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5.18 광주 민중항쟁에 대하여 은우근 교수

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11<은우근 교수>

 

<Gwangju : Prof. Woogeun Eun>

<5.18민주화 항쟁: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 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한 각성 >

5월 민중은 목숨 바친 실천으로 사랑을 다시 정의했다. 이 사랑은 너를 나로 간주하는 것, 네가 가장 사랑하는 네 목숨을 함께 사랑하는 것, 그 목숨을 걸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생명 공동체는 압도적 폭력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고 이룩한 신비하고 위대한 사랑의 공동체,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 이라고 시인 김준태는 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에서 표현했다.

하느님은 어느 날 느닷없이, 우리의 아무런 노력없이 우리 밖에서 오지 않는다. 5월민중이 군부 독재를 물리쳤던 힘은 바로 우리 안에 신이 있다는 그 깨달음이었다. 민중이 집단적으로 신과 역사를 만난 체험, 5.18이 다른 민주화 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한 각성은 민중의 의식 속에서 무장되고 있었다. 5.18에서 무장을 계기로 형성된 민중의 의식 각성에 주목해야 한다. 무장은 분단 체제를 지탱시키는 국가의 대리자인 군대와 맞선 행위이다. 이는 지배 올르기로서의 민중의 국가의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뜻한다. 민중의 의식 각성은 무기, 군대, 국가 등에 대한 평소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된 고정관념의 경계를 넘어선 실천으로 나타났다.  이세영의 증언은 ‘총을 들어도 될까’ 라는 의심이 시민들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총을 든 시민군의 공통된 체험이다. 도시의 일상에서 주체,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민중은 무장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확인했다. 무장은 잔인한 국가폭력 담지자인 국가에 대한 민중의 근원적 문제 제기, 곧 현존하는 국가에 대한 잠재적 부정으로, 나아가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의 잠재적 각성으로서 읽혀야 한다.

시민군의 무장을 생각할 때, 다음의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무장은 마지막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의 의미를 규정한다.

둘째, 비폭력 운동의 성공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 관한 것이다. 비 폭력 저항은 억압자의 폭력성을 드러냄으로써 저항 주체가 도덕적 지지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언론과 양심 세력과 같은 잠재적인 도덕적 지지자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폭력 저항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도덕적 공감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당시 인도나 영국은 계엄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5월 민중에 대한 신군부의 학살은 완전히 폐쇄된 곧 도덕적 공감자인 관객이 없는 ‘사악한 폭력극장’ 에서 연출된 것이었다. 5.18 당시 “군부의 언론통제는 광주시민들을 지원할 타 지역 국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폭력적 대결 외에 비폭력의 선택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셋째, 저항 주체가 폭력 또는 비폭력을 선택할 여지가 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또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면 그 상황의 구체적 맥락을 참고해야 한다. 비폭력 상태에서 민중이 자신의 생명과 도덕적 가치를 수호할 수 있었을 지 곧 최소한의 자위적 무장이 없더라도 폭력을 물리친 해방광주가 가능했을 지 검토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폭력, 비 폭력은 역사적 조건과 맥락 안에서 상대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폭력과 비폭력을 가르는 명확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설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폭력 또는 비 폭력을 절대화 할 경우, 역사적 실천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5.18 에서 비폭력 저항이 이뤄질 수 있는 두 상황을 가정하면, 첫째, 5월 21일 사제들과 민중이 함께 한 시위가 실제로 이뤄졌고 그 행렬에 계엄군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다. 둘째, 5월 27일 새벽 수많은 민중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경우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경우는 신군부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신군부는 교묘한 심리전으로 공포를 극대화하여 시민들과 시민군을 분리시키고 여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학살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성룡 신부 등의 주장처럼, 신군부가 무력 진압 곧 “제 2의 학살”의 불가피성이라는 명분을 확보. 축적하기 위해 일부 무기의 피탈을 방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윤공회 외, “오월민중항쟁을 돌아보며, “저항과 명성” ) 무장이 무력진압의 명분 쌓기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무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군부가 무력 진압과 보복을 포기했을 가능성은 전혀없다. 따라서 무장은 5월민중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 … 여기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위성삼,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한다”, 국민신문, 1988.10,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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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10<은우근 교수>

사진: 구글에서

<Gwangju : Prof. Woogeun Eun>

4. ‘생명공동체’의 깨달음

신군부 독재 세력은 민족사의 질곡을 강요해온 분단 체제를 규정하는 폭력의 직접적 담지자 였다. 5월 민중의 시위는 애초의 민주화 요구로부터 국가 폭력 자체와의 대결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체는 5월 민중항쟁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적인 요소이다.

