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여기에서 문명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시민이 되다’ 혹은 ‘세련시키다’ 등의 뜻으로 쓰인 동사 civiliser 가 동명사로 바뀐 문명civilisation이라는 개념에는 근대 서구 국가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 즉 과학과 기술을 통한 생활 조건의 변화,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와 법체제, 예술과 학문 등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 이성을 통한 역사 진보에 대해 희망을 걸었던 계몽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헤르더를 위시한 대부분의 근대 지식인들도 거의 한결같이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이 문명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는데, 칸트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헤겔 역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인들을 일컬어 이른바 ‘문명의 선교사(die Missionarien der Zivilisation)라고 부르면서 세계 전역에 서양의 사고와 생활 양식을 확장하는 일을 인류률 위한 커다란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문화철학자 반 퍼어슨의 지적처럼 이제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 과학, 종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만남, 죽음과 삶, 성적 사랑, 재화 획득, 상품의 제조 등 모든 것이 문화를 구성하게 되었다. 문화를 이처럼 넓은 의미로 인간들의 삶을 위한 모든 생산 활동 혹은 그 결과물이라고 할 때, 이때의 생산이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활동과 그 산물이 아닌 모든 노동의 결과물, 즉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의 모든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세계에 대해 어떤 일정한 규정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세계를 개선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는 환경세계를 개선시키려는 인간들의 의지, 그 의지가 반영되어 나타난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서의 모든 생산물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 퍼어슨은 문화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본다. 왜냐하면 문화는 항상 변화에 관한 이야기요, 기존 문화 패턴의 변형에 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양한 행동 양식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의 변화 과정 자체로 파악된다. 문화는 예술 작품이나 책, 생활 도구 등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또 박물관과 대학 건물, 회의장이나 공공서류등을 그냥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문화는 이제 도구와 무기 제작, 춤과 서약송(誓約頌) 의식, 육아법과 정신 질환자 치료법, 성애와 사냥, 의회 소집과 칵테일 파티 등 다양한 행동 양식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문화 개념은 이제 훨씬 더 넓어졌고 역동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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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문화의 이념

동양의 전통문화는 농경문화다. 농경이란 일정한 공간의 토지를 이용하여 계절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기후 조건에 맞추어,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재화의 생산은 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노동, 즉 그 생산과 가공의 인적 최소단위는 가정이다. 이처럼 가정으로부터 농경문화의 모든 것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인간의 전란 등을 극복하기에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기에, 농경사회에서는 노동에서 관, 혼, 상, 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들을 가정을 단위로 형성된 마을공동체 안에서 영위한다. 그리고 ‘이웃’과 ‘마을’은 주로 혈연과 친분관계로 조직되므로, 이들의 인간관계는 이해타산을 초월한 원초적 감정으로 형성된다. 전통사회에서 ‘효(孝)’와 ‘제(弟)’가 강조된 것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가 한 가정 내의 질서를 구현하는 정감행위라면, ’제‘는 공동체 안의 관계질서를 선도하는 정감행위이다.

농경은 자연질서에 따라 일정 공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농경에서 생산하는 재화는 주로 동, 식물 등을 생육하는데 쓰여지고, 그것의 생육은 천지자연의 화육(和育)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다만 그 결과를 가지고 이용후생(利用厚生)할뿐이다. 동시에 농경은 공간(토지)의 한계와 시간(계절)의 변화를 절대적인 여건으로 삼아 ‘생산(生産)과 제산(制産)의 원칙’을 강구했다. 이것이 바로 농경은 ‘생성된 재화’만을 이용하지 ‘내재되어 있는 자원’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왜냐하면 농경이라는 생성체계에 놓여 있는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이용하는 것을 곧 되돌려 주는 과정이므로 농경에 의한 자원의 생성과정은 계속될 수 있으나, 이 생성체계에 놓여 있지 않은 자원은 그 자체가 유한한 것이어서 꺼내어 쓸 경우 고갈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경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자원을 채굴하여 쓰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원의 이식을 최대한으로 취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천지의 화육생성작용을 돕는 일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생성체계에 속해 있는 땅은 최대한 개간하여 농경지를 넓히고(地盡其利), 개간된 땅에 알맞는 곡식을 적절한 시기에 뿌리고 가꿈으로써 가급적 많은 수확을 확보하여 그것을 가급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요긴하게 쓴다(物盡其用).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물건을 아껴 쓰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줄이지 못하면 한정된 물질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욕망충족은 욕망의 자가발전이라는 족쇄에 걸려들어 결국은 더 많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한한 물질은 고갈되고 사회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설계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생활관이다. 같은 물량이라도 그것을 아껴쓰면 오래 가고, 같은 재화라도 아껴서 잘 이용하면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이것이 ‘절용애물(節用愛物)’의 정신이다. ‘수분지족’과 ‘절용애물’은 물질 쪽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속한 ‘도덕’의 문제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정덕(正德)’이라고 했다. 이처럼 유한을 극복하고 ‘안빈락도(安賞樂道)’를 추구한 것이 농경문화의 슬기이다. 따라서 농경문화는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들과 화합(順天應人)하는 순리와 평화의 삶이며, 인간관계의 질서가 ‘정감’ 위주로 유지되고 해결되는 삶이다.

