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여기에서 문명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시민이 되다’ 혹은 ‘세련시키다’ 등의 뜻으로 쓰인 동사 civiliser 가 동명사로 바뀐 문명civilisation이라는 개념에는 근대 서구 국가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 즉 과학과 기술을 통한 생활 조건의 변화,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와 법체제, 예술과 학문 등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 이성을 통한 역사 진보에 대해 희망을 걸었던 계몽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헤르더를 위시한 대부분의 근대 지식인들도 거의 한결같이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이 문명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는데, 칸트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헤겔 역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인들을 일컬어 이른바 ‘문명의 선교사(die Missionarien der Zivilisation)라고 부르면서 세계 전역에 서양의 사고와 생활 양식을 확장하는 일을 인류률 위한 커다란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문화철학자 반 퍼어슨의 지적처럼 이제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 과학, 종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만남, 죽음과 삶, 성적 사랑, 재화 획득, 상품의 제조 등 모든 것이 문화를 구성하게 되었다. 문화를 이처럼 넓은 의미로 인간들의 삶을 위한 모든 생산 활동 혹은 그 결과물이라고 할 때, 이때의 생산이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활동과 그 산물이 아닌 모든 노동의 결과물, 즉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의 모든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세계에 대해 어떤 일정한 규정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세계를 개선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는 환경세계를 개선시키려는 인간들의 의지, 그 의지가 반영되어 나타난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서의 모든 생산물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 퍼어슨은 문화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본다. 왜냐하면 문화는 항상 변화에 관한 이야기요, 기존 문화 패턴의 변형에 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양한 행동 양식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의 변화 과정 자체로 파악된다. 문화는 예술 작품이나 책, 생활 도구 등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또 박물관과 대학 건물, 회의장이나 공공서류등을 그냥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문화는 이제 도구와 무기 제작, 춤과 서약송(誓約頌) 의식, 육아법과 정신 질환자 치료법, 성애와 사냥, 의회 소집과 칵테일 파티 등 다양한 행동 양식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문화 개념은 이제 훨씬 더 넓어졌고 역동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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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념의 변화

정신적 가치와 관련되었던 문화의 의미가 물질적인 것과 관련된 경제활동이나 신체적 노동을 통한 생산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민사회의 도래 이후였다. 근대 시민사회는 ‘욕구의 체계’라는 헤겔의 규정이 잘 말해주듯이 경제적인 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사회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전통적인 종교적 이념이나 윤리적 가치체계로부터 독립해서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제 경제적, 물질적 욕구는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규제만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활기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요소의 독립은 도시상인과 시민계급이 시민사회의 주된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서 가능하였다. 시민사회는 인간의 노동과 능동적인 활동을 강조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의식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 즉 자연, 사회를 더 이상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개발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시민사회의 출현과 함께 문화 개념도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문화와 더불어 문명 개념이 등장이 잘 보여준다. 볼테르와 튀르고 그리고 콩도르세 등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의 여러 저서에서 인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완성’, ‘완벽화’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면서 문화를 인류의 완성을 향해 진보해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였다. 인간 정신의 산물로서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독일의 계몽주의자인 헤르더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헤르더도 문화를 일차적으로는 정신의 도야, 정신의 형성(Bildung)으로 보았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류의 ‘인간화’, ‘문명화’, ‘개화’, ‘계몽’의 일정한 단계로 보았다. 

동시대인인 칸트 역시 비슷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칸트는 문화 개념 자체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조야한 것으로부터 좀더 세련된 것으로의 이행하는 문화과정을 자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문화 개념의 발전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문화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이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노동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문화적 행위와 그 산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문화 발전이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 보존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인간은 노동의 고통을 감수하며 지식을 추구하고, 법을 만들어 내며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문화화된(kultiviert)’상황이란 바로 ’문명화된(ziviliziert)’ 상황을 의미하고 이 것은 바로 학문과 예술, 법질서와 도덕화된 체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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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

