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mors shake Earth, Residents Fear Death

(Photo from National Hurricane Center)

화요일 오후 세시(현지 시간), Hurricane Willa, 3rd grade storm 이 멕시코의 리조트 비치 타운, 마자틀란에 도착했다. 국립 허리케인 센터는 “윌라가 멕시코 해안에 당도하면 상당히 위험한 허리케인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된 이번 허리케인은 멕시코 서남단의 해안도시 마자틀란을 치고 다시 고개를 돌려 텍사스를 바라보며 질주하고 있다.

윌라는 서부 할리스코, 서부 나야릿, 남부 시나로아, 남부 두랑고 지역에 적어도 6인치에서 12인치의 폭우를 내릴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번 마이클의 피해로 아직도 심각한 상태에 있는 동 남부 주를 비롯한  플로리다 주는 다시 잔뜩 긴장하고 있다.

(Photo from USGS)

지진도 이에 질세라, 23일 하루 총 22개의 지진이 환 태평양 지진라인을 따라 일어났다.

예멘,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피지, 뉴 칼레도니아, 하와이, 알래스카, 오레곤 주등에서 발생했으며, 요나쿠니 일본에서는 5,7의 지진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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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pulation of Employment Statistics: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이선훈 박사의 칼럼)

<지학 박사: 이선훈>

2018년 고용대란을 발생시킨 원흉: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2018년 5월부터 고용증가가 10만명선이 붕괴되었고, 심지어는 7월에는 5천명의 증가에 그치는 상황이 전개 되었습니다. 9월의 통계에서는 7만명대로 회복의 신호로서 기대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9월의 통계가 발표되기까지는 야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을 중심으로 고용이 감소될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해왔었습니다.

고용대란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고용이 감소하지는 않았으며, 고용의 증가율이 감소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고용증가수의 대폭적인 감소에 관해서 야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그리고 조중동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계열의 신문과 종편방송을 칭함) 을 비롯한 친 독재정권적인 언론과 학자들은 주원인을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지목하며,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비난하고 있는 주요한 재료로 삼고 있는 것 또한 국민의 국정에 대한 판단을 심각하게 혼란 시키고 있습니다.

2018년 5월부터 시작된 고용증가수 격감의 주요원인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단기적인 요인과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부터 이어온 장기적인 경제실정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단기적인 요인으로 고용증가수의 격감을 유도한 것은 야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인기초연금과 아동지원금의 인상을 지극히 정략적인 이유로 2018년 9월이후로 지연시킨 것입니다.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에 한국경제는 정권의 경제실정이 표면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당면해있던 조선업의 구조조정을 미루어오며, 심지어는 ‘서별관회의’로 일컬어지는 국민[을] 기만하는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조선업의 유지를 위해 4조원의 국가 혈세를 지원하였습니다. 따라서 2017년 5월에 출범한 문재인정부에서 성동조선의 파산조치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부가해서 고용문제를 인질로 국가의 혈세지원를 요구해오던 GM 군산공장의 폐쇄 또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성동조선의 파산과 GM 군산공장의 폐쇄에 따른 고용감소는 최소한 20만명이상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성동조선의 파산과 GM 군산공자의 폐쇄에 따른 고용감소는 2개의 기업에서 발생한 직접적인 고용감소와 함께 이들의 영향권에 있던 주변상권에서 발생한 고용감소를 고려하면 최소한 2배 이상인 약 40만명이상에 달할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부가해서 박근혜정권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파격적인 대출조건의 완화를 통한 부동산 중심의 경기부양책을 펼치며, 강남을 중심으로 주택가격의 급등과 전세금의 상승을 유도했고, 가계부채의 급격한 상승과 함께 부유층의 투기심리를 극대화시켰습니다. 부유층이 부동산투기의 과정에서 전세금을 이용하여 행해지던 부동산의 추가구입을 완화된 극단적인 저금리의 대출조건으로 전세금을 상환하게 하여 부유층의 부동산임대업을 조장하고, 그 결과로서 부유층의 소득증대를 조장하며, 전세물건의 급격한 감소에 따른 전세금의 급등과 함께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이에 따라서 가계부채의 급등과 함께 가계소득은 급격히 하락하여 내수경제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지극히 비관적인 견해를 필자를 포함한 일부의 경제전문가들은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따라서 문제인 정부에서 대출조건를 강화하여 가계부채의 증가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상황에 있었으며, 최경환의 경제실정에 의해서 유발되어 비정상적으로 유지되던 건설업의 불안정한 일용직 고용형태 또한 급격히 감소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는 점 또한 명확히 인식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급격한 고용감소의 상황에서 2018년의 고용이 마이너스가 아닌 최소인 7월에서 조차도 5천명의 증가로 나타난 것은 오히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의 눈부신 성과라고 평가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이명박근혜의 경제실정에 따른 내수경기 침체와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빈곤층을 포함한 저소득층의 소득을 향상시켜 소득의 지출비율을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시중의 유동성을 증가시키는 것은 단기적인 경제처방으로 필수적인 것인 동시에 이 과정에서 복지정책의 확대와 강화를 이룩할 수 있다면 최선의 경제정책이 될 것입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그간 대기업의 법인세율를 낮추고, 비정규직의 확대를 통한 대기업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정책에 일관해왔으며, 대기업에서 직접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는 실질적으로 감소하며 대기업의 이익증대에도 불구하고 하청기업의 증가와 비정규직의 확대로 종업원의 실질적 소득은 감소하고 [했었]습니다. 이러한 이명박근혜의 대기업 이익증대를 위한 정책은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을 급증시키며 시중의 유동성 자금을 축소시켜 내수경기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거듭해왔습니다.