한편 서양의 문화 이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παιδεία; (영어) paideia;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교육, 학습”; “일반교양 교육” 이란 의미의 철학과 인식을 바탕에 둔 문화 이념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식과 행위의 규범을 인위성 또는 자의성에서 찾지 않고 퓌시스(Physis), 즉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고자 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역시 퓌시스에 의해 주어진 것을 퓌시스에 알맞게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활동이 된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의해 파괴된 퓌시스와 노모스(Nomos)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파이데이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면서 퓌시스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탁월한 품성과 자질, 즉 ‘아레테’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길, 즉 파이데이아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파이데이아, 특히 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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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Marvel’s Black Panther the new “Lion King”? – Movie Review

(Image courtesy of Google Images)

< Washington : Esq. A Kim>

Marvel’s Black Panther has been a huge success worldwide, bringing in more than $1.2 billion since its February Launch. It is also the first movie to hit the Saudi theaters since its government finally ended its 35-year old ban on cinemas. This is exciting news for both Black Panther and Saudi Arabia.

While watching Black Panther, there are a couple of key themes that the plot tries to outline:

  1. #Betrayal
  2. #Revenge and Loss of Legitimacy
  3. #Redemption

During the movie, I couldn’t help but see a certain parallel to another Hamlet-inspired movie, Lion King. Not because they both happen in Africa (although they both do indeed occur in Africa), or because both involves a monarchy. The basic theme is relatively similar as noted above.

(Image courtesy of Google Images)

I don’t want to spoil the movie for anyone (lest someone in Saudi Arabia or elsewhere under a rock comes across this review by chance), so I plan not to go too heavily in depth in my review. Now, there are many moving parts in the plot for Black Panther, surprisingly, and they tend to not just drop off like in some movies; a simple, cursory review of the plot will show that most of the side plots in Black Panther actually decides to round up and make sense by the end, while leaving just a couple of questions open for later plots to cover, which I hope, will be covered in Black Panther 2, confirmed due to its huge success.

(Image courtesy of Google Images)

The movie is based on a fictional country of Wakanda, an African country enriched with a metal of the strongest quality, which has allowed it to develop and protect itself from outside influences until modern times. With the events of the last Captain America movie, Captain America: Civil War unfolding, Wakanda is now without a King, and T’Challa, the son of the now dead King T’Chakka, is about to take the throne. So why does betrayal enter into the picture? Well, that takes us to the “flashback” part of the beginning of the movie, with the arrival of a flying vessel at a rundown apartment in Oakland, California, where the then King T’Chakka is about to walk in on his younger brother N’Jobu. Here, we’re not shown what happens between the King and his younger brother, but given the situation, there has been an attempt at betrayal by one party, and maybe even betrayal on both parties, depending on how you look at the situation. In Lion King, the King of Pride Rock, Mufasa is betrayed by his brother Scar. As it is a children’s movie, the betrayal is only really seen as being done on one unlike in the case of Black Panther, argument could be made that betrayal could be felt on both sides.

After, T’Challa passes his tests and becomes the King of Wakanda, but not for too long. Someone from the past (his father’s past), comes back for revenge, not necessarily or directly on T’Challa, but perhaps on the whole Wakandian political structure. He is T’Challa’s cousin, Erik Killmonger. Some will argue that Killmonger isn’t necessarily there for revenge of his past. Killmonger actually plays a complex role, making him more interesting than T’Challa, the main character. There could be a whole another article to explain Erik Killmonger, but it doesn’t fit here. In general though, he comes with many feelings, one of which is a desire for revenge as well a desire to abuse the power that comes with being a Wakanda monarch, even if his intentions are somewhat well-meaning. In the battle between Killmonger and T’Challa for the throne, T’Challa loses his claim over the throne, as Killmonger wins the semi-ritualistic battle for the throne. T’Challa is lost, and Killmonger receives the formal induction into Wakandan throne, much to the chagrin and fear of most of the Wakandan court. Similarly in Lion King, when Scar kills Mufasa, he then pins the blame on the young Simba, and tells Simba to “run away,” before unleashing the hyenas on Simba to kill Simba. Of course, the hyenas fail, and Simba manages to escape. However, Simba runs away, and plans to never come back, fearful of what would happen to him should he return. In the meantime, Scar has taken control of Pride Rock and begun using the resources around Pride Rock for his and the hyenas’ own excessive enjoyment. At this point, both T’Challa and Simba have lost their rightful claim to the throne, and have lost all support.

We know from both films, that there is then, a gathering of allies for T’Challa in Black Panther who finds him and fights for his return to the Wakandan throne, as well as in Lion King where Simba is given an unlikely set of allies to return to Pride Rock, where he is to claim his throne back, thereby redeeming the “rightful throne” from the “invading villains,” Killmonger and Scar respectively.