5월민중항쟁 당시 가장 처참한 상황에서 가장 많이 외친구호는’죽여라! 모두 같이 죽자!’ 였다. 5월민중은 피와 밥을 함께 나누었다. 피와 밥은 성경적 의미에서 생명의 상징이다. 민중은 헌혈에 기꺼이 참여했고, 골목마다 자진하여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 전했으며 함께 나누었다. 많은 택시 기사들이 공수부대의 공격으로 자신의 전 재산, 곧 ‘밥줄’인 택시가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동을 걸고 대기하다가 도망치는 시위대를 도왔다. 많은 5월 민중이 총격에 쓰러진 생면 부지의 타인을 구하려다 재차 가해진 총격에 쓰러지기도 했다. 당시 광주 기독병원 간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여고생 박금희 양은 농성동 집 부근에서 헌혈 가두방송을 듣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양림동 기독병원까지 가서 헌혈하고 귀가하다 잠복중인 공수부대의 총격에 절명했다.  “몸이 약해서 보기에 그 헌혈허시면 안되겠다고 그러면 막 화를 낸 거예요. 내가 … 죽어도 이럴 때 내가 피 한 방울도 안 주면 내가 시민이 아니지 않냐.  … 어떤 사람들은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정말 죽어도 좋다. 그러니까 피를 더 많이 빼라. … 그때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슬펐고, 또 가장 인간으로서 감동적인 순간들을 너무 많이 체험을 한 거죠.”  이 밖에도 생명을 걸고 타자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한  많은 사례가 있다.

이처럼 5월민중은 피와 밥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나누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위협하고 인간성을 송두리째 부인 당한 모욕과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명을 건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이 절대적 사랑의  순간에 자기와 타자는 구분되지 않았다. 5월 민중이 이룩한 생명공동체안에서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긍정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사랑과 통일 되었다. 이 위대한 사랑의 실천은 특별한 사람들이 이룬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의 시민들이 그 실천에 참여했고 공동체의 환희와 신비를 체험했다.

한국의 대중은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당시에도 일시적으로 공동체의 일체감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일체감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일체감은 자기도취 속에서 자기 상실을 경험하는 일시적인 흥분 상태이다. 따라서 지속 가능성이 없으며, 자칫하면 파괴적 난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또 이것은 지배 구조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국가주의적 동원 기제로 이용될 여지도 있다.

1980년 5월 민중의 공동체적 일체감은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이 인간성을 부정했지만 5월민중은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로 말미암은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순수한 공동체를 함께 체험했다. 민중은 자신을 공동체의 일부로 재 정의 했다.

5월 민중의 공동체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자기 인정과 타자에 대한 인정을 위한 투쟁과 사랑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깨달음과 실천을 인권 개념으로 설명하기에는 구체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불충분하다. 도시 전체의 민중이 동시에 역사이지 않을 뿐 아니라 불 충분하다. 도시 전체의 민중이 도이에 역사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본 경험, 실천은 앞으로  몇 세기 동안에도 갖기 힘들 것이다. 이것이 5월민중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근원이다. 이 점이 여타 민주화 운동과 5.18의 가장 중요한 차이다.

필자는 이 공동체를 ‘생명공동체’로 명명한다.

이것은 불가해한 체험이었다. 김준태 시인은 5월 민중항쟁의 투쟁과 공동체에서의 환희의 체험과 그 체험속에서 발견한 희망을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고 썼다. 황지우 시인은  이 체험을 ” 시인의 접(接)신(神)”이라고 규탄했다. 시인은 신에 접속(access) 했다. 그러나 김 시인만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5월 민중이 함께 접신했다. 이것이 5월민중항쟁의 비의다. 5월민중은 죽음을 무릅쓴 비장한 실천 속에서 하나됨의 신비한 환희를 체험했다. 이 체험은 곧 하나의 깨달음으로서 인간을 변화시켰다. 이 변화된 인간이 역사를 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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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9<은우근 교수>

<Gwangju : Prof. Woogeun Eun>

부끄러움, 그리고 그 후,

김성룡 신부는 1985년 5월 18일 신학생들에게 행한 강론을 “그때 살아남은 부끄러움 때문에 죄인의 심정으로…(윤공희 외 김성룡 지음, “사막의 체험 “중에서)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5월민중의 항쟁이 무참하게 진압되던 5월 27일 새벽 가두방송의 애절한 호소를 듣고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5월민중은 함께 간진한 죄책감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5월민중은 배움의 길고 짧음,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의 부끄러움을 고백했을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죽어간 자들과 그리고 그것을 함께 간직한 다른 살아 있는 자들과 서로 연결되었다. 서로의 죄책감을 확인 함으로써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되었고, 죄책감을 긍지로 전환시킬 연대를 형성했다.

가공할 국가 폭력의 공포와 그것을 이기려는 투쟁안에서 5월민중의 역사의식이 부끄러움으로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공유된 부채의식과 죄책감은 민중을 역사 앞에서 깨어 있게 만들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조차도 함께 가질 때 역사를 밀고 나갈 힘이 된다. 부끄러움의 힘은 인간을 변화 시키므로써 역사도 변하게 만들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동력은 바로 5.18에서 비롯한 이런 역사 의식이었다. 교회와 민중이 행한 시대별 실천의 여러 사례가 그 점을 보여준다.

