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gnificance of Culture(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문화와 상징

1) 문화에서 상징의 의미

문화 상징론은 문화의 이념적 측면에 연구의 중심을 두는 문화이론이다. 따라서 인간을 일차적으로 생산적 종(種)으로 보는 문화유물론과 비교할 때 문화상징론은 인간을 상징화된 종(種)으로 간주함으로써 문화관념론적 견해를 보여준다. 이때 상징에 대한 정의는“문화는 의미의 과학이다”라는 명제가 잘 말해주듯이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의 체계로 볼 수 있다. 즉 상징은 여러 가지의 기록, 사건, 형태, 물체, 언어, 음성 등에 인간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예술, 의례, 종교, 친족관계, 의류, 행동, 공간 배치 등에 의해서 상징이나 부호를 교환한다. 그러므로 상징인류학자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자연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에 의해 수신된 부호나 메시지의 체계를 연구한다.
인간에 의해서 표현되는 가장 일차적인 상징 형태는 언어이다. 인간의 지식, 사상, 감정, 지각 등은 상징체계인 언어로 변환되어 단어로 표출되며, 표출된 단어들은 의미나 이름을 전달하고 물체와 사고를 분류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세상에 대한 지각이 언어를 통하여 개념화되고 상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과 의사전달이 특정한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맥락의 범위 내에서 의미를 갖는 상징의 공유된 체계인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언어로서의 단어들은 사회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적절한 상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연구나 언어의 발전과정에 관한 연구는 문화의 상징적 관점을 파악하는데 있어 그 기초적 단서를 제공한다. 언어학은 상징론 학자들에게 인간의 경험, 행동, 동기 그리고 신념 등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그러한 언어를 통하여 형식화하는 방법으로서의 언어나 그 언어체계를 제공해왔고 이같이 복합성을 가진 어떤 암호를 풀어내는 연구방법론상의 테크닉을 제공해왔다. 따라서 언어학은 문화상징론의 선구적 분야라고 할 수 있다.

2) 카시러의 상징이론

이들 인류학자들과 더불어 문화에 있어서 상징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로는 카시러, Ernst Alfred Cassirer(July 28, 1874 – April 13, 1945)가 있다. 신칸트학파에 속했던 카시러는 언어, 예술, 종교 등의 각 문화영역들을 ‘상징형식’으로 본다. 인간이 문화적 동물이라는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인간이 상징(Symbol)을 사용하고, 이 상징을 통해 문화를 건설해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자연적 세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세계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또 타자와 의사 소통한다. 이러한 ‘상징적 형식’에는 언어 외에도 예술, 종교 학문 등이 있으며 이것들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정서, 원망 등을 밖으로 표현한다. 바로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영역들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상징적 형식들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심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게 마련인데, 문화학은 바로 이러한 각 문화 영역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고 체계화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카시러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자연적으로 문화를 이해하고 살지만 자연적 문화 이해는 삶의 실천과 거리를 두지 않기에 대체로 비반성적이다. 가령 우리는 언어학과 문법을 모르고도 언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역시 객관성과 본성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문화 이해는 삶 자체로부터 거리를 둔 객관성이라는 입장에서 문화의 통일적 구조를 이해하고 그 항상적 인간 본성을 통찰하려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카시러는 문화에 관한 여러 학문들의 공통적 연구방법론을 수립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각 문화대상들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개별 학문들을 방법적으로 관통할 수 있는 통일적 원리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하며 그 통일적 원리가 카시러에게는 바로 ‘상징적 형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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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상대주의와 윤리적 상대주의

이러한 문화상대주의가 윤리적 상대주의로 옮겨갈 때는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예를 들어 한 문화 내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인종차별이나 남녀차별과 같은 비인간적인 관행이나 풍습에 대해서 외부인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상대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한다면, 타인에 대한 존경과 인정보다는 오히려 제3자적 관점에서 방관과 무관심을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문화와 문화 사이의 교류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런 식의 극단적인 형태의 문화상대주의와 윤리상대주의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다른 문화에 대한 인정과 존경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인정과 존경은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서 자신의 문화가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몇 가지의 장점을 제공해 준다.

첫째, 우리가 선호하고 우리가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문화의 절대적 기준 그 자체를 회의하게 함으로써 열린 마음으로 다른 문화들을 볼 수 있게 한다.