하나는 문화 비판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적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그의 대표작인 <국가>에서 시인의 위치에 대한 비판과 소피스트의 활동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플라톤이 보기에 문화를 생산, 보급하고 시민을 교육하는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시인과 철학자가 서로 경쟁적인 위치에 있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는, 단지 시인이 모방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반면 철학자가 추상적 개념에 의한 직관적 인식에 의존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하되 지향하는 현실이 다른 데 있다. 그들은 다같이 ‘모방자(mimetes)’이지만 철학자는 참된 현실(이데아의 세계)을, 시인은 단지 겉으로 나타난 현실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참된 교육을 위해 의존해야 할 지식은 시인이나 예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현실, 참된 존재 질서를 파악하는 철학자에게서 얻을 수 있다. 철학만이 유일하게 참된 현실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을 교육하는 파이데이아는 철학적 파이데이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철학적 파이데이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생성에서 존재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불변의 세계로 정신적 눈이 향하도록 조정하는 활동이다. 달리 말해서 지식에서의 최고의 기준, 척도 중의 척도, 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불변하는 영원한 질서에 대한 관조이며, 영원한 질서에 대한 관조는 인간의 영혼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형성시킨다. 영원한 질서를 관조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그 질서를 ‘모방’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을 ‘형성’하고 ‘동화’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질서, 즉 영원한 퓌시스의 질서에 따라 산다면 영혼의 건강과 균형은 보장될 수 있다. 플라톤의 파이데이아에 관한 생각은 로마를 거쳐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시민사회의 문화 개념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문화 개념을 주도하는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의미를 가진 이러한 문화 개념은 계몽주의가 시작된 17, 18세기에 이르러 또 다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의 지배자로서 적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 자신의 문화적 노력을 통해서 이 자연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화라는 말은 종교, 예술, 과학, 국가운영의 기술과 같은 인간의 고도의 지적, 정신적 활동의 다양한 표현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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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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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이념

동양의 전통문화는 농경문화다. 농경이란 일정한 공간의 토지를 이용하여 계절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기후 조건에 맞추어,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재화의 생산은 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노동, 즉 그 생산과 가공의 인적 최소단위는 가정이다. 이처럼 가정으로부터 농경문화의 모든 것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인간의 전란 등을 극복하기에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기에, 농경사회에서는 노동에서 관, 혼, 상, 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들을 가정을 단위로 형성된 마을공동체 안에서 영위한다. 그리고 ‘이웃’과 ‘마을’은 주로 혈연과 친분관계로 조직되므로, 이들의 인간관계는 이해타산을 초월한 원초적 감정으로 형성된다. 전통사회에서 ‘효(孝)’와 ‘제(弟)’가 강조된 것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가 한 가정 내의 질서를 구현하는 정감행위라면, ’제‘는 공동체 안의 관계질서를 선도하는 정감행위이다.

농경은 자연질서에 따라 일정 공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농경에서 생산하는 재화는 주로 동, 식물 등을 생육하는데 쓰여지고, 그것의 생육은 천지자연의 화육(和育)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다만 그 결과를 가지고 이용후생(利用厚生)할뿐이다. 동시에 농경은 공간(토지)의 한계와 시간(계절)의 변화를 절대적인 여건으로 삼아 ‘생산(生産)과 제산(制産)의 원칙’을 강구했다. 이것이 바로 농경은 ‘생성된 재화’만을 이용하지 ‘내재되어 있는 자원’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왜냐하면 농경이라는 생성체계에 놓여 있는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이용하는 것을 곧 되돌려 주는 과정이므로 농경에 의한 자원의 생성과정은 계속될 수 있으나, 이 생성체계에 놓여 있지 않은 자원은 그 자체가 유한한 것이어서 꺼내어 쓸 경우 고갈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경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자원을 채굴하여 쓰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원의 이식을 최대한으로 취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천지의 화육생성작용을 돕는 일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생성체계에 속해 있는 땅은 최대한 개간하여 농경지를 넓히고(地盡其利), 개간된 땅에 알맞는 곡식을 적절한 시기에 뿌리고 가꿈으로써 가급적 많은 수확을 확보하여 그것을 가급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요긴하게 쓴다(物盡其用).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물건을 아껴 쓰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줄이지 못하면 한정된 물질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욕망충족은 욕망의 자가발전이라는 족쇄에 걸려들어 결국은 더 많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한한 물질은 고갈되고 사회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설계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생활관이다. 같은 물량이라도 그것을 아껴쓰면 오래 가고, 같은 재화라도 아껴서 잘 이용하면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이것이 ‘절용애물(節用愛物)’의 정신이다. ‘수분지족’과 ‘절용애물’은 물질 쪽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속한 ‘도덕’의 문제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정덕(正德)’이라고 했다. 이처럼 유한을 극복하고 ‘안빈락도(安賞樂道)’를 추구한 것이 농경문화의 슬기이다. 따라서 농경문화는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들과 화합(順天應人)하는 순리와 평화의 삶이며, 인간관계의 질서가 ‘정감’ 위주로 유지되고 해결되는 삶이다.