“외롭게 , 외롭게” 진행된 5월민중의 항쟁은 패배했지만 1980년 6월 한신대 류동운 (1961-1980)의 추모식 시위를 시작으로 대학가에서 용기있는 저항들이 다시 나타났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 사이 민주화 운동의 개별 사건에서 발표된 수많은 성명에서 5월민중항쟁은 죄책감과 때로는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비장한 다짐의 표현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1980년 5월 30일 서강대학생 김의기는 5월 학살 만행을 규탄하고 봉기를 호소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뿌리다 추락하여 사망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에서 :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5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가 : 1985, 김의기열사추모사업회 편) 김의기의 죽음과 관련한 하종강은 다음과 같이

“‘동포에게 드리는 글’ 에서 그는 …광주에서는 수백명의 시민이 죽고 있는데, 동포라는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억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나는 원미동 골목의 석유가게에 잘 숨어 있었다. …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울었다. … 그것이 80년대 십 년동안 나의 가슴속에 살아있던 화두였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부채감이 80년대 10년 세월동안 나를 비롯한 많은 운동권 학생들을 가위눌리게 했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붙들려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가면서도 학생운동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던 최소값은 그 부채감이었다. … 인간이라면 그 부채감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고백한다.

1981년 5월 27일에는 서울대학생 김태훈이 “내 작은 몸뚱이를 불싸질러 광주시민들과 학생들의 외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도서관 5층에서 투신했다.

1983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5.18 영령을 추모하면서 ‘죄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 가신 님 앞에선 모두 죄인인 우리들은 오늘 명복을 비는 추념의 자리를 빌어서…그날의 사태를 유발한 장본인들에게 속죄를 촉구하며,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라야 명복을 빌 수도 있고, 추모의 기도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위대한 광주의 정든 거리를 지키고자 싸우다 가신 꽃다운 혼들이시여!지금 우리는 부끄럽게 살아남아… 이 자리에 모여 고개숙여 추모의 미사나마 올리고 있습니다. …광주는… 세계의 것이며, 인류의 것이며, 양심과 정의의 본령이며, 위대한 민족의 성지임을 자부합니다.. … 이 미사나마 겨우 갖게 됨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며…(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광주의거 3주기에 부쳐:영원히 살아있는 혼들에게” 중에서)

또 1984년 김근태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5월의 참담했던 패배는 그 이전까지 우리가 쌓아 올렸던 역량의 한계를 일깨워 줌과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 보다 넓은 지평을 열어 주는 계기… ” 이며 “광주는 죽지 않았다. … 우리는 80년 5월의 불꽃 속에서 투혼을 안고 태어난 광주의 아들딸들이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처럼 5월민중의 영웅적 투쟁은 80년대 사회운동에서 도덕적 반성 기제의 핵심요소였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5월민중에게 빚졌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년 5월 수만 명이 광주를 찾았으며, 전국에서 매년 수십만 명이 5월민중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투쟁했다. 민주화 운동은 한층 치열해졌고, 과감해졌다. 5.18은 87년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밑불이자 거름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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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8<은우근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5.18 민주 항쟁 희생자들에 대해 광주 시민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졌기에 그가 민중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며,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이 태어날 수 있었던 기반이요. 촛불 혁명의 산실은 바로 5.18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지난 5.18일 광주 망월동 국립 묘지에서 있었던 기념식에서 말했다.

<Gwangju : Prof. Woogeun Eun>

부끄러움을 지니게 된 계기는 외적 조건, 곧 국가 폭력과 같은 외적 강제에 의해 마련될 수 있겠지만, 부끄러움이라는 질문 그 자체는 외적 권력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반성능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대개 우리는 분열되어 있고 분열속에서 나를 인식한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신과 유대가 단절된 자신을 발견한 자의식이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서 사제와 민중의 부끄러움은 공포로 인해 공동체와 유대가 단절된 스스로 를 발견함으로써 생기는 ‘집단적’ 자의식이다. 전자가 신에 대한 또는 신을 마주한 자기의식이라면, 후자는 역사에 대한 또는 역사를 마주한 자기의식이었다. 전자가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신과의 유대가 단절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면, 후자는 공포로 인해 타자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함으로써, 공동체와의 유대가 단절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하나됨을 유지하지 못한, 공동체와의 분열을 경험하는 가운데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리고 부채의식이 5월 민중의 집단 정서의 공통분모이다. 이 부끄러움은 하나의 역사의식이다. 역사의식이란 어떤 사회적 변화를 역사적 관점에 따라 파악하고, 그 변화과정에 주체적으로 관계하려는 의식, 곧 역사적 변화에 대해 주체적 실천으로 관계 하려는 의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당대의 시대적 과제인 민주주의 실현을 염원한 민중과 그리고 타자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 민중과 사제들의 역사의식이 부끄러움, 죄책감, 부채의식 등으로 발현된 것이다.

3. 부끄러운 자들을 위한 연대

5월 민중은 분노와 부끄러움을 함께 간직했다. 부정의에 대한 분노도 부끄러움과 마찬가지로 자의식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분노가 “외향적인 부정적 도덕감정” 이라면 부끄러움은 “내향적인 부정적 도덕감정”이다. 5월 민중에게 이 두 감정은 “동전의 양면” 처럼 서로 의존했다.