법인세율의 하락과 대기업에게 유리한 고용정책을 실시하며 대기업의 이익이 급증해가는 상황에서 대기업은 급증하는 사내유보금을 극히 일부라도 다소간의 위험성을 갖고 있는 첨단산업을 일컬어 지는 새로운 산업에의 투자를 확대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지는 것입니다. 신산업을 위한 설비투자는 기업의 이익발생 가능성이 매우 불확실하며, 심지어는 투자자금의 회수 가능성마저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서 대기업이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의 이익증대 상황에 스스로의 위험성을 감수하며 커다란 변화를 유도하는 신산업에의 투자를 확대해갈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기업의 신산업에 대한 투자욕구는 현재의 수익이 악화되는 상황이 명확해 질수록 상승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필자는 위와 같은 분석내용을 토대로 하여, 고용의 감소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유리한 상황을 허용하지 않기 위한 자신들의 정략인 이유만으로 노인기초연금의 인상과 아동지원금 지원을 9월이후로 연기시켜 내수경기의 활성화를 방해한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야말로 2018년 5월부터의 고용대란의 주범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5월 출범한 이후 2번의 추경예산과 1번의 예산편성과정에서 경찰과 소방 공무원을 중심으로 한 공무원의 채용확대를 주장해왔으나, 그 때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이를 방해하며 고용감소를 부채질해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구감소에 따른 의무복무자의 감소로 부족해 질 것이 명확한 경찰과 소방을 비롯한 공무원의 인력수급은 시급한 상황입니다. 공무원의 증가로 인한 국가재정의 지출확대는 불가결한 것이지만, 증가된 공무원의 급료는 그 일부는 세금으로 환수될 뿐만 아니라 고용의 확대로 인한 실업률의 증가를 방지하여 실업률 증가에 따른 복지재정이 대폭 감소될 수 있으며, 치안의 안정을 통한 국민의 안전도 증대 될 수 있으며, 시중자금의 유동성을 증가시켜 내수경기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차산업은 제조업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제조업를 중심으로 고용의 축소는 필연적입니다. 4차산업의 활성화로 예상되는 고용의 축소와 대기업중심의 이익상승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 또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에 의한 소득의 재분배기능은 어느 때 보다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재인정부는 소득주도성장정책으로 저소득층의 소득을 증대시키며, 복지정책을 확대강화하고, 재정지출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적폐청산을 가속화해 가야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의 근간은 소득주도성장정책이며, 최대의 경제동력은 남북교류의 활성화를 통한 경제규모의 확대와 함께 한반도 전쟁위기의 해소를 통한 국민경제활동의 불확실성을 해소하여 안정성을 극대화하는 것에 있습니다. 올해 2018년 2월의 평창동계올림픽 이전까지 극단적으로 악화대가던 한반도의 전쟁위기고조를 다시 한번 상기하며, 문재인정부의 한반도 전쟁위기 완화를 위한 노력을 필살적으로 방해하는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그 동조세력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구출을 위한 최대의 방해세력임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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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ry of Culture (이강화 박사의 일요 문화 산책)