한편 서양의 문화 이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παιδεία; (영어) paideia;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교육, 학습”; “일반교양 교육” 이란 의미의 철학과 인식을 바탕에 둔 문화 이념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식과 행위의 규범을 인위성 또는 자의성에서 찾지 않고 퓌시스(Physis), 즉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고자 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역시 퓌시스에 의해 주어진 것을 퓌시스에 알맞게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활동이 된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의해 파괴된 퓌시스와 노모스(Nomos)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파이데이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면서 퓌시스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탁월한 품성과 자질, 즉 ‘아레테’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길, 즉 파이데이아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파이데이아, 특히 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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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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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구성하는 인물의 성격, 사건, 갈등의 원인과 해결 등이 모두 무속신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민족 고유의 사고체계인 무속신앙을 관념적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전통 정서에 바탕을 둔 시각으로 전쟁의 비극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두 삼촌으로 상징되어 표출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두 할머니 즉 두 여성의 화해를 통한 무속적 고유정서를 압도하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의 원혼을 무속을 통해서 위로함으로써 화해를 시도하려는 <태백산맥>에서 되풀이된다.

(Photo from Google Images)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다시 요약해 본다면, 멜로 영화의 경우,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위주의 외형적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주의와 배리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은 특히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동요하게 된 여성들을 전통적 자리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로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여성들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서 역사물 경우, 여성들을 중심으로 음모와 불만 그리고 고통의 표현에 집중함으로써 은폐된 차원에서의 여성의 한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공포영화 역시, 특정한 시기 여성들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사회적 질서나 이념을 반영하는 서사물이라는 점에서 역사물과 동일한 방식의 재현물로 볼 수 있고, 비록 비합리적인 방식이지만 여성에게 가해진 고통과 절망을 배출시키는 분출구로 무속이 기능했으며 이런 차원에서 무속영화는 한국 여성을 둘러싼 갈등과 모순을 종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XBFl03saY

이처럼 한국에서의 여성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 지배적 권력담론들 속에서 생산되고 조정되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담론들의 틈새로 여성의 한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리하여 이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근대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의 한은 어떤 언어로 형상화되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 혹은 대중문화에서 나타난 한이라는 고유한 정서를 우리의 관점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 삶의 체험에 근거한 새로운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개의 영화가 나름대로의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고 대중을 대하고 있고, 이를 감상하는 대중 역시 대중 매체로서의 영화가 의도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전달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수용 혹은 거부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감식안과 비판적 안목을 구비하려고 한다면 이때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은 관객인 우리 자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고유하고도 주체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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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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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영화

한국 영화에서의 여성의 한은 무속영화라는 장르에 의해서 다시 독특하게 그려지고 있다. 대다수 한국인의 무의식적인 정신 구조에 녹아있는 문화적 침전물로서 무속은 단순히 표현방식으로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제의적 양식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전통 사회의 억압적 질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동반한 근대화로 인해서 한국 여성들 의식 내면에 잠재해있는 상처와 고통 등을 치유하고 포용하려는 화해적 양식이 무속은 한국 고유의 신앙으로 일반 민중의 현세적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탐구하여서 얻어진 각종의 선험적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하는 신앙체계이며 동시에 인간의 모든 경험 내용이 침전된 민족고유의 집단적 연행 형태를 띤 예술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무속은 상류층보다는 일반 대중, 특히 여성들을 위한 민간종교이다. 이리하여 과거 지배계층들은 무속을 미신시하고 배척했지만 민중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소멸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근원적 정신구조로 남아있었다. 무엇보다도 무속은 부계 중심의 사회제도로 인해 소외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포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과 주체의식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무속이 사회에 내재해 있는 갈등과 모순을 사회적 또는 종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메카니즘으로 기능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공포영화, 역사물, 문예영화, 통속물 등 다양한 장르의 틀을 빌려 나타나고 있는 무속영화의 중요한 특징이며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시에 한국 사회의 은폐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존질서에 대해서 저항하고 해체하는 문화적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유현목의 <장마>는 좋은 예로 제시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G1U7IADQo&feature=youtu.be