5.18이후, 부끄러움은 5월 민중에게는 죄책감과 자부심의 정서로, 광주 바깥 사람들에게는 부채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죄책감이 5월 민중항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정서였다면 부채의식은 간접적인 관련자들의 정서로 민주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한 집단 정서였다. 도덕적 감정으로서 부끄러움은 ” 나 자신이 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가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과의 공감과 연대라는 규범적 기대를 스스로 충족시키지 못했다” 는 반성에서 생겨난다. 부채 의식 또한 신군부의  5. 17 쿠데타에 맞서 5월 민중과 함께 저항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이미 언급한 최윤의 소설은 5월 민중의 마음의 상처로서 죄책감 또는 부채의식을 그리고 있다. 아무도 주인공 소녀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단지 미친 사람으로 간주될 뿐이다. 소녀는 바로 5월 민중이다.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다면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그 죄책감이 직접적이라면 소녀처럼 미칠 수도 있다. 현실의 민중은 미치지 않았지만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부끄러움과 부채 의식, 죄책감을 지녔더라도 꾸역꾸역 밥은 먹어야 한다. 살아가야 하니까. 산다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고, 신성한 것이니까. 광주의 시인들은 5월민중항쟁이 진압된 이후의 죄책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어렵구나 무섭구나/ … . “(김준태 시인의 “아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 … 많은 사람들 쓰러져 죽었고/ 갇힌 사람과 쫒겨난 사람들의/ 낭자한 오열이 흐르는 / 이 시대의 비극의 대명사/ 동지를 잃은 우리들은 / 모두 다 하나의 죄인이 되었구나…(문병란 시인의 송가 중에서)

부끄러움과 부채의식, 죄책감은 3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시절에 있었던 사람은 가슴 깊숙이 박혀서 도저히 빼 낼 수 없는 돌 처럼 굳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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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s Overflow At The 37th Anniversary of the 5.18 Gwangju Massacre <김광식 교수의 현장 르포>

5.18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이 전국에서 온 참관인 만 여명이 함께 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국민들을 감동하게 했다.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으로서 대통령 선거 공약시 그가 한 말을 이행한 대통령 다운 대통령임을 만천하에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서슬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도 국민들은 광주의 불빛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5.18때 구속된 일이 있었지만 제가 겪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오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노와 정의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확인하는 함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치열한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습니다. 1987년 6월항쟁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만여명의 망월동 국립묘지 참관인들은 모두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자신은 5.18일이 생일이며,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날이기도 한 김소영씨가 단상에서 “만약 자신이 그날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가 행복하게 오손도손 살았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타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광주에서 자신을 낳은 날이 1980년 5월 18일이었으며, 그날 아버지는 딸의 탄생 소식을 듣고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계엄군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김소영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자, 문재인 대통령은 단상으로 올라가 김소영씨를 꼭 안아주었다. 단상을 내려오면서 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참석자들을 비롯하여 TV를 시청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소영씨의 딱한 사연에서 울고, 문재인 대통령의 따뜻한 인간미에 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당시 김소영씨의 아버지로 올라가서 꼭 안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기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도록 하겠다”고 공약했고 취임 후에는 보훈처에 제창을 하도록 지시했다. 기념식 전후로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전 등에서도 지역 기념행사위원회 주관으로 기념식이 개최되며, 해외 30여개 국가 재외동포들도 각 지역에서 기념식을 갖는다. 추모열기도 어느 때보다 고조되면서 국립 5·18 묘지를 찾는 전국 각지의 추모객 발걸음도 줄을 잇고 있다. 5월 들어 17일까지 국립 5·18 묘지를 찾은 참배객은 21만 4000명에 달한다.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는 오는 27일 광주시 동구 옛전남도청에서 (사)5·18구속부상자회가 주관하는 부활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기념일 하루 전인 17일 밤에는 5·18의 역사적 현장인 광주 금남로에서 제37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주관으로 시민 등 3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18전야제가 열렸다.

이날 전야제에서 5·18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백남기 농민 유가족은 무대에 올라 “밝혀지지 않은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정부에 촉구한다. 여기 모인 시민들이 함께 해달라”고 말했다. 5월 27일 이날은 5.18 민주화운동 제37주년 기념행사가 광주시 동구 옛전남도청에서 (사)5·18구속부상자회가 주관하는 부활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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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7<은우근 교수>

사진: 윤태호 기자

<Gwangju : Prof. Woogeun Eun>

8)”광주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5월 민중의 장엄한 싸움은 일단 패배했으나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싸우다 우리를 대신해 죽은 열사들에 대한 하나된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리고 부채 의식으로, 또 함께 투쟁했던 긍지 안에서 이미 싸움은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18 구속자 가족들이 1981년 가장 먼저 외쳤다. “광주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 이 나라에 진정한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는 양심의 공화국이 세워지지 않는 한 양심과 정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제도와 권력의 폭압 밑에서 공공연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한 광주 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82년 5.18을 맞아 천주교 광주 대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함세웅 신부는 1985년 5.18 추도 미사에서 “광주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2. 부끄러움 또는 질문

5월민중과 사제들에게 나타난 부끄러움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느낌(feeling)이 아니었다. 감정과 이성의 전통적 이분법에 따를 때 감정은 도덕적 판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니만 감정, 정서는 이성의 표현이다. 도덕 판단에서 감정 이입이 매우 중요하다. 감정 이입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 능력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능력, 곧 “감정이입적 이해력”(empathic understanding) 이다. 이 점에서 부끄러움은 하나의 도덕 의식을 반영한다. 감정이입적 이해력은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으로서 공동체적 연대, 사랑의 능력과 직결된다.