둘째,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시대나 다른 사회의 문화양식이 우리 자신의 시대나 사회의 그것보다 더 열등하거나 더 우수하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다른 규범과 도덕적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존하고 합의하는 일, 다시 말하면 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이 문화 상대주의의 장점인 것이다.

어느 편도 결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자신의 견해를 상대방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간의 충돌이나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지배했을 때의 문화는 절대주의 문화관, 혹은 세계 시민적 보편적 문화관, 자기 민족 중심주의에 바탕하고 있었다.

개별문화의 다양성과 독자성을 인정하고, 문화의 충돌이 아닌 문화공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문화에 대한 가치 인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화상대주의의 근본적 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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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허스코비츠,Melville Jean Herskovits (September 10, 1895 – February 25, 1963)는 누구나 문화에 의해 매어 있다는 보아스,Franz Uri Boas (July 9, 1858 – December 21, 1942)의 이른바 ‘문화구속성’으로부터 ‘문화상대주의’를 이끌어 낸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판단은 각각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고, 경험은 각 개인이 성장과정을 통해서 받은 교육에 의해 해석”된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 자신의 경험은 우리가 그 속에서 자란 문화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판단은 문화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는 경우, 어느 누구도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간에 다른 문화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자신이 속한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 대해서 어떠한 가치평가를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문화상대주의’의 이념적 토대이다.

이처럼 ‘자문화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평화를 주장하기 위해서 베네딕트나 특히 허스코비츠가 이런 견해들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타문화에 대한 어떠한 객관적인 판단이나 분석을 거부하한다는 점에서 문화상대주의는 인류학 자체의 존립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문화 상대주의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문화는 그 개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현상적 차원에서도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때와 장소 혹은 집단에 따라서 문화는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흔히 문화로 규정되는 한 집단 내에서의 신념체계, 예절, 규범, 관습 등이 다른 집단에서는 부재하거나 거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오직 자신들의 문화에 보편성을 부여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객관적인 잣대로 삼아 다른 문화 즉 비유럽적인 문화를 판단하고 비판하였다. 물론 유럽인들의 타문화와 문명에 대한 이러한 판단은 문화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우월주의가 흔들리게 된 것은 문화 상대주의의 등장에 의해서이다.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반부터 인류학자들이 문화 상대주의 제창함으로써 각 민족의 문화적 규범 체계는 그 자체 타당성과 가치를 갖고 있음이 인정되었고 이로 인해 서구인들의 자문화 중심주의는 거부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가치, 지식, 진리는 그 사람이 속해 있는 문화적 배경 또는 체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었다. 이처럼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은 문화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특정 인간의 특수한 존재 양태이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일 수 없음을 전제한다. 개개의 문화는 각자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문화 이념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문화 현상에 있어 특정 문화의 우월성을 결정하는 보편적 잣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문화들 사이에 우열을 따질 수 없다. 오직 한 문화의 가치와 의미는 그 문화의 독특한 맥락 안에서만 평가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화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를 형성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 대신 문화가 주는 무게를 크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문화상대주의는 ‘문화결정론’을 함축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자신이 속한 문화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문화를 초월할 수 있는 이념성을 가질 수 없다면 학으로서의 문화인류학 자체는 불가능하다. 보아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인간은 필연적으로 특정 문화에 종속되고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인류학자들 역시 이미 특정 문화에 매여 있고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가 불가능하다면, 그가 바라보고 연구하는 문화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화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다른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를 다른 문화를 통해 기술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허스코버츠는 하나의 사회과학으로서 인류학이 특정 문화에 종속되지 않고 가치 중립적일 수 있다는 신념을 표명하고 있지만, 문화상대주의라는 논리 자체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판단이 있을 수 없고, 문화에 따라 상대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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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에서의 문화개념

1) 진화론적 문화개념

문화에 관한 연구가 이미 예전부터 역사학자, 철학자, 선교사, 탐험가들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문화 자체에 대한 과학적이고 본격적인 연구는 19세기 중반부터 인류학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이후 문화인류학에서는 다양한 문화이론이 전개되지만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타일러의 문화진화주의와 보아스학파의 문화전파주의를 중심으로 설명하도록 하겠다. 타일러 (Sir Edward Burnett Tylor : Oct.2,1832-Jan.2,1917)는 자신의 저서 <원시문화> Primitive Culture (1871) 에서 ‘문화학’ 혹은 ‘문화과학(science of culture)’의 과제를 두 가지로 설정한다.