<Ph D. Lee, Kang Hwa, Gae Myung University>

문화주의

1) 문화주의의 기원

문화주의는 1950년대 말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대중문화 연구 전통이다. 문화주의의 특징은 문화에 대한 추상적인 혹은 이론적인 작업을 피하고 또 사회 관계의 구조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반면, 문화의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에 주목한다는 데 있다. 문화주의라는 용어는 현대문화연구센터의 전 소장이었던 리처드 존슨이 이 운동을 대표하는 세 이론가, 즉 윌리엄즈, 호가트, 톰슨의 공통되는 연구관점을 지칭하면서 붙인 것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의 주요한 양상을 깨고 있다. 호가트와 윌리엄즈가 리비스주의의 비판으로부터 그들의 작업을 시작하는데 비해서 톰슨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기계적인 경제 결정주의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앞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문명주의는 영국에서 대중문화 연구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 전통의 특징은 문학적 텍스트의 구조와 도덕적․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들 문화주의자들은 리비스주의의 가정들에 대해서 대부분 반론을 펴지만 일부분은 수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의 수동적 소비보다는 능동적 생산, 즉 인간의 작용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문화의 역동성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윌리엄즈가 문화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에, 호가트는 노동자 문화에 실증적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호가트는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서 리비스주의자들과는 달리, 1930년대의 노동자계급 문화가 매우 건강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대중문화가 도덕적 의미에서 많은 문제들을 보여주었지만 노동자들은 이것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지각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중요한 결론 중의 하나는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에서 부르조아 문화는 결코 완벽한 승리를 구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 계급이나 대중이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지배계급의 문화에 무조건 수동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리비스주의 혹은 비판이론과 구별되는 문화주의 결론 중의 하나로서 이러한 결론은 대중문화가 단순히 반동적인 쾌락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역동성이나 변화의 가능성의 실마리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는 톰슨은 그의 여러 저작들을 통해서 위로부터의 역사라 볼 수 있는 정치제도나 사회구조 대신에, 아래로부터의 역사인 민중의 역동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적 주역으로 등장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서 톰슨은 리비스적 전통의 보호를 받던 편협한 ‘문화’개념을 수정한다. 물론 톰슨 자신도 인정하였듯이 산업화 초기의 노동자들의 삶과 문화양식에 집착하는 자신의 작업이 지나치게 회고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역사과정에 다시 소개하였다는 점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계급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왔다는 것을 밝혀준 것”은 실로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함께 묶는 것은 한 사회의 문화 ― 즉 문화의 텍스트적 형태나 기록된 행위들 ― 를 분석함으로써, 그 사회의 문화적 작품과 실천 행위들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행동과 사상의 유형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세 사람 외에 스튜어트 홀과 패디 화넬 역시 대중문화에 대한 친화적인 좌파 리비스주의적 입장으로 인해서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모태가 된 기관은 버밍엄 대학에 있는 현대문화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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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up of Poem~~저녁 안부/김봉주

(Photo from Google Images)

살아계신 어머니께
그냥도 못한 말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더 자주 하게 되요

날이 쌀쌀한데
감기는 안 걸리셨나요
막내가 이사를 했다는데
언제, 제가 마음에 태워
모시고 가볼까요

몇 주 전 우리 동네
정신나간 목련이
봉오리 올리더니
오늘 보니 그대로
저물어 있더군요

목련 쳐다보다 뒤로 보인
별들 땜에 생각난 게
우리가 아는 별자리가
한데 모인 것도 아니란 거

어떤 건 훠얼씬 멀고
어떤 건 가까운데
우리들의 눈에는
한 덩어리 별자리로 보인다는

그게 거기 식구처럼
함께 있지도 않는데
우리는 그걸 마치
한 식구라 여긴데요

어머니도 그런가봐요
살아계실 때보다도
꿈에도 자주 오시고
더 많이 여쭙게 되니

아직은 별로 나실 곳까지
가는 중이시겠지만
정신 나간 목련마냥
시도때도 없이 말 걸어도

어느 자리 앉으시든 귀찮다 마시고
제가 출발하기 전까지는
계실 때 못다한 걸 늘어놓는 자식 마음
그냥 듣기만이라도 하시면서 받아 주심 좋겠네요.