What’s so interesting is that both Simba and T’Challa are leaders. They both have to prove their leadership in some aspect, but in reality, it is the help and support of those around each of these characters that highlight exactly what a leader needs for leadership.

The details of both works differ, no doubt. The target audience is different, and even the ultimate messages involved are different between the two movies. One is closer to a comedic children’s movie version of Shakespeare’s Hamlet, while the other includes a broader cultural and political significance. Nevertheless, it is interesting that these two films show a similar theme in its overall plot points to create two very different yet similarly popular work.

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멜로드라마 장르를 통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들에게 그 과잉적인 감정적 동화는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많은 고난과 억눌림, 즉 한의 또 다른 표출이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멜로드라마의 신파성을 근대적인 서구 멜로 드라마에 비해 낙후된 전근대적인 정서로 폄하하는 것은 이 장르의 대중성의 본질과 미덕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다. 오히려 이처럼 한국 멜로 영화의 토대를 우리 고유의 정서인 한에 둠으로써 한국 멜로 드라마의 다시 읽어내 복원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결국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현실 문제를 지나친 개인 드라마로 풀어간 신파성에 대한 기존의 비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영화가 대중 관객들과 폭발적으로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과 1956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춘향전>은 유교적 질서 속에서 가치 평가된 여성 덕목인 정절을 재주장하고 재인가하는 작품으로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와해된 여성들의 전통적 덕목에 대한 일종의 경고적 차원에서의 훈계로 읽을 수 있고, <자유부인> 역시, 표면적으로는 새롭게 시작하는 근대적 사회 내에서 한 주체로서 여성 즉 ‘자유부인’을 내세우지만 이들의 성적 욕망을 비난하고 처벌함으로써 내면적으로 전통적 덕목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한편,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쟁으로 인한 원초적 궁핍이 어느 정도 극복된 후 여성은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받으면서 단순한 퇴폐의 기호가 아닌 좀더 자립적인 행위의 수행자로 등장한다. 압축적인 경제발전으로 인해서 매우 불균등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발전이 가능해졌고, 이 과정은 여성으로 하여금 새로운 주체적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이런 변화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7Depp17waI

영화의 스토리는 젊은 여성과 유부남 사이의 은밀한 애정관계, 즉 불륜을 다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여성은 아들을 낳아 미혼모가 된다. 아들이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에게 보낸다. 그러나 아들을 몰래 지켜 보아야했던 그녀는 결국 아들을 스스로 부양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도 과도하게 감상적이며 우연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서사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여성주의 비평가들의 주목을 끈 것은 물론 바로 이 정서적 과잉이고, 영화의 주체적 결말이다. 영화는 여성 주인공의 고통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과더불어, 남편의 외도를 인내해야 하면서 이 외도로부터 생긴 아이를 키워야 하는 본처의 고통까지도 함께 포착한다. 따라서 이른바 모성 멜로드라마로서 이 영화가 여성 관객을 사로잡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양가적 모성애에 있다.

모성이라는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구성물을 다루면서, 이 영화는 일단 제도적으로는 가족을 이탈한 모성을 가혹하게 비난하지만 다른 한편,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덕목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데, 이것은 한국문화가 모성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호 대립하는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여성 관객들은 눈물, 절망, 그리고 분노를 통해서 자신들의 감정을 완전히 가동시키면서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자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이 가부장 체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이해로 귀결될 수 는 없다. 이러한 인식이 과도한 정서적 반응과 한이라는 근원적인 감정의 분출과 연결됨으로써 매우 감정적인 일별로 끝나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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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둘째, 방법론에 있어서 여성주의(Feminism)적 관점은 한이라는 정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매우 유효하다.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가장 현대적인 매체인 영화가 오랫동안 다른 예술 문화 분야에 비해서 남성 우위적인 혹은 남성 독점적인 영역으로 남아있다면, 즉 영화의 표면적인 논리성 뒤의 특정 이데올로기가 남성들에 의해서 제공되어 왔다면, 영화 텍스트에서 여성의 소리와 입장은 배제되어 있을 것이고 여성 고유의 담화를 읽기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주의 영화이론의 출발선은 대중 영화 분석을 통해 여성의 이미지나 역할이 가부장적 시각에서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밝혀냄으로써 근본적으로 남성 중심적 시각과는 구별되는 방식에서 대중문화 특히 영화라는 텍스트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하려는 데 놓여있다. 그러므로 여성주의 비평은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남성 중심적 시각과는 구별되는 방식에서 여성의 현존하는 관심에 입각해 한국영화라는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 후반 사회운동으로서 등장한 여성주의는 문학, 광고, 텔레비전, 영화 등과 같은 매체들에서 여성이 어떻게 묘사되는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으며, 그 결과 이러한 대중매체들이 한결같이 여성들을 남성위주의 관점에서 수동적 이미지로 혹은 남성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특유의 상업성으로 인해서 영상매체는 이러한 양상이 더욱 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헐리우드 영화를 중심으로 여성의 이미지나 역할이 이들 매체에서 어떻게 왜곡되게 재현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를 위해서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과학적 방법을 차용했는데, 이중에서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통해서 화면과 관객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의미 생성이 영화 텍스트의 이해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규명하였다.

