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이강화 교수의 철학 이야기

The Director’s Role in the Creative Movie Artistry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헐리우드 장르영화의 특징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특정한 플롯과 캐랙터 그리고 주제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이러한 누적적 과정을 통한 특정한 표현방식에 대한 친숙화에 있다. 인간의 다른 체험들과 마찬가지로 장르체험도 특정한 지각과정에 따라 구성된다. 같은 유형의 체험을 반복해 감으로서 우리는 계속적인 보강에 의해서 규칙으로 굳어지게 마련인 기대감을 키우게 된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운동게임에서 볼 수 있는데 운동게임이란 불변의 규칙과 시합의 성격을 결정짓는 구성요소들 간의 복합적인 체계이다. 한 운동게임에서 두 가지 규칙이 있을 수 없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그 운동 자체의 차별성이 존재하듯이, 특정한 장르 역시도 그 서술 구조 내에서의 규칙과 구성요소들의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영화의 주제나 스토리의 정형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어떤 주제가 장르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일관되게 가치를 반영하는 네러티브 체계로서 지위를 인정받음을 의미한다. 관객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소재를 즐겨 찾기 마련이고 이러한 관습적 관람행위가 영화제작주체가 요구하는 안정된 수입과 직결됨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르영화가 관습적이고 타성화된 서술방식을 지향하는한 작가적 창의성이 장르의 경직성을 극복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관객과 영화를 정서적으로 일치시키는 탁월한 동화능력이다. 헐리우드 영화는 내러티브와 플롯을 철저하게 관객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적용한다. 내러티브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내러티브는 다시 스토리와 플롯으로 나누어지고 스토리는 영화에서 명확히 제시되는 사건과 그 밖에 부연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플롯으로 바뀌어진다. 즉 스토리의 시공간적 순서나 흐름을 플롯에서는 몇 가지의 사실만을 보여줌으로써 바꿀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장르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에게 전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로서 제공된다. 영화 속의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이 플롯을 통해서 제시된 사실들로 부터 다른 여러가지의 사실들을 유추해서 구체적인 원인 혹은 결과를 예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게되고 동화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특정한 영화작가의 플롯이나 주제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핍진성(verisimilitude)이다. 핍진성이란 실제의 현실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의 사건들이 충분히 현실성있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핍진성은 영화의 내러티브의 완결성과 스타일 상의 규칙들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내러티브의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맞아떨어질 때 관객들은 그 사건이 충분히 현실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심지어는 그 사건을 실제 현실의 사건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비현실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한 순간이나마 실제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 일어날 수 없는 것, 그러나 경험하고 싶고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을 가져다준다. SF장르가 대표적인데, 불가능과 구속의 세계인 실제 세계에서 탈출하여 가능과 자유의 세계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관객들은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또 이렇게 현실을 왜곡시킴으로써 관객들에게 현실로 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공통적으로 말해주듯이 장르영화가 궁극적으로 현실도피를 통한 미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데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포드나 혹스처럼 판에 박힌 플롯이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성격화를 두고 독창적인 예술성 운운한다는 것은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채, 헐리우드 영화에 지나치게 경도된 혹은 예술가라는 낭만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유럽인들의 과잉의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작가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 반박하기를 자신들도 헐리우드 장르의 관습들이 어떠한 것이며 그 한계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장르들이 새로운 의미들을 사전 봉쇄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독들로 하여금 자신의 독특한 주제를 일관되게 다룰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어떠한 규칙의 체계라도 항상 위반의 가능성을 동반하기 때문에 장르는 의미의 새로운 변주를 위한 장을 제공해주며, 따라서 장르는 감독을 가두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웨스턴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 장르는 오랫동안 미국 건국과정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건국신화를 유포시키는 장르로 기능했지만 70년대 이후의 웨스턴은 미국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면을 드러내어 고발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주의는 결국 장르주의와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그 존재의미를 확인 할 수 있다. 만약 장르 제작이 상업적인 흥행을 지향함으로써 작가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만 기능한다면 적어도 헐리우드에서는 작가주의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장르영화가 그런 식으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한계가 창조적인 작가들에 의해서 극복되어서 장르의 관습성을 자신의 고유한 표현방식을 위한 기회로 사용한다면 작가주의는 적어도 장르주의의 한계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논쟁의 가장 커다란 공헌은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를 고급예술의 관점에서 진지한 논의의 대상에 까지 오르게 하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장면화에 대한 작가주의의 주목은 도덕적이거나 미학적 성격에 집중되었던 이전의 논의를 극복하고 영화적 특수성에 관한 분석을 위한 기초작업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는 가치평가와 이를 근거한 서열화는 비판적이고 이론적인 쟁점들이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쟁점들과 맞물리는 보다 광범위하고 초 학문적인 논쟁으로 부터 벗어났음을 잘 보여주는데 이것은 작가주의가 보여준 몰 역사적인 사유를 잘 말해준다. 사실 특정한 감독들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개성적 스타일, 퍼스낼리티를 추적하는 수색자로서의 비평작업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정확한 분석틀의 결여와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주관적인 태도는 작가주의 비평을 비 정치적이고 낭만적인 주관성의 미학으로 변질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로빈 우드와 같은 평론가들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누가 미국영화의 최고작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서열화에 대해 어떻게 보면 영화예술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칭 감식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도락적인 언쟁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가주의’ 이론이 유럽과 헐리우드의 몇몇 장르감독들을 발견해내는 데는 커다란 기여를 했지만,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제작과정에서 제한된 감독의 기능을 지나치게 무시함으로써 무분별한 ‘헐리우드 숭배’ 혹은 ‘작가숭배’로 빠지는 우를 범하였다는 비판은 끝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성기에는 쉽게 확인될 수 없었던 이러한 작가주의의 한계는 68년 혁명 이후 대두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그리고 형식주의와 논쟁에서 결정적으로 구체화되었음을 이후의 영화이론사가 잘 보여주는 것이다.