그러나 친할머니는 길준의 죽음을 천수에 따를 운명으로 얘기하고 점장이에게 점을 보고 순철의 살아 있음을 믿는다. 이 과정에서 대립은 지속되지만 외할머니의 성스러운 의식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나아가서 두 할머니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으로 인해서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서로 갈등을 보여주지만 결국 무속신앙에 의해 혈연과 사상의 갈등이 전격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나아가서 외국에서 유입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갈등이 한국 고유의 신앙인 무속에 의해 해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외할머니는 그 망자를 가족들과 상면시키고 저승으로 배웅하는 무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서술의 원인과 결과는 모두 무속신앙에서 비롯된다. 이리하여 무속적 요소는 사건과 인물들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우선 영화는 자신의 꿈을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받아들이는 외할머니와 아들의 무사귀환을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친할머니를 대립시킨다. 이 과정에서 외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미래를 예언하는 계시로 알고, 집에 들어온 구렁이를 순철의 환생으로 보고 주술적 의식을 베풀어준다. 무속에서 억울한 죽음은 천수를 다하지 못한 불행한 사건이다. 이리하여 육체는 죽지만 그 영혼은 떠돌거나 다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구렁이는 저승에 가기 전의 순철의 원혼이며 죽음의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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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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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의 공동묘지> 이 영화는 <장화 홍련전>을 통해 일찍부터 여귀의 모태로 여겨져 온 가정비극과 기생의 인생 유전을 담은 30년대 신파의 구조를 근간으로 하면서 이 시기에 새롭게 부각된 ‘모성의 담론’을 주제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런 차원에서 가족과 가족담론의 재조직화를 핵심으로 사회전반의 재구조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무렵에 제작되었던 <월하의 공동묘지>가 일제강점기 가족으로부터 그 서사를 출발시키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여학생 명순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오빠와 애인의 뒷바라지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편승하여 갑부가 된 한수의 아내가 된다. 그러나 명순은 부르주아 가정의 아내이자 가부장의 계승자인 아들의 어머니가 되고서도 과거의 훼손된 순수성으로 인해서 고통받는다. 한편, 수난당하는 민족을 상징하는 오빠 춘식은 명순 가족의 도덕적 정당성을 희생시키면서 부와 명예를 추구한 한수의 부르주아 가정을 위협하는 과거의 망령이다.

여기서 지하로 스며든 독립운동가 춘식의 역사적 정당성이 동생의 행복을 위한 오빠의 애정이라는 사적 감정으로 치환되는데 이것 역시 60년대 후반의 여러 멜로드라마가 부당한 사회적 권력의 압박을 재현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따라서 명순의 원귀는 해원(解怨)을 현실권력에 의존함으로써 기존 질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승인했던 장화홍련과는 달리, 스스로 원수를 갚음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위한 상상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명순을 원귀로 만든 불의의 세력에서 그녀는 분리는 되었지만 이것이 역사적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한수와 모든 명분을 잃어버린 채 떠돌이가 되어버린 춘식과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불온한 결말이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신파적 요소가 <월하의 공동묘지>에 이르러 괴기와 결합함으로써 한국 괴기영화의 불온한 상상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후의 괴기영화의 한 전범이 되었다. 이처럼 <월하의 공동묘지>가 다른 공포(괴기)영화들과 공유하는 지점은 전통적인 여인의 한을 특정한 수용계층에 호소하는 그 양식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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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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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포영화

한편, 가장 최근에 새롭게 주목되는 장르가 호러물이라 불리우는 공포(혹은 괴기)영화이다. 이 장르에서 여성주의자들이 발견한 것은 공포영화 특유의 긴장과 공포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공포영화의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들이고 이들이 한결같이 기존의 규범으로부터의 이탈자로 묘사되어있다는 점에서 이 장르는 전통적인 규범을 강조하는 매우 보수적인 관점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성의 재현 방식에 있어서도 멜로 드라마 이상으로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사 초기부터의 고전이나 설화 혹은 전설 따위를 소재로 한 이른바 괴기영화의 전통과, 최근 <여고괴담>시리즈, <소름>, <가위>, <폰> 등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는 오랫동안 여성주의 이론가들에게 여성성의 담론을 위한 장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선 합리성을 추구하는 근대적 사유가 판타스틱한 방법에 의존하면서 비현실적인 스토리를 전개하는 이런 영화를 매우 퇴행적인 장르로 취급했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영화 분석을 위한 방법론의 제한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새로운 관점에서 공포영화를 분석한 이론가들은 공포영화가 공포라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심성에 호소하는 장르인 동시에 특정한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은폐되고 왜곡된 사회적 질서나 이념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서 50년대 만들어진 ‘돌연변이(mutant)’공포영화는 2차대전 이후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며, 80년대의 <에이리언>시리즈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비도덕성, 에이즈와 인간복제에 대한 공포 혹은 냉전 종식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외부세력에 대한 공포심 등을 상징한다.