***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이 깊어지니 인생의 가을도 따라 깊어진다. 먼저 가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여전히 한 “식구” 인 저 세상의 어머니, 저녁 안부를 묻는 이 세상의 아들의 깊은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따라 흐른다. 알록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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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ry of Culture (이강화 박사의 일요 문화 산책)

<Ph D. Lee, Kang Hwa, Gae Myung University>

리비스 (Frank Raymond “F. R.” Leavis CH (14 July 1895 – 14 April 1978)주의

아놀드의 이론과는 달리 리비스의 이론이 리비스주의라 불리우는 이유는 4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그의 문화연구가 단순히 F. R. 리비스 한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에 공감하는 Q. D. 리비스와 D. 톰슨 등에 의해서 공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리비스에게 끼친 아놀드의 영향은 자명하다. 리비스는 아놀드의 문화정치학을 도입하여1930년대의 소위 ‘문화적 위기’에 적용하였다. 리비스와 리비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20세기는 점차 뚜렷해지는 문화적 쇠퇴의 시기로 규정될 수 있다. 19세기에 아놀드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 20세기에 계속되고 누적된 것이다. 이는 ‘평준화와 하양화’의 문화였고 “시민은 이를 추방하고 저항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리비스의 연구는 4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관점은 1930년대의 세 저서, 즉 자신의 독자적인 저서인 <대량문명과 소수문화>와 Q. D. 리비스와 공저한 <소설과 독자> 그리고 데니 톰슨과 공저한 <문화와 환경>의 출간과 함께 형성되었다. 리비스주의 역시 ‘문화는 항상 소수의 유지자들에 의해 지켜졌다’는 논거에서 출발하고 있다. “소수만이 과거에 있었던 최선의 인간 경험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들이 전통의 가장 미묘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살려서 유지한다. 그들에게 한 시대를 사는 훌륭한 생활의 질서를 세우는 무언의 기준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변화한 것은 이 소수의 위상이다. 문화적 권위가 도전받지 않거나 문화적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Q. D. 리비스는 이 상황을”여태껏 아무런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고 취향의 기준을 정했던 소수계층이 ‘권위의 붕괴‘를 경험했다“고 묘사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보급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민주주의 정서가 널리 퍼질 때부터 오랫동안 예기해왔던 위험은 문학 취향의 전통에 대한 것으로, 문학의 규범이 대중투표의 결과에 따라 역전되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독자의 대부분을 이루어온, 교육받지 못한 또는 반쯤 교육받은 군중들은 비록 자신들이 고전을 감상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고전들의 전통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데 만족하였다.

그러나 리비스가 보기에 ”최근에 특히 미국에서 우리의 위대한 문학가들에 대한 대중의 반역이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목격하였는데, 이처럼 문학이 국민투표로 평가받게 되고 평민들 또한 그 힘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은 점차 자신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않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작품에 대한 명성을 지지하려 들지 않게 될 것이고, 이것은 고급문화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량문명과 대량문화는 전복적인 모습을 띠면서 “우리를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이끌”것처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에 대해 리비스주의는 “대량(대중)문화에 대항하는 것을 학교에서 훈련시키도록” 선언하고 또 학교 밖에서는 “의식적이고도 직접적인 노력이 진작되어서 잘 무장되고 활동적인 소수가 저항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적, 정치적 문제에 있어 민주주의의 위협은 리비스주의자들에게는 끔찍한 것이었다. Q. D. 리비스는 “권력을 쥔 자들은 더 이상 지적 권위와 문화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놀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전통적 권위의 붕괴가 대중민주주의의 발홍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 두 현상은 문화화된 소수를 압박하고 동시에 ‘무정부’가 설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었다.

F. R. 리비스는 19세기 이전에는, 확실히 17세기에는 영국에 활발한 일반문화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 이후에 일반문화는 두 개의 문화로 조각났다. 즉 한편으로 소수의 고급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의 저급한 문명으로 구분되었다. 소수문화는 이제는 문학적 전통으로만 축소된 ‘사고와 표현의 정수’의 가치와 기준으로 형성되었고, 이것은 교육받은 소수의 문화였다. 이에 반대되는 것으로 대량문명은 ‘교육받지 않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 대량문화. 상업분화로 구성되었다. <대량문명과 소수문화>와 <문화와 환경>에서 F. R. 리비스는 대량문화의 몇 가지 핵심적 일면들을 분리하여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소설은 ‘보상’과 ‘오락’의 중독적인 형태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보상의 형태는 현실에 대한 직면을 습관적으로 거부하고 아예 연약한 도피를 하게 조장함으로써, 독자에게 삶의 집착을 강화시키고 새롭게 하기보다는 더욱 부적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독서를 ‘소설 약물중독’이라고 하였다.