80년 5월 19일, 카톨릭 센터 6층 집무실에서 윤공회 대주교가 느낀 가책은 미친 폭력의 만행에 대한 공포와 무력한 자신에 대한 역사 앞에서의 부끄러움이었다. 사제로서는 신 앞에서의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자의식으로서 이 부끄러움은 자신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신과 역사가 던지는 질문이었다.

5월민중과 사제들은 국가 폭력의 잔인성을 날것으로 목격하며,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어떻게 행할 것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그 질문은 삶 전체로, 때로는 박관현(1953-1982), 김의기(1959-1980), 김태훈(1959-1981), 신영일(1959-1988) 등에서 보듯이 생명을 바쳐 응답할 것을 요구했다.

5월민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5월 26일 광주를 ‘탈출’하는 김성용 신부 역시 같은 질문을 안고 있었다. “이 순간 이 장소를 뜨면 도망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비겁한 신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라고. 그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여러 사제들에게 5월민중항쟁의 진상을 전하며 같은 질문을 늘 간직했다. 여러 차례의 사제단 성명서와 강론 등에 나타나듯이 투옥되거나 연행되지 않은 다른 많은 사제도 이 질문을 항상 품고 있었다. 이 [카]톨릭 사제들에게 역사 앞의 부끄러움과 신 앞의 부끄러움은 분리되지 않았다.

이 부끄러움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그 날…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부름을 받은 총학생회장으로서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 죽어간 영령들에게, 또 죄없이 끌려가 고문을 겪은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총학생회장으로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 “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들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 라고 부끄러움을 거듭해서 토로하고 있다.

같은 시기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었던 양강섭은 ” 내 친구들이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에 쓰러져 가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에 심한 혐오감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고통스러움과 죄책감…” 속에 있었다고 고백한다.(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5월 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529)

80년 가을 필자는 광주지역에서 예비군 훈련에 참여했다. 첫날 자기 소개 시간에 한 예비군이 30여명의 소대원들 모두에게 대뜸 큰소리로 “비겁한 사람들! 살아있으니까 만나네요” 라고 말했다. 그는 공수부대 하사관 출신으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죄책감은 이처럼 5.18이후 사제들과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평범한 민중 사이에 공유되었다. 이처럼 자발적인 반성적 의식으로서 부끄러움이 집단적으로 출현했으며, 그것이 지식인 또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뿐 아니라 기층 민중에게 일반화되었고 장기적으로 유지되었다. 5월 민중의 정서로서 부끄러움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우연적인 것이 아니고 5월민중항쟁에서 국가 폭략의 폭압적인 행사를 겪으면서 특정 시기에 집단 정서로 형성되었다.

둘째,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10여년 이상 장기간 지속되었다.

셋째, 억압에 대한 저항과 좌절, 고립이라는 민중의 집단적 체험 과정에서 부채의식, 죄책감 같은 연관된 정서로, 한편 자부심과 긍지 같은 일견 모순된 정서로 표현되었다.

신진욱은 테일러(Charles Taylor) 의 연구를 토대로 도덕 감정이 “강한 도덕적 가치판단” 곧 고도의 도덕적 의식의 산물이고,  “성찰성”, “심층성”, “사회적 배태성” 이라는 세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요약한다.

성찰성은 반성능력과, 심층성은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과, 사회적 배태성은 사회. 문화적 자산과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월 민중이 함께 지녔던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다.

부끄러움은 심리적으로는 우리의 자아를 반성하는 의식으로서 하나의 자기의식 (Self-consciousness), 자기에 대한 의식이다. 자기를 객관화, 대상화 시킨,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의식이다. 자기를 반성하는 의식은 곧 자신의 현재 삶의 정당성에 대한 자기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 자체는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므로 자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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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Anniversary of May18 Gwangju Democracy Protest Massacre,People Demand “Arrest of Chun Doo-Whan”

“임을위한행진곡”을 부르며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가족.

<Gwangju : 윤태호 기자>

5월 17일, 광주의 구 도청앞 광장에는 지금 5.18 광주 민주화 항쟁 기념식 전야제가 열리고 있다. 구 도청앞 광장에는 2만여명의 시민들이 지난 1980년 5월 18일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피흘리고 쓰러져간 옛 동지, 아들, 딸, 친구들을 생각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눈물을 흘리며 따라부르고 있다.

광주 시민들을, 광주를 피로 물들이게 한 전두환을 구속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5.18 광주 민주화 항쟁 기념식에 참석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 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기념곡으로 제창을 허락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의 지난 30년 상흔을 오롯이 안고 있는 전남매일신문 건물

문재인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참석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 을 함께 제창하게 된다.

광주는 지금 전국에서 몰려든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온 인파로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구 도청앞은 지난 30년전 처럼 불빛으로  밝다. 독재정권을 일소하려는 굳은 의지로 결코 한번도 어두운 적이 없는 빛 고을이다.

우리는 정의파다! 지난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재현하다.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우리는 정의파다. 독재에 무릎을 끓고 사느니 죽음을 택한다. 라는 독재와 맞서서 싸우다 전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메시지는 시대의 어둠을 넘어서서 지난 30년을 한결같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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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6<은우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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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u : Prof. Woogeun Eun>

7) “살아남은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마지막 가두 방송과 최후의 저항 (5월 26일 밤-27일 새벽)

5월 26일 17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 기자들과 마지막 인터뷰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당일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시켰다. 이날 밤 24시, 광주 시내의 전화가 일제히 두절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어차피 씻겨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일단 목욕이나 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목욕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차분히 마지막 전투를 맞이했다.”