2. 고전적 멜로드라마

영화 탄생 초기부터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멜로 드라마는 주로 여성용 영화로 제작되고 여성을 위한 오락물로 소비된다는 인식으로 인해서 사회적 의미와 관련해서 진지한 연구의 논제로 대접받지 못해왔다.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리얼리즘이 거세되고 판타지만 강화된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시키는 위험한 장르로 공격당하였고, 보수진영으로부터는 정서적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성을 상품화하는 유해한 장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다가 60, 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여성주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새롭게 읽혀지게 되면서 멜로 드라마는 보다 공적인 영역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장르로 인정되었다. 멜로 드라마의 장르적 관습과 이데올로기적 효과,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중층적 독해는 이 장르를 사회 관습의 질서와 규칙 그리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개인 연애 담론을 내러티브 욕망으로 풀어 가는 성 정치 이데올로기의 공간으로 재 정립하게 하였다.

물론 한국에서도 멜로 영화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남녀간 혹은 가족간의 애정이라는 매우 사적이고 빈약한 주제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흥행 장르로서의 멜로 영화만을 추종함으로써 타 장르의 제작기회가 박탈되고 한국영화의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었다는 등의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부터 제작된 일련의 멜로 영화들이 특유의 신파성을 과도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싸구려 감상주의에 편승한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 ‘연애환상을 가진 주부들이 즐겨보는 드라마’, ‘여성용 장르’ 등으로 치부되었고 이것은 ’고무신 장르‘라는 비하적 표현이 잘 보여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한국 영화에서도 영화사회학적 관점에서 관객론과 대중 영화론, 영화의 성 정치학에 관한 담론 등이 증폭되었고 이 과정에서 멜로 드라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해졌다. 당대의 여성관객들이 이 장르를 통해서 자신들의 감정을 과장되게 표출하였다면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을 비롯한 여러 구성 요소가 이러한 상황들을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관객들은 이 장르 특유의 정서에 집중하고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멜로 드라마는 여성의 한을 주제로 하는 여성 영화의 플롯과 양식 한가운데에 위치하게 된다. 이 장르에 대한 부정적이고 제한적인 평가와 통념에도 불구하고, 멜로드라마는 여전히 대중영화, 특히 한국 영화와 관객 사이에 가장 영향력 있게 공유되는 영화적 관습의 일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장르는 멜로드라마의 하부 장르로서의 역사물이다. 전통적인 왕조 드라마에서부터 최근의 수정주의적 역사영화까지 상당한 스펙트럼을 통해서 심리적․사회적 문제들이 응축되어 있는 여성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읽고 소비하는 관객들이 여기에서 제시된 여성의 한 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특정한 시대적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게 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역시 일제식민지와 해방을 거치면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나 활동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도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통해서 남성들의 사회적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데올로기와 규범을 사회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특히 60년대 이후의 공업화 과정에서 권력주체는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를 체제의 정당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는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왜곡되고 굴절된 재현은더욱 심화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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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Screen as Reflection of the Ego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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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중매체이론에서 전통적인 ‘수용자 audience’ 개념은 ‘익명의 상호 격리된 대단위 집단’으로서 균질화, 균등화 그리고 수동성과 피동성으로 특징 지워진 채 지배 이데올르기의 재 생산 기능을 묵묵이 수행하는 소극적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대중 mass’ 으로서의 수용자는 대중매체의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송신자의 표적이 되는, 달리 말해서 송신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설득 가능하고 조종 가능한 수동적 존재를 의미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문화비평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대중문화 수용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적인 수용자 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수용자와 매체 간의 힘의 관계 설정에 있어 매체에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고 있어 수용자는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둘째, 수용자와 매체의 관계 이해에 있어 기본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전달적 모델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확정된 메시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고, 중요한 것은 효과의 측면이라는 고정된 관점이다. 셋째, 수용자에 관한 논의가 매체의 이미지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라는 거시적 관점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전통적 수용자의 모습은 언제나 취향이 천박하고 지적으로 열등한 제 3자로서 그려진다.(문화연구이론, 정재철)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문화 수용자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다양한 실증적 연구와 논쟁을 통해서 전통적인 수용자상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현대 사회의 수용자는 선택성과 적극성에 입각한 이성적 존재로 이해되었고 매체성 자체도 수용자의 능동성을 전제로 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영화에서의 수용자의 태도는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영화는 초기 단계부터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인해서 다른 어떠한 매체보다도 위험한 매체로 백안시되거나, 역으로 그 영향력을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였다.이렇게 볼 때 탄생된 지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다른 매체에 비해서 대중문화이론에서 집중적인 관찰의 대상이 된 중요한 이유가 바로 각 개인, 즉 관객에게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매체 특유의 영향력에서 비롯되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직접효과이론’으로 불리우는 이러한 견해, 즉 영화 생산자의 의도에 대해서 수용자로서 관객은 단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관점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것은 오랫동안 영화 텍스트의 수용자로서의 관객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지연시켰다. 물론 영화를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에는 그동안 많은 수정과 변화가 있어왔다. ‘직접효과’ 이론으로 부터 시작하여 각 개인이 영화가 지닌 메시지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에 관한 논의는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가는 심리가 사회적 맥락, 영화관의 유형, 그리고 영화가 지닌 내용의 유형과 같은 요소들의 다양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따라서 영화관람의 경험은 영화서사에 집중하도록 하는 테크닉을 기꺼이 무시하고자 하는 성향과 관련된다. 영화 산업에서는 영화관객의 심리학을 어떤 특정 영화의 효과를 측정하는데, 그리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흥미를 유발 시키는데에 이용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화를 수용함에 있어 대중은 여론 선도자(Opinion Leader)의 지도를 받기도 하지만, 나름대로의 잣대를 갖고 평가하고 난 후 특정 영화 현상에 대해 수용 혹은 저항의 태도를 취한다. 즉 자신이 처한 물질적 조건과 생활방식 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수용하고 해독하게 되며,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 상의 어느 한 지점에 해당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 특유의 해독과 변용의 형태가 각 집단의 독특한 특성을 반영하는 하위문화를 구성하고, 지배 문화에 의식적, 무의식적 대응을 하게 된다.