 

*** 이강화 교수님의 영화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님은 전 세계의 한국 독자, 또는 한국의 교육 문화를 알고 싶어하는 세계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면을 빌어 교수님의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편집자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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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rector’s Role in the Creative Movie Artistry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작가주의가 미국영화에 도입되었을 때 그 개념은 더욱 통속화되었다. 사실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심미안’을 자랑하는 이 프랑스 젊은이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시 미국영화는 전세계적으로 과도한 상업성읠 추구라는 이유로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상업적 측면에서의 미국영화의 영향력이 증대될수록 미국영화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고조되었는데 이유인즉 미국영화는 예술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모든 개인의 감정을 말살시키는 거대한 상업기계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헐리우드의 경직된 제작시스템 속에서도 몇몇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조적인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이론은 적어도 예술성에 있어서는 늘 유럽영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미국영화의 열등감을 씻어주기에 충분하였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프랑스 평론가들에 의해서 창조적 예술가의 전형으로 추앙되는 이들 감독들의 작품들을 새삼 극찬하면서 이전까지 자신들도 폄하하였던 자국영화의 우월성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앤드류 사리스는 이러한 쇼비니즘적인 경향을 대표하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 <미국영화>에서 ‘작가정책’(politique des auteurs)을 ‘작가이론’(the auteur theory) 이라고 재명명하면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스튜디오의 요구, 자신이 쓰거나 관여하지 않은 시나리오나 제작자가 고용한 배우, 카메라 맨 등의 간섭이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반면, 그가 일차적으로 선택한 14명의 감독은 “개성있는 세계관으로 기술적인 문제들을 초월한”감독들로서 이른바 A급에 속하며, 이차적으로 선택한 20명의 감독은 “그들의 개인적 비전의 취약함 그리고 일관성없는 경력문제 때문에” B급에 속한다는 식으로 도식적으로 배열하였다.

( Winter Light 1961, by Ingmar Bergman)

작가주의가 이렇게 변질되어가자 자연히 평론가들 내부에서도 이 이론에 대해서 반발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작과정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몇몇 감독들, 예를 들어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혹은 페데리코 페리니 정도의 감독들에게는 그 이론의 적용이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스튜디오 시스템 내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수의 헐리우드 감독들에게 과연 작가라는 타이틀의 적용이 가능하겠느냐하는 것이다. 또 히치콕, 포드, 혹스 등 소수의 감독들이 헐리우드의 전성기에 각기의 작품에 개인적인 특징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헐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다수의 기능자 집단이 만들어낸 집합적 생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독창성을 어느 정도나 구분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습적인 장르제작이 보여주듯이 헐리우드 시스템의 구조가 터무니 없이 거대하기 때문에 아무리 감독의 개성이 강렬할지라도 대개의 경우 스튜디오(영화사)의 스타일, 배우의 스타일, 프로듀서의 다양한 요구, 시나리오작가의 특성 등 광대한 주문 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견은 헐리우드 특유의 장르영화를 분석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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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rector’s Role in the Creative Movie Artistry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영화가 작가의 독창적인 창작물이 될 수 있다면 영화는 사실주의에서 말하는 현실(Reality)이나 표현주의에서 말하는 환상(Fantasy)이 아니라, 한 개인의 진술(Statement)이 되는 것이다. 이제 영화도 다른 기존의 예술양식처럼 사적 표현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개인적 자유와 창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까이에誌는 이후 작가 즉 오떼르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면서 자체의 기준에 따라 감독들의 등급을 매기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유럽감독들에 한정된 작가칭호를 반발하면서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감독들에게 ‘위대한 작가’(master)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정책’이란 말의 뉘앙스가 그러하듯이 ‘영화정책’이니 ‘영화작가’니 하는 개념들은 자국 프랑스 영화를 새롭게 이해하고 비평하려는 일군의 젊은 비평가들의 혁신적인 태도 내지 방식을 의미하기에 애초부터 어떤 구체적이거나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었고, 동시에 헐리우드 영화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던 이러한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등장한 50년대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까이에誌는 150호, 151호에 미국 영화 특집을 마련하여 무려 120명의 미국 영화감독을 분석하였다. 다음 작품들은 특집호에 실린 1962년까지의 미국 유성영화 베스트 10이다.