5월 27일 새벽: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잠들고자 했다. 죽음도 어차피 잠자는 것이니까…, 도청 앞으로 모여주기를 호소하는 여성의 애끓는 가두방송은 칠흙 어둠이 뒤덮은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메아리쳤다.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때뜨렸다. … 그녀의 목소리는 캄캄한 도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애띤 목청으로 소리치는 동안 울려 나온 말들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슨 말일까? 지금이 마지막이다! 골자는 틀림없이 이것이었다…. 시민들에게… 합류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아닐까?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열리는 문소리, 길거리를 대닫는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광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집안에 들어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문고리를 푸는 소리, 거리에 걷는 발자국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 아무것도….(Hebrt Scott Stokes, NYT Seoul correspondence )

‘시민 여러분 도와주세요! 공수부대가 오늘 밤 도청을 함락합니다.’ 라는 가두방송을 듣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당시 교사 박행삼의 증언) “전투를 하면서도 빨리 날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시민들이 모여들고 그러면 계엄군이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의 증언) ” 잠을 들지 못했다. … 도청쪽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나와달라!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뛰어나갈 용기라 나지않아… (당시 광주대교구 관리국장 박상수의 증언)

“도청 청년들 최후다. 그들은 모두 죽는다” 엉엉 울었다. 신자도 울고, 나도 울고..탈진하여 사제관에서 잠이 들었다 다시깼고, 마지막 가두방송을 들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도청으로 모여 주십시오. 어서 도통으로 모여 총을 나눠서 도청을 사수합시다….(당시 계림동 성당 주임 조철현 신부의 증언) 새벽 3시경 시민군 가두방송을 들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시내 전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우리 학생들을 살립시다.” … 뼈를 깍는 듯한 애절한 절규에 시민들은 흐느꼈다. (윤공희 주교 외)

” 5월 26일 가두방송차량 운전원이 고향인 목포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설마 모두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생각했다. 칠흙 어둠이 뒤덮은 거리를 승용차로 돌며 방송했다. ‘시민 여러분! 도청 앞으로 모여주세요. 계엄군이 쳐들어 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라고 다급하게 호소했다. 나는 이미 며칠간 밤낮으로 헌혈을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계속해왔고, 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웠었다. 시민들은 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방송을 듣고 많은 시민이 모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다 주택가 창문으로 세어나온 불빛이 꺼지는 것을 보며,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불을 끄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청에 돌아와 아무도 모이지 않았음을 확인했을 때, 살 떨리는 배신감을 느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외로움과 막막함, 허전함이 밀려왔다.’ (은우근 교수, 이경희 학생 인터뷰 (2012.5.10)

계엄사는 새벽 3시 30분 군 병력을 광주 전역에 투입하여 5시 10분 경 시내 일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만일 20만 명의 시민이 10일간 금남로에 계속 모일 수만 있었다면, 5월 민중항쟁의 결과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민들은 ‘도청에 나가야 하는데, 그 사람들 지금 죽어가고 있을텐데, 내가 나가야 하는데…’ 라고 마음속에서 외쳤을 뿐 집을 나설 수는 없었다.(주: 계엄군은 25일 도청에서 일어난 ‘독침사건’에서 보듯이 오열을 침투시켜 민중 내부에 불신과 공포를극대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가두방송이 거리에서 울려 퍼질때, 문을 걸어 잠그고,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민중은 마지막 순간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지 못했다.(주: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참조. 이 시는 5월 민중항쟁이 진압된 직후인 6월 2일에 지어졌다.

순수하고 순결했던 생명 공동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완전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5월 민중은 두려움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왜? 하나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현실은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었다. 5월 민중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 하나됨의 신비와 환희를 체험했지만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생명공동체적 연대의 감격과 환희가 강렬했던 만큼 부끄러움과 죄책감, 부채 의식도 더 강하게 자각되었다.

5월 26일 밤 -27일 새벽 사이의 시민군 가두방송은 5월 민중항쟁의 집단 정서로서 죄책감의 형성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 가두방송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지금까지 5.18 연구에서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5월 민중이 80년 5월 22일 공수부대를 시내에서 몰아내고 공유했던 해방감과 환희는 죄책감으로 변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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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5<은우근 교수>

(사진은 전 광주 도청앞 분수대 에서 촛불 시위하는 시민들: 5.18광주 민중항쟁때는 그 곳에 전남도청이 있었다. 현재는 무안으로 이사가 있다. 그때도 그곳에서 촛불 시위를 했다.

<Gwangju : Prof. Woogeun Eun>

3) 부끄러움과 무력감으로 고뇌하던 사제들, 시위를 기도하다(5월 21일)

21일 아침 도시 외곽에서 골목별, 동네별로 시민군에 대한 지원이 활성화되면서, 시위는 광주 전역에서 전 민중이 참여하는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이 날 오전, 광주 지역 본당 사제들 대부분이 호남동 성당에 모였다. (당시 광주시에 소속된 성당은 모두 12곳이었고 사제는 시내 본당 7명, 교구청 근무 2명이었다. 따라서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사제수는 9명이었다. 여기에는 1명의 외국인 사제가 포함된다.). ‘신도들이 사제들을 책망’했다. “이런 곤란한 시기에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민중의 지도자로서 신부들이 앞장서줘야 하지 않느냐. 한시라도 빨리 대주교님을 모시고 플랑카드를 선두오 수습에 나서야 [한다]” 고 요구했다. 김성룡 신부는 당시의 심정을 “부끄러운 일이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 너무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나 자신을 돌아다 본다. ” 고 (“분노보다는 슬픔이” 저항과 명상)표현했다.