첫째, 동일한 원인에 의해 동일한 행동이 유발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해 내는 일이고,

둘째, 다양한 문화의 차이를 인류문화의 ’발전 또는 진화의 단계(stages of development and evolution)’로 구성하는 일이다.

인간 문화 속에 내재하는 법칙을 사소한 그리고 가장 원시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찾아내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문화를 이해하고 미래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원시’문화에 관한 연구는 과거의 야만상태의 삶과 현재의 시민사회의 ‘문명화된 삶’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타일러의 이러한 생각에는 세 가지의 가설이 깔려있다.

첫째, 인류는 심리적으로, 문화적으로 하나라는 생각이다. 흔히 ‘심리적 통일성’으로 불리우는 이 견해에 의하면 인류의 본성과 삶의 조건은 거의 비슷하고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적 조건과 다양성과 같은 특수한 경우는 제거하고, 인류를 ‘본성상 동질적’으로 취급해야 하고, 차이는 단지 진화단계와 이에 따른 정도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현재 인류학자가 연구할 수 있는 원시문화는 선사시대의 문화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서구의 ‘높은 문화’를 중세와 고대 그리스 그리고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중간 문화’를 통해 연구할 수 있듯이, 지금의 원시문화를 연구함으로써 현재의 높은 문화의 원시단계인 ‘낮은 문화’를 재구성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높은 문화’ 속에서도 낮은 문화의 ‘잔존물(survivals)’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도로 합리화된 서구사회에서도 민속이나 점성술, 마술, 미신 등이 여전히 ‘관습의 힘에 의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화현상을 잘 밝힐 수 있다면 현재의 ‘높은 문화’와 애초의 ‘낮은 문화’ 사이의 중간고리를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민족의 풍속과 관습에 관한 연구는 현재의 문화적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고도로 발달된 문화 속에 낮은 단계의 문화에서 유래한 비합리적인 유산이 여전히 살아 남아있다는 것은 현재의 문화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므로 ‘생존물’을 확인하는 일은 삶의 합리화 혹은 합리적인 문화를 위해 필요한 과제가 된다.

타일러의 이러한 문화개념은 그 뒤 여러 차례 수정이 가해졌으나 모건을 비롯한 여러 후계자들에 의해서 오늘도 여전히 고전적인 정의로 통한다. 하지만 이후의 인류학자들의 문화 개념과 비교해 볼 때 문화진화론자로서 타일러에게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타일러는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시민사회가 이룬 문화적 성취의 전 단계로서 과거 또는 현존하는 원시문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문화는 낮은 문화에서 높은 문화로 진화, 발전하는 것으로 보되, 이 진화, 발전을 인류 전체의 보편적 역사과정에서 일어나는 단일한 과정으로 보았다. 물론 타일러는 비서구문화의 가치에 대해서도 인정하였지만, 이것이 곧 문화의 복수성을 인정하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화는 향상 단수로 쓰일 뿐 복수로 쓰이지 않았다. 따라서 타일러의 진화론적 관점은 필연적으로 유럽중심주의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문화는 이성을 통한 계몽, 합리화를 뜻하기 때문에 민간인의 풍습과 미신으로부터의 해방, 삶의 전 영역의 합리화를 겨냥한 근대 서구사회의 이념이 문화를 진화론적으로 보는 그의 관점에 내재해 있다. 이것은 타일러의 문화이론에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이 하나의 모형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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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문명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시민이 되다’ 혹은 ‘세련시키다’ 등의 뜻으로 쓰인 동사 civiliser 가 동명사로 바뀐 문명civilisation이라는 개념에는 근대 서구 국가가 이룩한 문화적 성취, 즉 과학과 기술을 통한 생활 조건의 변화,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와 법체제, 예술과 학문 등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 이성을 통한 역사 진보에 대해 희망을 걸었던 계몽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헤르더를 위시한 대부분의 근대 지식인들도 거의 한결같이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이 문명이라는 개념에서 찾았는데, 칸트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헤겔 역시 식민지를 경영한 영국인들을 일컬어 이른바 ‘문명의 선교사(die Missionarien der Zivilisation)라고 부르면서 세계 전역에 서양의 사고와 생활 양식을 확장하는 일을 인류률 위한 커다란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문화철학자 반 퍼어슨의 지적처럼 이제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 과학, 종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만남, 죽음과 삶, 성적 사랑, 재화 획득, 상품의 제조 등 모든 것이 문화를 구성하게 되었다. 문화를 이처럼 넓은 의미로 인간들의 삶을 위한 모든 생산 활동 혹은 그 결과물이라고 할 때, 이때의 생산이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활동과 그 산물이 아닌 모든 노동의 결과물, 즉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의 모든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세계에 대해 어떤 일정한 규정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세계를 개선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는 환경세계를 개선시키려는 인간들의 의지, 그 의지가 반영되어 나타난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서의 모든 생산물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 퍼어슨은 문화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본다. 왜냐하면 문화는 항상 변화에 관한 이야기요, 기존 문화 패턴의 변형에 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양한 행동 양식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의 변화 과정 자체로 파악된다. 문화는 예술 작품이나 책, 생활 도구 등 문화유산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또 박물관과 대학 건물, 회의장이나 공공서류등을 그냥 모아 놓은 것도 아니다. 문화는 이제 도구와 무기 제작, 춤과 서약송(誓約頌) 의식, 육아법과 정신 질환자 치료법, 성애와 사냥, 의회 소집과 칵테일 파티 등 다양한 행동 양식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문화 개념은 이제 훨씬 더 넓어졌고 역동적인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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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념의 변화