이처럼 생산자의 특정한 의도에 대한 관객의 수용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그리고 일률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수용자간의 상호관계 혹은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할 때만이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가설은 성립하며 이는 달리 말해서 영화의 다양한 영향력은 메시지의 수용에 있어서 관객의 능동적 해석과 자기화의 과정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수용자의 기대지평이라고 부른다면, 수용자의 사회계층, 사회적 규범에서부터 매체에 대한 기존의 경험에 이르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이러한 기대지평은 관객에 의한 ‘선택적 수용’의 주요 원인이 된다. 물론 기대지평은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정적인 것은 아니며 역동적이며 변화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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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and Space are Inextricable- 5(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그러면 영화는 이러한 시.공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영화는 시간적으로 조직화된 공간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공간은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하지 않는 정적세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공간은 정적인 성질은 잃게되고 시간과 결합된 동적인 세계로 바뀌게 된다. 공간의 부분들은 시간적인 순서로 정리되며 시간적 리듬을 가진 시간적 구조의 일부가 된다. 예를 들어서 클로즈업은 단순히 부분의 공간적 확대라 아니라, 극적 시간과 결합된다. 어떠한 요소(인물, 집단, 풍경 등)로 구성되어 있든, 서로 다른 공간은 시간적 순서로 배열되며, 특수한 경우 다른 결과를 얻기 위해서 다른 시간 배열을 선택하게 된다. 공간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는 바로 시간 차원이다.

영화에서 모든 장면은 현재라는 시제를 갖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화면 속의 사건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라는 사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시간 의식이다. 시간 차원은 시간의 공간화 혹은 공간의 시간화라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법이 몽타쥬이다. 장면을 변화시키지 않고 순서를 바꿔 놓을 경우 시퀀스의 의미가 변화하는 가를 푸도프킨의 고전적 실험이 잘 보여준다.공간을 통해서 인식되는 세계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 혹은 정보를 흔히 오감이라 불리우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 얻는것과는 달리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내적이며 심리적이다. 시간을 객관화 하려면 또는 그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려면 시계, 태양, 별, 조류, 성장 등의 공간 언어로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영화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취하는 바, 다른 공간을 보여 줌으로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게 된다. 즉 영화는 시간의 경과라는 개념을 공간 차원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기 위해서 같은 공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무언가 움직이고 달라져 있을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공간적인 언어가 달라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혼합되고 교환되고 서로 영향을 준다. 시간이 공간화되고 공간이 시간화된다.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란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흔히 영화를 ‘시’ 공간 연속체(space-time cautinnum)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공간뿐이지만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은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배열될 수 밖에 없고 시간이라는 형식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이것이 영화를 현실 또는 다른 예술과 구별시켜주는 것이다. 90분 혹은 120분이라는 시간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강령한 체험의 시간이다. 같은 서사적 양식을 취하지만 연극에서는 연기력이, 문학에서는 언어의 기법이 본질적 기능이라면, 영화에서는 스크린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공간과 시간의 변화가 본질적 기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 세계의 객관적 시간을 영화는 어떻게 변형시키는가? 다시 말해서 영화 특유의 극적이고 율동적인 지속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화에서 시간은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된다. 물리적 시간, 심리적 시간, 그리고 극적 시간이다. 물리적 시간이란 움직임이 촬영되는 시간, 즉 스크린에 영사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보통 러닝타임이라고 말한다. 심리적 시간이란 관객이 영화를 볼때 경험하는 시간에 대한 주관적이고 정서적 시간을 의미한다. 극적 시간이란 영화속에서의 어떤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을 말한다. 한 편의 영화는 같은 물리적 시간을 통해서 하루 동안의 사건을 그려낼 수도 있고, 수 십년 동안의 사건을 그려낼 수 있다. 물론 관객들은 이 세 가지 시간이 한 영화 속에서 동시에 나타나며 서로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영화는 물리적인 세계의 움직임을 시간을 통해서 스크린 위에 그려낸다. 이때 현실 세계에서의 움직임은 정확하게 동일한 시간으로 스크린에 전개된다. 그러나 두 현상의 전개 과정은 다르다. 스크린에서의 전개는 하나의 정사진 (still) 이 48분의 1 속도로 영사됨으로써 진행된다. 정상적인 속도는 1초에 24프레임이지만 하나의 정사진에서 다른 정사진으로 옮겨가는 동안에 잠시 어두워지므로 48분의 1초로 정사진이 바뀌게 되는 셈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사진 한 장 한 장은 고정된 형태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연속적으로 움직일때 운동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각은 잔이라는 불완전성 때문에 이렇게 미세하게 분화된 장면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먼저 본 그림의 인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그림을 겹쳐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청각이 미세한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듯이 시각도 미세한 움직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속적인 그림들에 의해서 움직임이 시간적으로 재현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필름이라는 재료와 촬영기로서 이러한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조작된 그림에 의한 인위적인 시간에 의해서 영화는 재현적 움직임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조작의 대표적인 기법으로는 패스트모션, 슬로우 모션, 스탑모션,플래쉬백, 프래쉬프론트(포워드)등이  있다.