1. 스카페이스(하워드 혹스), 2. 위대한 독재자(찰스 채플린), 3. 현기증(알프레드 히치콕), 4. 수색자(존 포드), 5. 사랑은 비를 타고(진 켈리, 스탠리 도넨), 6. 상하이에서 온 여인(오손 웰즈), 7. 인생보다 큰 것(니콜라스 레이), 8. 천사의 얼굴(오토 프레밍거), 9.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에른스트 루비치), 10. 오명(조셉 폰 스턴버그)

제 2차 대전 중 프랑스는 나치 점령군과 비시정권에 의해서 표현과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되었고, 이것은 그들의 영화적 전통이 강압적으로 단절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다가 전쟁이 종결되자, 그 동안 금지되었던 헐리우드 영화들이 프랑스에 물밀듯이 빌려들어왔다. 아름답고 멋진 배우들, 그들을 둘러싼 물질적 풍요와 쾌락, 꿈과 부의 성취 등 헐리우드 영화의 세련된 표현은 물질적 빈곤과 침울한 정서에 찌들었던 프랑스인 특히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다. 이런 외적 상황과는 별도로 전통적으로 프랑스 지식인들-사르트르와 메를로 뽕띠와 같은 철학자들, 까뮤와 꼭또, 그리고 뒤라스 등의 작가들-이 영화에대한 관심을 지대하게 드러내었는데, 이것이 프랑스 젊은이들로 하여금 영화를 다시 이해하고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헐리우드 영화를 다시 본다’ 라는 자기 각성을 통해서 신진영화인들은 자신들의 영화적 전통을 좀  더 반성적으로 보게 되었다.