물론 공포영화의 일차적 목적은 관객에게 긴장과 공포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쾌감을 제공하는데 있다. 그러나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의 실체는 흔히 ‘억압’과 ‘타자’라는 개념으로 나타나며, 여기에서 억압이란 일종의 과잉 억압(surplus repression)으로서 여성 특유의 억눌린 정서가 왜곡된 방식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특히 현저하다.

타자라는 개념 역시, 기존의 주체(우리) 중심의 철학적 세계관이 타자(타인)를 어떤 식으로 억압해왔는가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우리 문화에서는 성적 욕구, 동성애, 여성의 성, 아동의 성 등이 과잉 억압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백인의 입장에서는 흑인이,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성이, 어른의 입장에서는 어린이가 타자가 된다. 어쨌든 기존 체제는 타자로 규정된 것을 억압해왔는데, 바로 이러한 ‘억압된 것의 귀환’이 공포영화의 이론적 토대였던 것이다. 결국 호러 무비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며(정상성에의 도전 내지는 복수), 특정 구성원들의 집단적 악몽이다.

한국 영화에서 멜로드라마가 비교적 합리적인 방식을 통한 한의 표현이라면, 공포영화는 한에 대한 비합리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가 정서적 일치를 전제로 하면서 가부장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장르라면, 공포영화는 여성으로 하여금 정서적 일탈을 조성하면서 이를 통해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여성을 억압하였던 봉건적 가치관과 윤리의식 그리고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고립 등은 6, 70년대에는 주로 사극의 형식으로, 90년대에 청소년물로 구체적으로 재현되었다.

물론 공포영화의 일차적 목적은 관객에게 긴장과 공포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쾌감을 제공하는데 있다. 그러나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의 실체는 흔히 ‘억압’과 ‘타자’라는 개념으로 나타나며, 여기에서 억압이란 일종의 과잉 억압(surplus repression)으로서 여성 특유의 억눌린 정서가 왜곡된 방식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특히 현저하다. 한국 영화에서 멜로드라마가 비교적 합리적인 방식을 통한 한의 표현이라면, 공포영화는 한에 대한 비합리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가 정서적 일치를 전제로 하면서 가부장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장르라면, 공포영화는 여성으로 하여금 정서적 일탈을 조성하면서 이를 통해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여성을 억압하였던 봉건적 가치관과 윤리의식 그리고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고립 등은 6, 70년대에는 주로 사극의 형식으로, 90년대에 청소년물로 구체적으로 재현되었다.