한편, 영화에서의 심리적 시간이란 하나의 정신적 현상으로서, 시간의 경과에 대한 우리들의 주관적 혹은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시간 경과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일차적으로는 외적인 감각에서 비롯된다. 시계바늘, 시계 소리, 심장의 고동, 맥박 등을 통해서 객관적이고도 규칙적인 시간을 의식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의식은 주관적이며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 식케에 대해서 다영하다. 어떤 일에 몰두할 때 그 일이 즐겁거나 행복하면 시간은 빨리간다. 그러나 지루하거나 불행하면 시간은 느리게 간다. 만약 우리가 미래에 어떤 일을 염려나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면 시간은 느리게 갈 것이다. 영화속의 사건이 극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이 사건이 관객의 정서에 영향을 주게되고 이것은 다시 관객의 주관적인 시간의식을 형성한다. 이러한 시간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는 서스펜스와 리듬, 템포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의 극적 시간을 설명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모든 예술장르에서의 시간은 실제 시간보다 어느 정도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고대에 설정되었고 17.18세기 고전극작가들에게 까지 존중하였던 연극의 3요소에 의하면 3시간 내지 4시간으로 압축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4시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2,3 시간의 한 연극 작품에서 한 사람의 긴  생애나 여러 세대의 삶이 묘사될 수도 있고, 동시에 현실적 시간과 동일한 시간이 극 안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 영화도 이와 동일한데 예를 들어서 대부분의 역사물이나 서사적 작품에서는 한 영화속에서 여러 세대 혹은 긴 세월이 흐르는 반면, 영화 속의 극적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극적 시간 역시 심리적 시간과 동일하게 패스트 모션, 슬로우 모션, 스탑 모션, 그리고 프래쉬 백 등을 이용해서 시간을 처리함으로서 효과를 볼 수 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생략할 것인가, 대사는 얼마나 빨리 진행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가가 서로 합리적인 논의를 거쳐서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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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and Space are Inextricable- 3(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3. 시간의 두 가지 속성에 대하여,

