내부의 분열과 이탈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즈 심재훈 기자의 말처럼 “광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바다에 외로이 떠있는 고도” 였다.

목숨바쳐 이룬 생명공동체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5월민중은 무장과 최후의 결전을 선택하면서 다시 분열을 경험했다. 무장을 계기로 총기를 나누고 그 사용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돌연 그 곳에서 계급 (class)을 보았다. 무장한 민중은 대부분 항쟁 이전에 이 도시에서 언제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무장이 시작되자 이전에 이 도시의 주인이라 느꼈던 계급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 분열의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심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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