우선, 김시습의 <금오신화>의 한 부분을 취한 <목단등기>의 처녀귀신, 고대 소설을 영화화한 〈장화홍련전>의 여귀, 중국설화를 각색한 <백사부인>의 인간으로 둔갑한 백사, <무덤에서 나온 신랑>의 달갈귀신과 여귀, <살인마>와 <목없는 미녀>의 여귀 등 주로 구전설화나 민담, 고전소설 등에 의존한 괴물형상으로서 대부분이 여성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1924년 <장화홍련전>을 필두로 한 한국 공포영화에서 독보적인 존재 역시 속옷바람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귀신들이다. <월하의 공동묘지>, <미녀 공동묘지>, <원한의 공동묘지>, <여곡성>, <며느리의 한> 등 60년대의 일련의 공포영화들은 한결같이 양반집을 무대 원한을 품고 죽은 며느리가 등장하고, 원귀로 돌아온 며느리가 남편과 시어머니를 괴롭히는 내용이다. 이들은 주로 대를 잇지 못한다고 하여 억울하게 독살당하거나, 가문의 정통성에 흠집을 낼만한 불륜의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살해당한 여성들의 원혼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봉건적 질서에 의해 억압받은 여성들의 모습들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대부분 여자들 혹은 여자 귀신들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흔히 여인들의 원혼이 고양이로, 박쥐로, 그리고 나비 등으로 전이되었다가 다시 인간의 몸을 빌려 환생하거나, 반대로 동물이 여인의 몸에 들어왔다가 인간으로 살아남기도 하는 이러한 스토리는 동물과 유난히 가까웠던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이 아닌 동물의 몸을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어야 하는 여성의 왜곡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영화의 이러한 특징은 60년대 대표작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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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애를 담론화 하는 방식은 식민주의/신식민주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식민 시기의 역사가 한국영화에서는 가장 드물게 재현되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성을 매개로 하는 억압과 통제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여성주의자이자 독립영화감독인 변영주에 의해서 1991년 세 명의 위안부 출신 여성이 대중 앞에 등장하기 전까지 위안부 문제가 전혀 올바로 기억되지도 않았고 스크린에 재현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변영주의 두 편의 영화 <낮은 목소리>와 <낮은 목소리 2>는 아직 화해되지 않은 식민의 역사로부터 나온 여성성의 탈 식민적 계보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 두 편의 영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육체에 대한 현재의 개념이 마치 역사적 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의 위안부 문제와 깊이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변영주는 독립영화운동이 마침내 대중주의 민중운동과 결합하던 80년대 후반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영화만들기 궤적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변영주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인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제주도에서 태국에 이르는 섹스관광을 추적한 작품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제주도에서 일본 관광객을 상대하는 한 접대부는 자신의 어머니가 위안부였다고 감독에게 고백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접대부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견이 계기가 되어 변영주는 위안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낮은 목소리>와 <낮은 목소리 2>를 만들었다. 김소영 저, <근대성의 유령>, 165 – 166 면 참조.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여성 관객에 소구해야 한다고 당당히 선언했으며 <낮은 목소리>에서 위안부들이 50년간의 침묵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 때, 여성 관객들은 그들의 슬픔을 공감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에 자신도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서 여성의 육체에 대한 재고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위안소에서 풀려나온 뒤 강제로 중국에 남아있어야 했던 한 위안부의 벗은 몸을 비추는데, 이때 카메라는 그녀의 약하고 주름진 육체를 매우 객관적인 시선으로 드러낸다.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위안부를 민족주의적 수사라는 박제화된 영역으로 방치한 무기력한 민족주의 서사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보여준다.

‘화냥년’이라는 말의 유래가 중국에 공물로 바쳐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를 가리키듯이 ‘종군위안부’는 일본 식민지가 강제시킨 성노동을 ’양공주‘는 미주둔군 기지를 근거로 한 성산업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군사정부와 일본의 우익정권의 공모야말로 위안부 문제를 침묵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침묵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탈식민 시대 한국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육체의 개념은 위안부 여성과 결부된 수치심과 연접되어 민족주의적 서사를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훼손되고 강간당한 여성의 육체를 은유로 사용해 일본의 강점과 전후 미군 주둔의 이야기를 서술한 1970년대 한국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이러한 류의 문학적 상상력과 더불어 위안부의 역사는 성 착취 영화에 등장하는 윤간 환상의 배후나 TV 다큐멘터리의 민족주의적 구출 환상을 촉진시키는 지렛대로 전유되었다.김소영 저, <근대성의 유령>,  165면

<낮은 목소리>가 오래 묵은 슬픔을 끄집어내기 위해 영화 내내 고백적 발화에 의존한다면, <낮은 목소리 2>는 오랫동안 억압된 욕망과 욕구를 표현하기 위한 우회 수단으로 노래와 농담을 동원한다. <낮은 목소리>가 종군위안부의 증언을 통해, 즉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역사적 서사를 그들의 관점으로 재기술했다면, 후편은 그들의 일상에서의 농담과 가사를 바꾼 노래를 통해 그 서사를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낮은 목소리 2>에서 할머니들은 ‘스스로 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리하여 반복적 농담과 노래의 양식을 통해 그들은 결혼과 출산에 대한 희망 그리고 노년의 연애를 이야기한다. 영화의 서사와 시각적 이미지를 스스로 연출하며 그들은 자신의 개인사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즉 역사적 폭력 때문에 경험할 수 없었던 부분을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암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강덕경 할머니는 감독에게 그가 죽은 후에도 자신의 이야기가 남도록 영화를 찍으라고 부탁한다. 김순덕 할머니는 자신이 소처럼 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찍어달라고 당부한다. 심미자 할머니의 경우 다른 아이들이 엄마 혹은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무너진다며 가족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윤두리 할머니도 다시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남편에게 사랑도 받고 싶다고 밝힌다. 그런가 하면 박두리 활머니는 성과 관련된 노래와 농담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적 구조는 사회적 구조 이상으로 역사의 구성물이며 이것은 주로 섹슈얼리티의 억압으로 일반화된다. 그러므로 과거 역사적 기록에서 차용된 수많은 인물들이 빚어내는 사건들은 공적 영역에서의 객관적 사실보다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음모와 불만 그리고 화해 등의 사적 사실에 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를 낳는 일, 그리고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 자신의 성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것은 매우 불온한 행위로서 반드시 규제와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주제를 재확인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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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영화 1.