빠른 편집과 스튜디오 촬영의 세련됨 등 헐리우드 특유의 영화문법은 까이에誌의 편집인들이 보기에 거만하고 전통적 구습에만 연연해하는 프랑스 영화와 대비되는 영화 고유의 표현방식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제작자의 월권적 지배하에서 대중을 즐겁게 해야만하는 헐리우드의 제작 풍토 속에서 각자의 독특한 영화언어를 구사하는 감독들의 창조성을 높이 존경하였는데, 이들이 보기에 재능있는 감독의 경우에는 연출 이외의 제작과정에는 거의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 작가의 지위를 얻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작가 (Author, 오테르)는 산업구조로서의 영화제작 시스템의 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데 헐리우드의 대가들은 이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작가주의 이론은 대서양을 넘어서면서 변화되었다. 우선 영국에서 작가주의 이론은 ‘영화가 어떠한 사회적, 윤리적 혹은 철학적 내용들을 담지해야하는가’라는 이전까지의 지배적인 이론의 대안으로 크게 환영받았다. 프랑스의 까이에誌와 마찬가지로 무비(Movie)誌[를] 중심으로 활약한 영국의 작가주의 비평가들은 순수하게 영화 특유의 양식, 상상력, 개성들로 인해 의미를 갖고 있는 영화를 기대하였고, 따라서 이전의 주제 대신, 장면화(미장센 mise-en-scene)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장면화란 각본이 영화로 만들어 질때의 조명, 카메라세트, 연기 등등 감독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특징적인 영역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각본이 동일하더라도 감독에 따라서 전혀 상이한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감독 특유의  표현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작가 즉 영화감독은 미장센 즉 장면화의 고유화 방식을 통해서 그 영화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히치콕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인데 자신의 평생을 통속적인 탐정소설의 각색에 바친 이런 감독을 어떻게 대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 밖에 없지만 샤브롤과 로메르는 이를 반박하면서 히치콕의 경우, 내용이나 주제가 아닌 이른바 공포영화라는 형식적 측면에서 그의 표현방식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인정해야만 하며 이런 면에서 히치콕은 ‘형이상학자’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 영국에서는 60년대 이후부터 영화 텍스트와 영화관객과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가 영화잡지 스크린(Screen)誌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알튀세와 라캉의 영향력 아래 있던 소위 ‘스크린 학파’이론가들은 관객의 주체성은 항상 언어 속에서, 언어를 통해서 확립된다는 것을 전데하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어떤 주체로 구성되는가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는 관객이 텍스트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주체로 호명될 때,  그 호명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주체성을 갖게됨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감독이 작품속의 독특한 영화 언어를 통해서 자신만의 개인적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작가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대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와의 만남을 경험하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관객은 감독에 의해서 그 택스트 속에 묵시적으로 타타나 있는 주제나 표현방식을 반드시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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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영화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영화가 예술로서 본격적인 자리매김을 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예술적 장르의 한 분야로 인정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표현양식에 관한 논의보다는 표현 내용, 즉 도덕적이거나 미학적 성격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영화를 문학이나 연극과 같은 서술적 양식으로 이해하였다는 것과, 이러한 양식에 대한 전통적 비평기준이 구조적 분석이나 설명 보다는 미학적 혹은 도덕적 가치평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서구의 지식인들이 영화의 예술성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예술품의 창작주체와 관련된 문제였다. 낭만주의 이래 서구 미학이론의 주류는 창작주체로서의 예술가들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가 중심의 미학이론은 예술품을 형식적인 표현 양식에서 뿐만아니라, 예술가의 천재성이 보여주는 예술적인 비젼과 표현성의 화신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볼 때 수많은 기능인들의 철저한 분업에 의한 결합과정이라는 영화 특유의 제작방식은 어떤 위대한 영화 창작 과정 전체를 주도하고 조절하는 한 개인의 비젼과 통일된 지성의 소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영화란 결국 결과물인 고로 완전성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조립라인을 통한 합성물에 불과 하였다. 제작자가 대본과 감독과 배우들을 결정하고 이어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 그리고 편집기사, 음악 담당자, 그 외 많은 분야의 기술자들이 모여서 만들어 진다는 점에서 영화 창작에서의 진정한 주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서명하는 작품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지는 극작가나 소설가와는 달리 누가 영화라는 결과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가? 창작 주체에 관한 이러한 오래된 논쟁은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평론가들에 의해서 해결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작가주의 (politique des auteurs – 정확하게 번역하면 ‘작가정책’이 된다) 이론이다. 영화에서의 ‘정책’이라는 단어는 알렉산더 아스뜨뤽의 논평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 : 카메라 스타일” 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아스뜨뤽은 흔히 ‘카메라 만년필 (La Camera Stylo)설로 불리워지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카메라를 창조적인 감독이 자신의 사고와 감성을 표현하는 펜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정책이란 예술가 자신의 사상 표현 혹은 카메라로 하여금 삶의 철학, 세계관을 기술하기 위한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작가주의’ 이론 만큼 영화이론사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없을 것이다. 혹자는 50년대 중반에 생성하여 60년대 후반이후 그 영향력이 서서히 사라져 버린 이 이론을 전 시대의 낡은 비평방식으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논쟁의 결과들 –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 정신분석학, 형식주의 등 -들을 고려한다면 작가주의 이론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모습을 달리한 채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당시 프랑스의 소장 평론가였던 프랑소아 트뤼포는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ema) 誌 에 ‘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 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처음부터 앙드레 바쟁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소위 ‘까이에 그룹’이라고 불리우는 일단의 평론가 집단, 즉 프랑소아 뜨뤼포, 자크 리베트, 장-룩 고다르, 끌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등이 주된 기고자들이다. 이들이 나중에 모두 영화 연출 쪽으로 전향하게 됨으로서 이른바 프랑스 누벨바그 (nouvelle vague) 라는 새로운 조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트뤼포는 이 글에서 과거 추앙받던 감독들을 격하시키고 새로운 영화전통을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때까지 프랑스 예술 영화의 거장으로 인정받던 르네 끌레망, 앙리 끄루조, 줄리앙 뒤비비에, 마르셀 까르네 등-젊은 평론가들은 이들이 만든 영화를 아버지의 영화 (le cinema de papa)라고 불렀다 – 을 프랑스 영화를 망친 감독들로 단죄하였는데 그 이유는 심리적 사실주의에 탐닉하여 영화를 문학적 전통의 예속물로 만들었을 뿐, 진정한 영화의 전통은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문학적 소재를 단지 자기 취향으로 변조하기보다 특유의 생명력과 숨결을 불어넣는 로베르 브레송, 장 꼭또, 장 르노아르 등을 추앙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트뤼포를 비롯한 젊은 평론가들이 정의하는 영화작가(auteur du cinema)란 문학작품을 소재로 하여 단순히 그럴듯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자신만의 개인적 특성을 부여하는 감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인 영화의 개념, 즉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 뒤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영화의 개념을 옹호하였다. 이리하여 문학적 테마와의 상관성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이른바 ‘질의 전통’(La Tradition de La Qualie)을 거부하면서 영화특유의 표현방식이 얼마나 구사되었느냐가 영화의 진정한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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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Screen as Reflection of the Ego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바바라 클리드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 태동했던 관객이론 모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것의 반복적이고 총체화하는 관점에 모아졌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정신분석학 이론은 지나치게 몰역사적이라는 주장이다. 클레어 존스턴은 1975년에 쓴 한 논문에서 이미 정신분석학이 정치적-문화적 이슈에 대한 진지한 개입을 흐려놓는다는 이유로 그 실질적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든가 거세공포 같은 정신분석학의 ‘거대 내러티브(the grand narrative)’가 역사적인 문제를 희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스턴은 문화적 갈등을 통해 지배문화의 약점을 드러내는 어떤 계기들처럼 늘 가변적인 사회의 ‘마이크로 내러티브(micro-narrative)’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국 영화는 무의식 및 주체성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역사 및 사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신분석학이 관객중심주의 이론에 치중하고 나아가 실제 감상자가 아닌 ‘이상적인 관객(the ideal spectator)’을 상정한다고 비판한다. “사실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관객은 사회학자의 연구대상 내지는 시장조사에서 쓰이는 일반관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실제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개념적인 공간(a conceptual space)’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장에 놓여있는 무수한 의자들에 누구라도 앉을 수 있는 것처럼 이 주체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아무나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스크린의 감상이 상호 교환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관객 각자의 체험은 모두 동일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주체로서의 관객의 위치(자리)가 ‘영화기구’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관객이론은 인종, 계급, 성차 등과 같은 여타의 요소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셋째는 정신분석학의 주된 문제는 그것이 전혀 과학이 아니라는 비판이다. 정신분석학은 믿을만한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적으로 측정될 수 없다. 한 미국의 행태주의 심리학자는 프로이트 저작의 실제적인 난점은 그것이 단지 ‘불알(testicle)일 수 없다’는 데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검증할 수 있는(testable)’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다.39) 이에 대해 정신분석학은 그 본래적인 이론적 추상화 때문에 결코 증명에 의해 입증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물론 정신분석학은 그 유용성만큼이나 결함도 많은 학문이다. 그렇다고 정신분석학을 영화에 적용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태동기의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으로 퇴행할 수는 없지만 아직 적용의 여지는 많다. 왠냐하면 무의식의 심연(深淵) 만큼이나 영화의 바다도 넓고 깊다.