마침내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떨치지 못하고 고뇌하던 사제들은 평화로운 수습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의했다. 윤공희 대주교의 재가도 받았을 뿐 아니라, 윤 대주교 자신도 여기에 합류하기 위해 학운동의 숙소에서 호남동 성당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을 인정할 것과 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분노한 민중과 공수부대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자임했지만 실상의 시위를 기도한 셈이다. 이 시위는 계엄군에 의한 헬기에서의 기총소사와 도청 앞 공개 발포로 무산되고 말았다. 신군부의 듸도대로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될 상황이 임박한 만큼 이를 무산시키려고 발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중재자로서 교회의 최초 시도는 계엄군이 거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4)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다 : 계엄군의 공개 발포와 무장 (5월 21일)

한편 사실상 사제들의 시위 기도가 좌절된 시점인 오후 1시경, 계엄군은 금남로 도청앞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발포했다. 5월 민중은 군용 장갑차, 무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30만 명의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치선에서 민중은 계엄군과 백병전과 다름없는 시가전을 벌였다. ” 고래가 [정어리 떼를] 사냥하듯이 ” 시체 또는 부상자들을 끌고 골목으로 흩어진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모여들고 다시 총격이 가해지면 또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고조”되었다. 시민들은 ” 총! 총! 총을 외쳤다.”.

다음 한 시민군 이세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지금 군인들 상대로 하고있는 일 [총으로 군대에 대항하는것]이 잘한 일인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원, 호응하는 모습을 보며 그 [꺼리는 ] 마음이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계엄군의 끔찍한 폭력을 겪으며 형성된 ‘국가가 우리에게 이래도 되는거야?’ 라는 의문은 무장을 계기로 ‘우리가 국가에 대해 이래도 되는 거야?’ 라는 의문으로 전환되었다. 이 증언은 시민들의 인정을 통해 무장에 대한 의문이 확신과 긍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5월민중은 투쟁을 통해 공포와 자기 모멸감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5월민중은 목숨을 바치는 결단을 통해 이룩한 공동체를 자기 자신으로 체험했다. 자기중심적으로 타자화된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민중은 국가 폭력이 강요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전면적 투신. 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하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극복하는성스러운노동과투쟁을 통해 절대적인 국가의 폭력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5월민중은 한나됨의 신비와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공동체의 힘을 깨달았다. 이것은 민중 자신의 전 존재를 건 투신 곧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성스러운 노동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해방과 평등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제 민중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느낀 자기모멸감과 부끄러움은 목숨을 건 투쟁 과정에서 이룬 공동체적 환희의 체험을 통해 긍지로 전환되었다.

5월 22일 : 공수부대가 물러간 ‘해방 광주’에서 시민 자치가 구현되었다.

5월 24일: 사제들이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도청 수습대책위에 전격적으로 참여했다. 남동성당에서 사제들과 모여온 재야 인사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5) 사제들이 무기회수와 시민군 무기로 사수에 참여하다(5월21일-26일)

계엄군과 협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무기 회수가 이루어졌다. 조철현 신부와 남재의 신부가 직접 무기 회수에 참여햤다. 5월 25일 : 사제들이 TNT를 사수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도청 지하에 있는 TNT 를 포함한 시민군의 무기고를 지키기위해 김성용 신부가 남동 성당에서 2명, 조철현 신부가 계림동 성당에서 1명을 모집하여 모두 3명의 청년을 도청 무기고에 배치했다.

6) 사제들, ‘죽음의 행진’을 결행하다. (5월 26일 낮)

5월 26일 오전: 새벽 상무대에서 탱크가 농성광장으로 진격 중이라는 급전을 수신하면서 도청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함께 밤을 새웠던 수습위원들은 극도로 당황했다. 김성용 신부가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죽음의 행진”을 제안하고 수습대책위원 17명 전원 찬동했다.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이 앞장을 섰고 수백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다. 진격한 탱크가 도로를 차단 중인 농촌진흥원 앞에는 더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아침 9시였다. 김성용 신부는 ‘총 맞아 죽을 각오로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5월 26일 오후 : 마지막 협상이 실패했다. 이 협상의 결렬로 중재노력은 파국을 맞았다. 계엄군을 설득하러 갔던 사제들을 포함한 수습위원들은 되돌아와 무기회수를 위해 시민군을 설득하러 나서게 되었다. 계엄군은 처음부터 사제들이 포함된 수습위원의 중재 노력을 인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을 끌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과 시민군을 분리시키는 한편, 시민군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시민군 내부의 분열과 이탈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즈 심재훈 기자의 말처럼 “광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바다에 외로이 떠있는 고도” 였다.