한편, 대중소설에 빠지지 않은 이들에게는 영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의 치솟는 인기는 이를 매우 위험한 오락수단으로 만들고 있으며 “영화는 최면술적 수용상태에서 가장 값싼 감정적 호소에 빠지게 한다. 그것도 무서울 정도로 실생활에 가까운 사실적인 환상으로 호소한다는 점에서 더욱 교활하다.” Q. D. 리비스는 헐리우드 영화나 대중용 신문은 “대중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하게 침투하는 비교육적 매체”이며 라디오는 비판적 생각 자체를 말살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F. R. 리비스가 가장 격렬하게 비난한 것은 광고로, 이는 그 끈질기고도 침투성이 강한 속임수 때문이다. 광고는 리비스주의에서 문화질병의 가장 중요한 증후로 꼽힌다.

노동의 질 역시 유기적 공동체의 상실에 따라 저하되었다. 리비스는 이러한 상실의 신호로 여가의 필요성이 나타났다고 보았다. 과거에는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 속에서 살았으나 현재의 그들은 노동에서 벗어난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노동의 질이 너무나 저하되어 노동자들이 사실상 “노동 때문에 무능하게”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제 여가는 ‘재창조’(recreation)가 아니라 ‘비창조’(decreation)만 가져다 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상과 수동적 위안을 위해 대중문화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이러한 마약과 같은 대중문화에의 몰두가 악화되어 마침내 대리인생에 탐닉하는 상습 복용자들이 되는 것이다.

F. R. 리비스는 이러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문화적 선교단, 즉 문학적 지성인들의 소수정예부대를 급파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들이 대학에서 문화적, 특히 문학적 전통을 수호하고 그것의 ‘지속적이고 협조적인 쇄신‘을 격려하는 문화의 첨병으로서 그리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대량문화와 대량문명의 일반적 야만성에 대한 전쟁을 치루어 내도록 무장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윌리엄즈가 언급하듯, F. R. 리비스는 “빈궁함과 옹졸한 폭정, 질병과 사망률, 무지와 좌절된 지식 등도 역시 그 중에 있는 요소들이었음“을 언급하는 것은 잊었다. 리비스가 제시한 것은 역사적인 설명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들의 본질을 깨우쳐주는 문학적 신화로, 단지 과거 질서에 대한 기억은 새로운 것에 대한 주된 자극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리비스적 시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토니 베네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리비스주의 만이 대중문화의 연구가 가능할 만큼 지적으로 발달한 토양을 제공하였다. 더구나 ‘진지한’ 작품들만을 위해 사용되었던 문학 분석의 기술을 대중적 형태에 적용한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리비스주의자들의 연구는 리처드 호가트와 에드워드 톰슨 그리고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이른바 문화주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선구적 작업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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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and South Korea’s Unified Path to Peace as Observed by the BBC, CNN

(사진: 지난 6월 북. 미 정상회담)

BBC Laura Bicker 기자가 바라본 남. 북한의 평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빌어, “북한은 변하고 있다. … 그러나 보편적인 인권에 대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가난한 나라를 발전 시키려는 분명한 비젼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서 연장자를 대접하는 겸손한 마음” 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비커 기자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김위원장으로 받은 천연기념물인 특별한 개 선물에 대해 말했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보편적인 인권문제는 국제사회가 압박해서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라 남.북한이 상호 협조하고 또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북한이 개방의 문을 열고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길이 북한의 인권 문제가 개선되는 첩경이라고 말했다.

CNN은 지난 9월 19일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관련된 기사에서 두 나라가 종전을 선언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두 나라간의 협약을 밝히며,

The two countries also pledged to:
  • Submit a joint bid to host the 2032 Summer Olympics.
  • Create rail and road links between North and South within the next year.
  • Stop military drills aimed at each other along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which divides the two countries, by November 1.
  • Remove 11 guard posts in the demilitarized zone by the end of the year.
  • Normalize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and Kumgang tourism project as soon as the conditions allow.
“이제 볼은 워싱턴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두 나라가 서로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를 선언하는 협정에 사인을 하는 일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experts agree that there is nothing to stop the two Koreas declaring an end to the war themselves, or signing a bilateral peace tre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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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ry of Culture (이강화 박사의 일요 문화 산책)

<Ph D. Lee, Kang Hwa, Gae Myung University>

제 3장 문화의 이론

1, 문명주의

1) 문명주의의 시대적 배경

다수의 대중문화는 항상 소수 권력층의 관심 거리였다. 정치권력을 쥔 자들은 항상 권력이 없는 자들의 문화를 정치적 불안의 징조로 보고, 보호와 간섭을 통해 끊임없이 조정하고 규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이같은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산업혁명이후의 서구사회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중요한 시기에 피 지배층의 문화를 조절하는 수단을 상실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바로 산업화와 도시화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변화들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문화적 관계들과 단절의 계기도 가져왔다.