동시에 이상의 다양한 논의를 통해서 이제 관객은 수동적인 스크린의 호명된 주체가 아니며, 그는 권력자의 위치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를 이해하는 존재임이 밝혀졌다. 관객은 시나리오를 위한 그리고 시나리오의 주체로서 위치도 점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관객들에게 많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관객이 이 캐릭터에 대해서 단일한 위치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으로서 관객은 단일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위치에 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객성’은 이제 역사적으로 변동하는 집단의 문제로 파악되는 동시에 상호텍스트성과 관련되어 분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영화텍스트를 둘러싼 모든 텍스트를 검토하고 그것이 독자로서 그리고 수취인으로서 관객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관객의 위치화 및 동일시와 관련된 위의 논의는 초기의 단일한 관객관이 보다 이질적이고 복수적인 것으로 전이하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관객이 어두운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적 이미지의 일방적인 전달이나 수동적인 수용이라는 전통적인 커뮤나케이션이론 대신 관객이 처해있는 특유의 상황성을 전제로 하는 관객과 영화 이미지와 상호텍스트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능동적 수용자 개념이 기본적으로 고전적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이성적 주체적 존재라는 이념으로 부터 도출되었음은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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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Screen as Reflection of the Ego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로라 멀비(Laura Mulvey, Aug.15, 1941~ )로 대표되는 페미니스트들은 역시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토대로 해서 기존 이론이 지니는 남근 중심주의 (Phallocentrism) 의 결함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들 역시 넓게 보면 자크 라캉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자크 라캉이 여성해방을 앞서 말한 사상가였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 운동에 대한 라캉의 태도는 주로 오만하고 경멸적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작업은 주체라는 문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언어간의 관계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대단히 독창적인 시도이다.”

로라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라는 매우 도발적인 글에서 여성 관객을 의제에 올리고 있다. 절시증(竊視症: scopophilia), 거세(castration),페티시즘(物神崇拜 : fetishism) 등과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들 및 주체성 형성에 관한 라캉의 이론에 의존해서 멀젠더를 기구이론에 도입하고 있다.  멀비는 성의 불균형으로 질서 지워진 세계에서 사물을 만드는 역할은 남성 프로타고니스트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여성 스타는 남성의 욕망에 찬 시선에 성적 대상으로 기능하는 수동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멀비는 또한 비록 여성이 남성 프로타고니스트의 향유의 대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여성인물은 영화속의 남자 주인공뿐만 아니라 남성 관객까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남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여성의 도발(挑發)이 성차(性差) 및 거세에 대한 남성의 무의식적인 불안감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협적인 여성들이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많은 내러티브 영화들은 멀비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또한 성애적(性愛的) 관조를 위해 여성의 신체의 일부분을 클로즈업으로 찍는 것은 멀비에 따르면 물신적 응시(fetishistic look)에 다름 아니다.” (바바라 크리드, Pg 83)

로라 멀비는 이같은 맥락에서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들은 세 가지 관점에서 여성을 대상화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영화는 여성이 보여지는 대상(내용적 측면)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볼거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식(형식적 측면) 까지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첫째는 영화적 사건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중립적일지 모르나, 엿보기 자체는 관음증적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남성이 영화를 찍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남성적이다.

첫째는 영화적 사건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중립적일지 모르나, 엿보기 자체는 관음증적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남성이 영화를 찍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남성적이다.

둘째는 완성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다. 여기에서 여성의 대상화는 주로 쇼트/역-쇼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는 스크린의 환영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시선이다. 즉 관객은 카메라가 보는 대로 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선들이 남자 주인공의 시선으로 되고 관객이 남성주인공과 동일시된다는 데에 있다. 결국 영화에서 보여지는 여자의 모습은 3중의 관점에서 대상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는 카메라의 존재가 제거되어 관객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때 성취된다. 즉 소격효과 疏隔效果(Bertolt , Brecht, 1898.2.10. – 1956.8.14: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 그는 연극과 관객과의 철저한 분리로 그 연극에 대해 객관적인 비평과 감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가 배제되어 자연스런 현실감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능동적 창조자의 시선인 남자의 눈길(male gage) 로 수동적 도상(圖上)으로서의 여인(woman-as-icon)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 자체가 본질적으로 남성관람자를 의식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멀비의 주장은 한마디로 “내러티브 영화에 있어서 ‘시각적 쾌락’은 여성에게 억압적이기 때문에 도전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텍스트가 남성의 외디ㅐ푸스 궤적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판타지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여성 관객은 어떻게 시각적 쾌락을 체험하는 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멀비는 “남성 여성을 불문하고 리비도는 오로지 하나뿐”이라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끌어들인다. 따라서 스크린상의 여주인공이 강인하고 남근적(男根的)이라면, 이는 그녀가 남자와 여자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외디푸스 이전 단계(the pre-Oedipal phase)’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멀비는 여성 관객은 내러티브의 대상이 되는 여성 인물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남성적인 위치(남성의 시선)를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결국 로라 멀비는 기록하는 과정의 실질적 존재(카메라의 존재)와 관객의 날카로운 해석(동일시가 아닌 거리두기)이 존재하는 한, 허구적 드라마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멀비의 이론이 갖는 한계는, 분석의 대상이 주로 남성적 장르, 즉 서부영화, 갱영화, 전쟁영화 등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최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여성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로 논의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멀비를 중심한 지나치게 급진적인 페미니즘적인 견해에 대한 수정이 실버만, 스투들라, 도앤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들은 멀비의 남근중심사상을 반박하면서 관객의 위치화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굴종 혹은 수동성을 통해서만 쾌락을 얻도록 한다는 점에서 마조히즘적인 구조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서 이들은 여성관객의 입장이 이중적임을 지적하는데, 즉 여성관객들은 수동적인 역할을 위해서 마조히즘적인 위치를 채택하거나 능동적으로 남성영웅과 동일시하기 위해서 복장성도착자의 위치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관객은 이중적으로 욕망하는 존재이다. 거울단계에서 여자아이의 첫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지만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녀는 아버지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게된다. 그러나 애초의 욕망이 쉽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에 여성관객의 양성적인 위치화는 어머니/딸 관계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한편 남성관객들은 스크린 속의 여성에게 자신의 여성성을 투사함으로써 영화 속의 남성 캐릭터들 처럼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한다. 따라서 남성관객은 남성캐릭터와 동일하게 수동적인 양식과 능동적인 양식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이 양성적으로 위치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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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정신분석학은 ‘기구’로서 영화가 어떻게 기능하는가에서 부터 ‘스크린과 관객간의 관계’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념들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핵심 학문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과’현대 영화이론’은 이제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더들리 무어는 영화에 나타나는 상징과 ‘기호’와 관객들에게 비치는 그들 의미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정신분석 학자들마다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분석학 이론의 사용은 실제 또는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하기 위한 진행과정의 일부로서 계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파커 테일러가 말한 이른바 ‘정신 분석적-신화적'(Psychoanalystic-mythological) 방법이라고 부른 영화 분석법 역시 이러한 현상을 두고 말한다.