시간은 두 가지의 중요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움직임과 변화라는 형태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은 연속된 흐름이다. 연속된 움직임이나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 즉 영원 불변한 것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시간과는 무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으며, 흐름 속에서 한번 지나간 것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이로 인해서 한번 체험된 것은 다시는 동일한 방식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이른바 ‘시간의 비가역성’ 이라는 시간의 이런 속성이 아쉬움이나 후회와 같은 감정 뿐만 아니라 타임 머신과 같은 환상적 욕망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시간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인지한다. 하나는 개념적이거나 물리적 도구를 사용해 측정되는 시간, 즉 오전, 오후, 어제, 오늘 1시간 2분 3초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적 개념이나 보편적 기준에 의해서 시계와 같은 측정 도구를 통해 인지되는 물리적 차원의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의 감정적 상태나 육체적 상태의 변화에 의해 경험으로 인지되는, 즉 생각의 전개라는 인간 활동 전반을 통해 느껴지는 심리적 차원의 시간이다. 이때 전자를 객관적 시간, 후자를 주관적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객관적 시간은 양적으로 측정되고 계산된 시간으로서 이러한 시간은 개인, 사회, 문화와 상관없이 어디에서나 동질적이고 보편적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각자 동일한 시간에 출근하고 기차를 타고 영화를 보며 약속에 늦지 않는다. 동일한 간격으로 나누어진 객관적 시간들을 공유하며 시간표를 짜고 약속을 조정하며 미래의 일을 계획한다. 시간 단위로 결정되는 자동차의 속도는 교통법규 위반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일을 한 시간의 합계는 봉급과 퇴직금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객관적인 시간은 현대사회에서 사업, 노동, 이동, 투자, 인간관계 등 모든 인간 활동을 조율하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 되었다. 시계는 긴간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을 상징한다. (현재 세계 공인의 가장 정밀한 시계는 세슘 원자에 마이크로파 빔을 쏘아서 시간을 측정하는 세슘 시계(또는 원자 시계) 이다. 이 시계는 초당 9,192,631, 770(약 92억억 ) 번 진동하는 세슘 133 원자의 특성을 사용한 것으로 1초를 약 92억 번 쪼개서 측정할 수 있는 정밀도가 있고, 3,000만년에 1초의 오차가 생긴다. 1967년에 세계적으로 공인된 이 세슘시계에 의하면 1초는 “세슘원자가 9,192631370번 진동하는 시간”이다. 이제 1초는 더 이상 지구의 자전 시간을 잘게 쪼갠 대략의 시간이 아니며, 절대적인 객관적 시간을 측정해주는 기계의 발명에 의해서 시간의 세계화는 이루어졌다. 경제적, 기술적, 정치적 이유들 때문에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고자 했던 세계인들의 욕망을 이 시간이 충족시켜  준것이다.)

이에 반해, 베르그송은 인간의 주관적 시간을 ‘지속(Duree)’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이 ‘지속(Duree)’을 의식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경험되는 시간성으로 규정한다. 시간의 경험과 생각, 감각, 지각, 감정 등과 같은 내적 변화의 지각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변화들이 의식에 의해 ‘지속’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지곳은 지성에 의해 수학적으로 계산된 시간과는 달리, 주관적이고 질적인 시간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이러한 지속 개념을 통해 현재를 수학적인 계산적 순간이 아니라, 즉각적 과거 (Passe Immediat) 와 즉각적 미래 (avenir Immedian)를 포괄하는 지속적 순간으로 규정한다. 존재가 시간을 느끼려면, 일정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의식을 갖는 행위 자체가 곧 현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재는 일정 정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에 의해 지각되는 현재는 내가 지각한 순간 이미 과거가 되는 시간과 아직 지각되지는 않지만 이미 내 의식이 향하고 있는 미래를 포함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내가 나의 현재라고 부르는 심리적 상태는 즉각적 과거에 대한 지각이자 동시에 즉각적 미래에 대한 결정이어야 한다. 베르그송 1939 :153) 따라서 지속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갖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삶의 풍부함이 축적되는 질적인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을 양적으로 특정한 척도를 이용해 나누거나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속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자의식은 지각된 과거를 바탕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이것이 곧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근간이 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즉각적 과거는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과 행동이 동시에 존재하는 두께가 있는 시간이다. 현재는 행동속에서 다시 현제화되는 추억(souvenir) 을 포함하는 지속적 순간이다. 현재가 추억의 재현 재화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기억 (memoire) 은 현재에서 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의 전진이다. 인간의 의식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현재 속에서 재구성하면서 삶을 보다 풍부하고 보다 새로운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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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and Space are Inextricable- 2(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2.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로서 제논의 운동부정이론은 스승인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한 존재불변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이다. 그의 역설적 주장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이(二)분(分)의 역설’, ‘경주의 역설’ 그리고 ‘날으는 화살의 역설’ 이다. 이중에서 ‘날으는 화살’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분의 역설’을 보면 어떤 지점 A 에 도달하기 위해서 한 운동체는 우선 출발점에서 지점 A 까지 전체거리의 절반을 움직여야하고, 그 다음에는 나머지의 절반을,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을,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 이런 식으로 무한히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전체 거리를 주파한다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운동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 ‘경주의 역설’도 비슷한 논리다. 빠른 발을 가진 아킬레우스는 느린 거북이와 경주를 시작한다. 이때 거북이의 속도는 아킬레우스보다 열배 정도 느리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출발은 아킬레우스는 A지점에서, 거북이는 이보다 앞선 T 지점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제논은 아킬레우스가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T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아킬레우스가 달린 거리의 1/10 거리만큼 나아가기 때문에 거북이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항상 아킬레우스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날으는 화살의 역설’에 의하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로의 매순간 화살은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화살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화살이 그 순간 정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살은 날아가지 않고 영원히 정지해 있는 것이다.