이제 도시는 계급에 의한 주거분리의 명확한 경계를 유발시켰고, 이러한 주거분리는 산업자본주의의 새로운 노동관계를 반영하였다. 그리고 생활과 노동 관계의 변화라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 계급에게는 지배계급의 직접적인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를 개발할 공간이 주어졌던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서 권력층 문화와 함께 공유 되었던 일반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와 산업 중심지에 피 지배 층만이 갖는 분리된 문화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분리된 문화에는 두 가지 주된 근원이 있었다.

첫째 새로운 문화기업들이 영리를 위해 제공하는 문화 였[다.]

둘째는 급진적인 예술가들과 새로운 도시노동계급, 중산층 개혁론자들이 정치선동을 위해 그리고 이러한 정치선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일어난 발전은 문화적 융합과 사회 안정의 전통적 개념을 위협하였다. 이는 우선 문화적 융합을 상업적으로 해체하여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모든 형태의 정치적, 문화적 권위에 직접적인 도전을 가하였다.

문명주의란 명칭은 흔히 ‘문화와 문명주의’라고 불리우는 영국의 전통적인 문화이론에 대한 필자의 임의적인 표현이다. ‘문화와 문명주의’라는 명칭에서 ‘문화’를 생략하고 ‘문명주의’라 약칭한 이유는 보수적인 이 이론을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전개된 진보적인 ‘문화주의’와 대비하기 위해서다.

2) 매튜 아놀드 Matthew Arnold (24 December 1822 – 15 April 1888)

근대의 대중문화 연구가 흔히 매튜 아놀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중문화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아놀드의 중요성은 그가 어떠한 전통 즉, 대중문화를 보는 특정 관점과 일반적인 문화의 영역 내에서 이률 자리 매김하는 특정 방법을 시작한 데 있다. 그리고 그의 중요성은 어떤 경험주의적 연구의 업적에 있다기보다는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일반적 관점의 지속적인 영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 영향력은 흔히 ‘문화와 문명’의 전통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아놀드에게 문화는 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문화는 지식체계이다. 아놀드에 따르면 문화란 ‘인간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말한다.

둘째, 문화는 “이성과 신의 의지가 널리 퍼지도록”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셋째, “문화는 완벽에 대한 연구이며 이 완벽은 어떤 것을 가진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것이 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일련의 외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문화는 최선을 알기 위한 노력이며 또한 모든 인류를 위해 그런 지식이 널리 알려 지도록 하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이제 인간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알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지식체계이며 그 지식을 ’정신과 영혼의 내적 상태‘에 적용시킨 것이다.

네 번째 측면이 있는데, 문화는 “우리 시대의 (병든) 영혼을 보살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가 “어떤 특정한 악을 제거하기 위한 실제의 수술로서 보다는 우리 친구나 동료들이 문화를 추구하도록 만드는 데”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놀드에게 문화는

첫째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자체이고,

둘째로 최선 그 자체이며,

셋째 최선의 것에 대한 정신적, 영혼적 적용이며,

네째 그 최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문화는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아놀드에 의하면 “읽고, 관찰하고, 생각함으로써” 그리고 “알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알고자하는 열망으로 그리고 활발하게 읽고, 객관적으로 사색하고, 관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그의 글에서 대중문화는 정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놀드의 글을 읽으면 ‘무정부상태’가 부분적으로 대중문화와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무정부/대중문화는 노동계급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의 분열적, 파괴적 형태이며 이것은 분명히 1867년 도시 남성 노동계급이 정식으로 정치에 진입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정치적 위험을 말한다. 그리고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는 노동계급의 문화는 극히 정치적 개념이란 것이다. 문화의 사회적 기능은 이러한 파괴적, 분열적 존재, 즉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대중’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대중들’, 이 엄청나게 많고, 비참하고 다루기 힘든 천민들의 군중’을 계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계급이 누리는 문화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약간 주장하며, 가고 싶은 데 가고, 어디서나 모이며, 아무 데서나 소리지르는 거친 것들의 문화” 다시 말해서 “영국인의 천부인권을 주장하며 원하는 곳에 행진하고, 집결하고, 소리지르고, 부수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 시작하는 문화“라는 데 있다. 여기에서 아놀드는 자신의 논의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문화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귀족층과 중산층을 이런 부정적 상황에서 이끌어내야 하고, 둘째로 앞서 말한 서민의 인간성을 갖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우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정부의 경향과는 반대되는 권위의 원칙”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아놀드의 이러한 논의의 시대적 배경은 1866-7년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참정권에 있다. 아놀드는 이 참정권이 아직 권력에 대해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바람에 종속과 복종이라는 강한 봉건적 습관을 잃은 노동계급이 매우 위험하게 되었고, 따라서 무정부적으로 변한 이 계급에게 종속과 복종의 감각을 되살려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교육이야말로 이러한 종속과 복종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문화를 향한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더 이상 하이드파크에서 데모가 일어나지 않게 되며, 지배 문화의 ‘아름다운 빛’을 노동자들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교육이란 노동계급에게 노동조합, 정치선동, 노동계급문화의 유혹 등을 물리칠 수 있을 ’문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더 짧게 말하면 ’문화‘는 대중문화를 제거하는 것이다.