한편, 사회과학에서 영화 텍스트와 영화 관객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영국의 영화잡지 ‘스크린’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알튀세와 라캉의 영향력 아래 있던 <스크린> 학파 이론가들은 관객의 주체성은 항상 언어 속에서, 언어를 통해서 확립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어떤 주체로 구성되는가를 분석하였다. 관객이 텍스트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주체로 호명 Hailing 당할때 그 호명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주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비평이론에 수용자의 주체구성 과정을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스크린> 학자들은 결정론적 시각을 토대로 텍스트 속의 수용자 구성방식에만 주목함으로써 이들에게 수용자의 내면적 심리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용자의 권력에 대한 재발견을 주장하는 비판적 의견은 텍스트와의 만남을 경험하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독자는 그 텍스트 속에 묵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독자와 텍스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독자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다시말해서, 담론으로서의 텍스트가 구축하는 이상적인 독자의 위치를 모든 독자가 동일하게 택하리라는 확신이 없으므로 수용자와 텍스트가 만날 때 그 관계가 텍스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스크린파의 논지는 매우 취약한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드리, 벨루르, 메츠 등 프랑스 이론가들은 영화의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스크린 학파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차용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관객이 영화를 관람할 때 성적 차이, 언어, 그리고 자율적 자아 혹은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무의식적 과정이 수행되며 이것은 매우 일방적이며 또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드리에 따르면 영화적 장치는 그 체계와 재현의 메카니즘을 통해 독특한 위치를 생산한다. 이 위치는 이데올르기적인데 지배적인 서술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생산 과정에서의 물질적 과정을 잊게 함으로써 관객 자신이 영화 이미지에 대해 영화적 텍스트의미의 저자라고 믿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적 현실효과라는 관념론과 공모하게 하며, 보드리가 ‘초월적 주체로서의 관객’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현상은 관객이 텍스트의 의미에 의해 구성되며 영화적 장치는 주체를 텍스트의 효과로서 호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 호명개념이 알튀세의 이론에서 비롯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문화연구에 끼친 알튀세의 공헌은 그의 이데올르기개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몇가지 정의를 내렸는데 그 중에서 다음의 두 가지 정의가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제 존재상황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그들과 그들 조건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조건간의 관계를 실현하는 방식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제 존재상황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그들과 그들 조건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 조건간의 관계를 실현하는 방식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해내는 기능이 있으며 이 기능에 따라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육체적 행위에 종속되는 주체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서 광고도 호명을 통해서 기능하며 따라서 그 광고의 의미와 소비 패턴에 종속되는 주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 호명당하며 결국에는 사고 소비하고 또 사고 소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와 문화 이론, 존 스토리저, 박모 역, 서울: 현실문화연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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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이 영화에 영향을 끼쳤던 것만큼이나 영화도 역시 정신분석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맥락에서도 영화와 정신분석학을 합성한 용어(cine-psychoanalysis)의 진정한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정신분석학적 영화비평의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1970년 이후의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 소쉬르의 기호학,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 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게 되면서 이들 독립 학과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정신분석학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정신분석학과 영화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필수적이다 무의식, 억압된 것의 귀환, 외디푸스 콤플렉스, 나르시즘 그리고 거세 콤플렉스 등과 같은 그의 핵심 개념들 대부분이 영화이론에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밖에 주체성 및 섹슈얼리티의 개념은 오늘날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공헌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중에서 무의식의 개념이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하며, 이것은 특히 꿈에 비유된 영화의 관람 행위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알랭 바니에의 지적처럼 정신분석학이 곧 무의식에 관한 이론은 아니며, 정신분석학은 분석적 실천에 관한 이론으로서 무의식을 가설로 내세움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직접적으로 무의식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적 작업은 ‘해석’을 통해 무의식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모든 영화 이론가들이 프로이트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론가들은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 특히 그의 원형(archetype) 이론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의 이론에서,”원형은 엄청난 정서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전형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경험은 초인적인 혹은 우주적인 의미로까지 격상된 그런 경험이다. 융이 볼 때, 모든 인간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원형적인 삶을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원형이란 인간의 경험에 중심적인 이념 혹은 이미지가 된다. 그것은 개인이 인류로부터 정신적으로 물려받은 어떤 것이다.