목숨바쳐 이룬 생명공동체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5월민중은 무장과 최후의 결전을 선택하면서 다시 분열을 경험했다. 무장을 계기로 총기를 나누고 그 사용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돌연 그 곳에서 계급 (class)을 보았다. 무장한 민중은 대부분 항쟁 이전에 이 도시에서 언제나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노동자 계급에 속했다. 무장이 시작되자 이전에 이 도시의 주인이라 느꼈던 계급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 분열의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심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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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ing And Questioning of Historical Consciousness 부끄러움 또는 질문하는 역사의식 4<은우근 교수>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Gwangju : Prof. Woogeun Eun>

II. 부끄러움 또는 역사의식의 공동체

먼저 5월 민중항쟁에서 민중과 사제들의 실천을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의 형성과 역사의식의 각성에 초점을 맞춰 재구성하겠다. 필자의 주 관심사가 이 정서의 형성과 발전을 통한 역사적 주체의 교양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재구성은 사제들, 시민군, 외신기자,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1. 5월민중항쟁의 전개와 민중 정서의 변화

광주에 5월이 오면 적어도 금남로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금남로 없는 5월 광주를 생각할 수 없듯이, 카톨릭센터를 빼고 5월의 금남로를 말할 수 없다. 벗겨진 신발들이 나뒹굴었던 금남로 거리 이곳저곳에는 5월 민중의 핏자국이 배었고, 금남로 주변 골목들에서는 절규와 탄식, 외침과 함성이 울렸다.

1)미친 폭력에 대한 공포를 체험한 민중과 사제들,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끼고 국가에 대한 의문을 갖다. (5월 18-19일)

30여 년 전, 금남로 거리에서 벌어지는 공수부대의 인간 사냥과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공방을 목격하기에 카톨릭 센터보다 더 적합한 장소는 없었다.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와 직원들은 인근 빌딩의 시민들과 함께 그 현장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축제도, 유희도 아니었다. 그 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은 끊임없이 교회와 사제의 역할,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럽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며 그에 대한 응답을 실천하게 하는 일이었다.

5월 18일과 19일의 상황을 겪은 사제들은 ‘일생을 통해 처음 본 무지막지한 장면 (신고르넬리오) 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윤공희 대주교) 무차별 살상을 저지르는 ‘공수대원들에 대한 두려움'(조철현)과 ‘이런 끔찍한 상황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감( 이영수)’을 느꼈음을 토로하고 있다.

윤공희 대주교는 19일 카톨릭센터 6층 집무실에서 인근 골목에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서는 빨리 병원에 데려가서 응급 치료를 받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그 사람은 일어나려고 비틀거리다 다시 쓰러졌다. 그때 윤 대주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성경의 비유를 떠올리며 ‘저걸 보고도 내려가지 못하니 내가 강도당한 동족을 외면하는 제관이 아닌가’리고 자책했다. 윤 대주교는 다른 곳에서 ‘나 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쫒아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 아프고,…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라고 “5.18민중항쟁사료전집” 에서 밝히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도 윤 대주교가 5월 19일 “괴로운 심정”과 “양심의 가책”을 자신에게 고백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정규완 신부(당시 북동성당 주임)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군인들이 성당까지 쫒아와 학생들을 찾으려고 뒤졌다는 보고를 받고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두려움을 이기고]앞장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반성한다.

인간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공수부대의 미친 폭력에 대해 분노와 공포을 체험한 5월민중과 사제들은 동시에 공포를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도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게 바로 인간인가? 개다. 도야지다” 라는 김성룡 신부의 고백은 바로 이런 반성이다. “6.25 때도 이러지 않았다. ”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마구 사람을 죽인대요”, “이북사람들이 내려온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안 할 것이다” 등의 표현은 곧 “국가가 우리에게 이래도 되는 거야?”라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었다.

2)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다 : ‘생명공동체’의 연대감이 가장 고조되다(5월 20-21일)

20일 오후부터 공동체적 투쟁이 본격화 되었다. 20일밤 시위에 영업용 택시와 버스, 트럭등 약 200대의 차량과 20만 명의 민중이 참여했다. 당시 광주 인구가 73만명이었으니 집보는 사람, 노약자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민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 셈이다. 이날 야간 시위를 도청 옥상에서 목격한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의 취재기는 당시 상황과 5월 민중의 정서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우리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이 갖는 그토록 피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                    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방송국, 파출소 등이 불타 시내 곳곳에서 검은 연기                    가 치솟는 가운데 광주 외곽으로부터 도청앞 광장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                        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피속에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전율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                       른다. 아리랑은 애잔한 음률이 전하는 서정보다 더 강렬한 욕구와 울분, 그리고 불타는 전의                   를 함축하고 있음을 처음 느꼈다.

20일 밤 5월 민중은 신비스런 ‘공동체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 잔치는 민중 스스로 목숨을 바쳐 준비한 것이었다. 5월민중은 자신을 “개나 도야지”로 만든 원시적 공포에 처절하게 맞섰다. 5월 민중은 공포에 결코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연대하여 싸웠다. 1980년 5월 25일, 김성룡 신부의 미사 강론의 일부는 당시 상황과 시위에 나선 5월 민중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제야 말로 우리는 결단의 때를 맞았다. 비굴해져서 짐승같이 천한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운 민주 시민으로서 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 이날 시위는 밤을 새우며 계속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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