제논은 왜 이러한 학설을 주장했을까? 그리고 그 오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제논의 오류는 운동체가 지나간 궤적을 구체 지속 속에서 체험된 운동 자체와 혼동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운동을 측정하는데 쓰이는 공간은 실상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는 분할이 불가능하다. 운동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의 진행 자체, 다시 말해서 계기적인 위치들과 그 위치들의 종합인데 제논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자가 등질적인 공간이라는 양의 집합이라면, 후자는 시간이라는 의식내부의 질의 차원인데도 평면위에서 좌표화 한것을 운동의 전부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좌표와 하는 것이 운동을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고찰하는 데는 편리할 지 모르나 운동의 본질적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은 그 본성상 연속적이지 분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운동이 보여주는 이러한 질적, 구체적 지속은 베르그송에 의해서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오성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연역논리가 시간의 부정이라는 것도 쉽게 증명되는데 그 이유는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연역해 낸다는 것은 두 명제가 동일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미래를 연역해낸다는 것은 미래와 현재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역논증에서의 논리적 동일성은 시간적 계기를 사상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결과를 원인에 환원시켜 동일시함으로써 시간적 비 가역성을 모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연역 논리가 실패한 이 문제에서 변증법적 논리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변증법은 동어 반복이 아니라 모순극복의 방법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물과 개념들을 운동과 상호작용,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변화와 생성, 그들의 발전과 쇠퇴 속에서 고려하는 이 변증법적 방법은 변화나 생성 그 자체를 법칙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상반되는 것들과의 대립 및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순과 상호대립은 비약에 의한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구체적이고도 본래적인 시간이해를 우리의 의식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음을 다른 어떠한 양식 보다도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영화에서의 심리적 시간이란 이러한 양적 시간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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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usation and Freedom, Holistic View 5<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오랫동안 남성들의 시각과 보호에 길들여 있던 여성의 몸이 어느 날 자신의 존재성을 주장하면서 자유를 외치게 되고, 정숙하고도 얌전하였던 여성들이 갑자기 몸을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자 남성들은 자신들의 시선을 벗어난 이들을 보면서 갑작스러운 권위 상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몸이 해방되고 신체적 감각이 이른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를 대신함으로써 남성이라는 사유적 존재가 유사 이래로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음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몸이라는 실재 대신 또 다른 추상적 존재를 통해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한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음도 확실하다.

결국 패러다임의 변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과 타자의 몸에 대한 시선과 관점의 변화이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규정되거나 길들여지는 몸은 존재할 수 없으며 사유 이상으로 몸 역시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존재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외모지상주의라는 또 다른 물신주의가 팽배한 작금의 상황에서 몸에 대한 진실된 시선이 무엇이며 몸의 주체적인 존재방식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의 감옥’이라는 오래된 폄하에도 불구하고 몸(육체)은 우리를 타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가장 구체적이면서 실재적인 표상이기에 자신의 몸을 결코 거부할 수 도 없고 동시에 타자의 시선 속에 영원히 방치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분리와 결합 그 무력함과 풍요함

우리는 일상에서 성(性)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첫째,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구조와 그 기능을 의미한다. 이것은 남녀의 신체적, 성적 역할의 분리라는 차원에서의 설명이며 여기에서 섹스(sex)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섹스는 라틴어 sexus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어원은 ‘자른다’, ‘나눈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seco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성행위나 성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성적 욕망이나 성적 관심을 의미한다. 분리된 남녀가 성적으로 상대방을 서로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는 주로 섹슈얼리티(sexuality)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셋째, ‘남성다움’ 혹은 ‘여성다움’과 같이 특정 사회가 요구하는 정형화된 성적 타입을 의미한다. 자연적이라기보다 문화적,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 개념이 오랫동안 ‘성적 차이에 근거한 권력의 차별적 분배’를 정당화했음을 역사는 잘 보여준다. 이를 거부하면서 중립적 입장에서 성을 표기하기 위해서 차용된 용어가 젠더(gender)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종교적 교리와 문화적 삶을 강조하면서 인간에게 명확한 성적 정체성을 요구하였다. 1995년 필리핀의 여성 육상 선수 낸시 나발타는 국제 경기를 앞둔 신체검사에서 남성으로 판정 받은 후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스포츠에서 중성을 위한 경기가 없는 한 그(녀)는 두 가지 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연예인 하리수는 자신의 남성적 상징을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온전히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말, 특히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위에서 구분된 전통적 성 개념들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양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의 시초는 지난 세기 초부터 페미니즘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다양한 성적 차별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서구를 중심으로 사회 각 영역에 만연한 성차별에 대한 투쟁은 고등교육, 직업분야, 참정권 등에서의 여성의 참여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이른바 ‘남녀역할 바꾸기’가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공적 영역에서의 이런 변화는 사적 영역에서의 성의식과 성관행의 변화 내지 해체로 나타나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작금의 젊은 세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남녀 간에 점점 모호해지는 성 정체성이다. 짙은 화장을 하고 귀걸이, 목걸이에다가 여성의상과 다름없이 신체의 윤곽을 드러내는 밀착된 의복을 입는 예쁜 ‘꽃미남’ 옆으로 펑크 머리를 하고, 군복을 입고, 밀리터리 패션을 걸친 ‘터프 걸’들이 걸어가고 있다. 주로 대중문화의 아이돌 스타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유니섹스’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표현에서 더 이상 전통적 성적 구분이나 정체성의 요구는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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