한편,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에 대한 후기의 재 서술에서 분리된 자아, 즉 ‘성의 분화를 달성한 주체’라는 프로이트의 생각을 거울 단계(mirror stage)에서의 주체성의 형성이라는 그의 이론의 토대로 삼았다. 라캉의 저작에서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인 남근(phallus)은 바로 이런 성적 구별의 의미작용을 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이 갖는 중요성이 부각된다. 라캉은 이러한 심리적 과정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다시 고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의식과 언어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던 그의 정신분석학은 대중문화(영화 포함)를 이해하는데 큰 이론적 틀을 제공해 준다.

라캉에게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즉 상징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과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데, 라캉은 이 영역을 ‘실재계(the real)’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위기를 겪은 다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소중한 대상을 다시 획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유적으로 얘기하면, 상상계(바라봄만 있는 세계)와 상징계(보여짐을 의식하는 세계)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것이 실재계다. 즉 나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킬 짝이라고 믿었다가(상상계), 포착하는 순간 허상이 되고(상징계), 이때 상징계로 들어가며 제외된 부분이 잔여물(대용물)로 남아 다시 숭고한 대상이 생긴다(실재계). 이 잔여물을 라캉은 ‘대상 소문자 에이(object little a)’라고 불렀다. 라캉의 실재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균형을 탈선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바로 이러한 균형을 지탱시켜 주기도 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영화이론과 실제비평에 접목시킨 대표적 이론가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는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는 부제가 붙은 <삐딱하게 보기> 및 ‘할리우드의 정신분석’이라는 부제가 달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라는 등의 일련의 저작을 통해서 대중문화 ,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을 중심으로 대중영화에 대해 날카로운 정신분석을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정신분석하자인 벨루르는 영화가 상상계와 상징계를 위해 동시에 기능하는 측면을 언급했다. 관객이 영화적 경험에 빠져 들어가는 초기에는 영화적 장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즉 영사기는 하나의 눈으로 기능한다. 이어서 두 번째는 이미지와 나르시시즘을 동일시함으로써 상상계에 빠져들게 되고, 이어서 세 번째로 상징계로 이동함에 따라 관객은 이미지를 욕망하게 된다. 메츠도 벨루르와 마찬가지로 스크린과 거울의 유비관계에 의존하면서 관객을 자아와 상상력의 통합의 순간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관객은 스크린상의 이미지와 자아와의 상상적인 합일이 갖는 환상주의를 알게됨에 따라 결핍감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결핍을 영화를 통해서 메울수 없음을 절망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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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영화의 영향력과 그 수용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용자로서의 관객 개인의 사회적 경험과 정서적 성향, 메시지의 맥락, 윤리적 규범, 역사성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들이 예술 사회학, 대중 문화이론,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있다.

특히 이중에서 정신분석학이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영화를 하나의 꿈, 즉 비현실적인 백일몽으로 설명하는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에서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선구적으로 사용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파커 타일러는 헐리우드 영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헐리우드는 대중의 무의식이다. 증기삽으로 언덕깊은 곳을 파 올리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퍼내어져서는 완전히 텅빈 스크린을 채우는데 제공되는 것이다. 천개의 소망들이 가장 비천하고 나쁜 헐리우드 영화에 의해 상징적으로 충족되어지고, 영화의 탁월함이나 진지함은 보통 관객들을 만족 시키는데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라고 G.조엘, J. Linton 은 말한다. 사실 영화 제작자들이 사용하는 영화속의 상징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라는 차원에서 제작자의 무의식뿐 아니라, 관객들의 무의식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런 차원에서 특정 시대의 집단적 무의식을 가장 잘 상징하는 매체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의 세계, 혹은 꿈이라는 텍스트는 매우 난해하고 애매하여서 접근하기 어려운 미로와 같다. 다행이도 프로이드 심리학은 꿈이라는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몇 몇 방법을 알려주었고, 따라서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찬 영화 텍스트 역시 프로이트 적인 관점에서 그 텍스트 특유의 상징성을 분석할 때 그 의미의 실체적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하는 최초의 예술운동 가운데 하나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어난 초 현실주의 운동이었다. “초 현실주의자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험의 양식을 탐구했다. 그들은 영화의 잠재력을 격찬했던 것이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꿈의 이론 및 무의식의 개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디졸브(dissolve), 수퍼임포지션(Superimpostion),슬로우모션 (Slow-motion)등과 같은 특수한 기법들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꿈꾸기의 본성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앙드레 부르통(Andre Breton)은 꿈과 유사한 속성을 가진 영화를 사랑과 해방이라는 불가해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방식의 하나라고 보았다. 초현실주의 영화의 대변자인 루이 브뉘엘은 학창시절 프로이트의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학>을 읽었으며, 영화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그는 영화 평론을 쓰고 영화학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에 익숙해졌으며, 파리에 갈 무렵에는 그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 즉 초현실주의자들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속하게 되었다.