아놀드는 이러한 다양한 제안을 ”법적 절차를 밟은 혁명“이라 불렀다. 물론 아놀드가 더 나은 사회, 즉 덜 지저분하고, 덜 가난하고, 덜 무지한 사회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는 더 나은 사회란 자기가 속한 부르주아사회밖에는 상상이 안되었을 뿐이다. 결국 아놀드에게는 문화가 연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 문화적 복종과 종속을 통해 획득된 사회질서와 권위가 주 관심사이다. 아놀드에 의하면 역사는 항상 ‘기반이 약한 대다수의 도덕적 실패“로 인해 사회가 파괴되었기에 노동계급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쇠퇴와 무질서의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사고와 표현의 정수, 즉 수준높은 고급 문화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 즉 대충 교육받은 다수가 아닌, 고도로 교육받은 소수가 항상 인류의 지식과 진실의 기관 역할을 해왔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과 진실은 결코 인류의 대다수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리 없다. 그에게 노동계급은 “맥주와 진(gin)과 쾌락”에서 허우적거리도록 운명 지워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놀드는 정치를 기존 권위에 맹목적으로 내맡길 만큼 현실정치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거부하는 것은 항의의 정치, 즉 반대의 정치뿐이다. 이는 지배질서에 대한 매우 완고한 방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것 때문에 아놀드적 관점은 영국을 중심으로 50년대 말까지 지배계급의 대중문화와 문화정치에 대한 인식을 지도해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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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up of Poem ~~ 둥근 세상/ 강병원, 이 가을엔 편지를 쓰자/김의상

(사진: 강병원 시인)

둥글둥글 둥근 세상
둥글둥글 살라고
발 밑에 지구 둥글고
해와 달도 둥글둥글

어둠 깔린 미명에
그라운드 골프공 친구와
길고 짧은 홀 따라가며
둥근 세상 굴린다

텃밭에 은행알 주렁주렁
비탈길에 또르르 또르르
둥글둥글 살라고
옹기종기 둥글둥글

<둥근 세상/강병원>

*******

(사진 : 김의상 시인)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장 하다고
황금 들판을 보내고 아름다운 단풍을 보내더라도
즐겁게 맞이 하라고

답장을 썼다
고맙게 잘 받았고 너무 감사하고
맑고 청아한 보살핌에
진실된 삶을 배우고 있노라고

이 가을엔 편지를 쓰자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새벽이라 우기는
꼬꼬댁 암탉 얘기를 써도 좋고

아직 파릇한 나무 잎새를 보며
코트깃 여미고 바람에 날려 구르는
허허실실 웃는 낙엽의 넋두리를 써도 좋다

<이 가을엔 편지를 쓰자/김의상>

 

*** 가을이 왔다. 여기저기에서 가을이 구르는 소리, 여기저기에서 한 때는 비상을 꿈꾸었던 새들의 낙하… 울긋불긋 시린 마음이 고개를 든다. 하늘이 저만큼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미리 알았더라면 멀어지기전에 가슴 진한 사랑이라도 남겨 둘 것을…
그것을 알았나보다. 뚝뚝 떨어지는 그들이 내 발앞에 섰다. 내 발등을 스치고…<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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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Ph D. Lee, Kang Hwa, Gae Myung University>