영화의 탁월한 서사적 기능은 역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재현하고, 다양하게 해석하고 사고하게 함으로써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 역사물 역시 개인적 드라마와 역사적 드라마 사이를 동요하면서 대중들에게 역사적 사실과 개인적 덕목에 관한 술언 들을 새롭게 구성해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역사물은 왕실내부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음모와 갈등을 주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여성의 한이라는 주제는 정통 왕조 드라마에서부터 최근의 수정주의적 역사영화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면서 재현된다. 신상옥의 <연산군>은 이런 주제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박종화의 대표적 역사소설인 <금삼의 피>를 1961년에 영화화한 <연산군>은 상업적 흥행으로 인해서 이듬해 임희재 극본의 <폭군 연산>으로 이어졌다. 연산군 일대기는 이후에도 영화, 연극 그리고 TV드라마의 형태로 여러 차례 만들어 졌는데 이것은 연산군과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둘러싼 독특한 서사성으로 인해서 인간적, 정치적 문제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산군>의 경우 같은 해에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통치권 행사 방식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들과의 연계 속에서 폭군 연산을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이 좀더 구체화되었거나 노골화되었다면 검열과정에서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삭제되거나, 아예 상영금지 처분이 내려졌을지도 모른다. 대신 이 영화는 상당 부분 그 시대가 요구하는 담론의 의미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권력자에게는 바람직한 서사물로 변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감독은 연산군 집정기의 무오 사화와 갑자사화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당시의 정치권력이라는 공적인 맥락 대신 연산군 개인의 사적 맥락에서 다룬다. 동시에 연산의 폭정과 패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어머니에 대한 그의 ‘인간적’ 고뇌를 과장되게 그려냄으로써 관객들을 인간 연산에 대한 동일화와 반 동일화 적 지점에 위치시킨다.

결국 영화에서 폭군 연산과 인간 연산을 구분하는 선은 연산이 어머니, 즉 폐비 윤씨와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특히 연산군의 성격적 파탄의 원인을 왕권의 핵심과 그 주변 권력층들 사이의 역학적 관계에서 파악 하기보다는, 연산군 이라는 개인에게 귀결시키고 결과에 따른 책임 역시 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방식은 연산군의 부덕의 원인을 어머니와 연결 시킴으로써 부계로 계승되는 왕권의 정통성 에는 전혀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 연산군의 정치적 실패 혹은 연산군의 폭정의 주원인인 폐비 윤씨 사건의 주범도 여성인 인수 대비나 성종 주변의 후궁들 나아가서 피해자인 폐비 윤씨 본인으로 지목되고 선왕인 성종이나 주변의 남성 권력자들에게 전가되지 않는 것은 바로 남성 중심의 도덕적 기반을 흔들지 않으려는 서사구성인 것이다. 연산군의 성격적 이상 역시 정치적 상황에서 보다는 억울하게 죽은 윤씨의 한풀이와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모에서 비롯된다.

윤씨의 억울한 죽음은 회상 형식으로 영화 중간 중간에 끼여들게 되고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연산군의 사적 감정은 윤씨가 죽으면서 흘린 피가 묻은 옷자락에서 극대화된다. 이렇게 볼 때 표면상으로는 폭군이라 불리우는 연산군의 비행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매우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산군>은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멜로 드라마의 일종이며, 윤씨의 한 많은 생애와 연산군의 일탈적 행위는 남성 중심의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를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60년대가 요구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재생산 하려는 것에 기여 하려는 것이다.

https://youtu.be/pfRpkNx2Q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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