1928년에 그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함께 만든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영화를 통한 꿈의 공개적인 재현이었다.한편<안달루시아의개> 로 초 현실주의 집단에 편입한 브뉘엘은 <황금시대 L’Age d’Or> (1930)로 자신의 독창성을 입증했는데, 이는 초 현실주의의 집단의 가장 커다란 스캔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극우파들은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을 공격했으며, 정부당국은 곧 영화상영을 금지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아주 강렬한 꿈꾸는 듯한 일련의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나아가 상상력과 성을 억압하는 사회제도의 압제에 대해 통렬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스크린 상에 초현실주의의 신조를 구현했다. 마이클 샤난은 브뉘엘 후기 작품들에서도 초 현실주의적인 분위기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초창기에 가졌던 우상 파괴적인 과격성은 오랜 영화적 경력을 거치면서 보다 성숙한 형태로 승화되었다. 브뉘엘은 예술이란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승화시키는 한 방법이라는 프로이드의 예술론 실천에 옮겼던 셈이다.

예를 들어 바바라 크리드는 자신의 저서 <영화와 정신분석> 에서 영화와 정신분석과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면서 양자가 모두 19세기 말엽에 탄생했다는 점을 중시한다. 즉, 영화와 정신분석학은 모두 근대성(modernity)이라는 힘에 의해 형성된 공통의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한편으로 두 영역이 모더니즘의 절정기의 과학 기술적인 이념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모더니즘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행할 수 있는 이념적 맥락사 역시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도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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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Screen as Reflection of the Ego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3. 대중매체이론에서 전통적인 ‘수용자 audience’ 개념은 ‘익명의 상호 격리된 대단위 집단’으로서 균질화, 균등화 그리고 수동성과 피동성으로 특징 지워진 채 지배 이데올르기의 재 생산 기능을 묵묵이 수행하는 소극적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대중 mass’ 으로서의 수용자는 대중매체의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송신자의 표적이 되는, 달리 말해서 송신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설득 가능하고 조종 가능한 수동적 존재를 의미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문화비평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대중문화 수용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적인 수용자 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수용자와 매체 간의 힘의 관계 설정에 있어 매체에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고 있어 수용자는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둘째, 수용자와 매체의 관계 이해에 있어 기본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전달적 모델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확정된 메시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고, 중요한 것은 효과의 측면이라는 고정된 관점이다. 셋째, 수용자에 관한 논의가 매체의 이미지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라는 거시적 관점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전통적 수용자의 모습은 언제나 취향이 천박하고 지적으로 열등한 제 3자로서 그려진다.(문화연구이론, 정재철)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문화 수용자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다양한 실증적 연구와 논쟁을 통해서 전통적인 수용자상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현대 사회의 수용자는 선택성과 적극성에 입각한 이성적 존재로 이해되었고 매체성 자체도 수용자의 능동성을 전제로 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영화에서의 수용자의 태도는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영화는 초기 단계부터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인해서 다른 어떠한 매체보다도 위험한 매체로 백안시되거나, 역으로 그 영향력을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였다.이렇게 볼 때 탄생된 지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다른 매체에 비해서 대중문화이론에서 집중적인 관찰의 대상이 된 중요한 이유가 바로 각 개인, 즉 관객에게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매체 특유의 영향력에서 비롯되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직접효과이론’으로 불리우는 이러한 견해, 즉 영화 생산자의 의도에 대해서 수용자로서 관객은 단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관점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것은 오랫동안 영화 텍스트의 수용자로서의 관객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지연시켰다. 물론 영화를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에는 그동안 많은 수정과 변화가 있어왔다. ‘직접효과’ 이론으로 부터 시작하여 각 개인이 영화가 지닌 메시지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에 관한 논의는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가는 심리가 사회적 맥락, 영화관의 유형, 그리고 영화가 지닌 내용의 유형과 같은 요소들의 다양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따라서 영화관람의 경험은 영화서사에 집중하도록 하는 테크닉을 기꺼이 무시하고자 하는 성향과 관련된다. 영화 산업에서는 영화관객의 심리학을 어떤 특정 영화의 효과를 측정하는데, 그리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흥미를 유발 시키는데에 이용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화를 수용함에 있어 대중은 여론 선도자(Opinion Leader)의 지도를 받기도 하지만, 나름대로의 잣대를 갖고 평가하고 난 후 특정 영화 현상에 대해 수용 혹은 저항의 태도를 취한다. 즉 자신이 처한 물질적 조건과 생활방식 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수용하고 해독하게 되며,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 상의 어느 한 지점에 해당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 특유의 해독과 변용의 형태가 각 집단의 독특한 특성을 반영하는 하위문화를 구성하고, 지배 문화에 의식적, 무의식적 대응을 하게 된다.

이처럼 생산자의 특정한 의도에 대한 관객의 수용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그리고 일률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수용자간의 상호관계 혹은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할 때만이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가설은 성립하며 이는 달리 말해서 영화의 다양한 영향력은 메시지의 수용에 있어서 관객의 능동적 해석과 자기화의 과정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수용자의 기대지평이라고 부른다면, 수용자의 사회계층, 사회적 규범에서부터 매체에 대한 기존의 경험에 이르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이러한 기대지평은 관객에 의한 ‘선택적 수용’의 주요 원인이 된다. 물론 기대지평은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정적인 것은 아니며 역동적이며 변화가능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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