문화와 예술

그러나 예술은 아름다움의 창작 만은 아니다. 예술은 때로는 미적 즐거움을 방해하는 반미적 인 것, 즉 추한 것을 창작하고 표현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적 미의 기준이란 질서, 비례, 균형, 조화, 도덕성 등 이었지만, 고전주의 이후 근대의 낭만주의에 이르러 반역, 모순, 불균형, 무질서 등이, 그리고 현대의 초현실주의에 이르러 광기, 무의미함, 부도덕, 불안, 부조리 등이 새로운 미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침묵이 때로는 하나의 위대한 발언이 되듯이, 추함이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표현 적 서술이 될 수 있다. 마치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 이듯이 현상의 총체 성을 그려내기 위한 예술 속에도 긍정적인 미와 부정적인 추가 동시에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추가 미적 즐거움을 증가시키고 삶 전체의 생명 감을 고양시킨다 면 이제 더 이상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추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미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 현대예술의 감상에서 이러한 변증법적인 사고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데스와르, 우티츠 등에 의해서 예술학 (일반 예술학)의 주장이 제기된 이래로 예술과 미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미적’이라는 개념은 예술의 본질규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창조적인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 주목하여 좁은 의미의 ‘미적’ 대신 다소 포괄적인 의미의 ‘예술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데스와르에 의하면 미적 관조가 안정된 조화적인 즐거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반면에, 예술은 정신적,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즐거움 외에 지식이나 의지가 포함되어있다. 우티츠 역시 미적 관조와 예술활동을 구별하여 전자는 대상이 주는 인상이 감정에 귀의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이에 반해 감정 체험의 순수한 형식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이 미적 가치 외에 종교적, 정치적, 지적 여러 가치를 실현한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이것이 예술이 문화 현상과 연결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상의 논의를 근거로 해서 문화와 예술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유사성 으로 첫째, 문화와 예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특유한 영역이며 소산이다. 즉 둘 다 인간 정신의 고유한 표현방식이다.

둘째, 문화와 예술은 다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 파악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 그것은 곧 산업개념과 연결되어 문화산업이나 예술산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문화와 예술은 다같이 개선하고 변형 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는 인간의 활동이다.

넷째,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문화와 예술 속에 던져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문화와 예술은 다같이 인간의 삶의 터전이 된다.

차이성 으로 첫째, 모든 예술은 문화에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문화가 예술인 것은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넓은 의미의 문화에 포함되는 신념체계와 지식체계, 기술적 도구와 그 생산물,여러 가지 규범 등은 예술이 아니다.

둘째, 모든 예술은 미적 즐거움을 목표로 하고 그것은 향수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분량이 변화되지 않지만 문화는 반드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셋째, 문화는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문화를 따라오도록 요구하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은 인간에게 어떠한 강제도 하지 않는다.

넷째, 문화가 일정한 시대와 지역에 속하는 집단 구성원의 언어라고 한다면, 예술은 시, 공간을 초월하는 만국공통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일반적으로 문화현상에 대한 이해나 수용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가능하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그것이 예술에 대한 안목이 있는 자에게만 적용된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이 문화의 가장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표현이며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문화의 하위개념으로 문화의 한 영역에 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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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up of Poem ~~ 꽃길/김호천

(Photo from Google Images)

지난해 걸었던 코스모스 꽃길을
오늘도 걷는다.
초록색 융단에 수를 놓듯
색색이 어우러진 길
한 잎 낙엽의 신세로
비단길을 걷는다.

오며가며 가끔 마주쳤던
초췌한 모습의
빛의 얼굴 보이지 않고
낯선 얼굴만 스친다.

길옆 벤치엔 기구한 인생을 산
두 노인이 술잔에
소주병이 술을 쏟고 있고
푸념이 안주다.

구름이 짙게 깔리더니
가랑비 흩날려
여인의 입술처럼 부드럽다.
빗줄기 점차 굵어져
화려한 꽃을 두고 쫒기듯
서둘러 발길을 돌린다.

코스모스 꽃길을
다음해도 걷기를 기대하며
어제 작은 아버지를 조문하고 왔다.

***
꽃길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연결된 길이 참 넉넉합니다.때론 “낙엽의 신세”가 되어도, 때론 자주 보았던 사람 그 길에서 다시 볼 수 없어도, 여전히 그 길에선 “소주”와 “화려한 꽃”과 “여인”이 비 바람을 희롱합니다. 시인은 다음해도 그 코스모스 꽃길을 걷게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작은 아버지”를 보내고 온 길, 그 길은 여전히 “초록색 융단에 수를 놓듯 색색이 어우러진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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