정신적 가치와 관련되었던 문화의 의미가 물질적인 것과 관련된 경제활동이나 신체적 노동을 통한 생산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민사회의 도래 이후였다. 근대 시민사회는 ‘욕구의 체계’라는 헤겔의 규정이 잘 말해주듯이 경제적인 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사회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전통적인 종교적 이념이나 윤리적 가치체계로부터 독립해서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제 경제적, 물질적 욕구는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 규제만 될 수 있다면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활기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요소의 독립은 도시상인과 시민계급이 시민사회의 주된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서 가능하였다. 시민사회는 인간의 노동과 능동적인 활동을 강조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의식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 즉 자연, 사회를 더 이상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개발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시민사회의 출현과 함께 문화 개념도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문화와 더불어 문명 개념이 등장이 잘 보여준다. 볼테르와 튀르고 그리고 콩도르세 등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의 여러 저서에서 인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완성’, ‘완벽화’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면서 문화를 인류의 완성을 향해 진보해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이해하였다. 인간 정신의 산물로서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독일의 계몽주의자인 헤르더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헤르더도 문화를 일차적으로는 정신의 도야, 정신의 형성(Bildung)으로 보았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류의 ‘인간화’, ‘문명화’, ‘개화’, ‘계몽’의 일정한 단계로 보았다. 

동시대인인 칸트 역시 비슷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칸트는 문화 개념 자체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조야한 것으로부터 좀더 세련된 것으로의 이행하는 문화과정을 자연에서 자유로의 이행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문화 개념의 발전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문화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이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노동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문화적 행위와 그 산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문화 발전이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 보존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인간은 노동의 고통을 감수하며 지식을 추구하고, 법을 만들어 내며 시민사회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문화화된(kultiviert)’상황이란 바로 ’문명화된(ziviliziert)’ 상황을 의미하고 이 것은 바로 학문과 예술, 법질서와 도덕화된 체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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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

하나는 문화 비판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적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그의 대표작인 <국가>에서 시인의 위치에 대한 비판과 소피스트의 활동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플라톤이 보기에 문화를 생산, 보급하고 시민을 교육하는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시인과 철학자가 서로 경쟁적인 위치에 있었다. 플라톤이 보기에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는, 단지 시인이 모방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반면 철학자가 추상적 개념에 의한 직관적 인식에 의존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하되 지향하는 현실이 다른 데 있다. 그들은 다같이 ‘모방자(mimetes)’이지만 철학자는 참된 현실(이데아의 세계)을, 시인은 단지 겉으로 나타난 현실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참된 교육을 위해 의존해야 할 지식은 시인이나 예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현실, 참된 존재 질서를 파악하는 철학자에게서 얻을 수 있다. 철학만이 유일하게 참된 현실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원을 교육하는 파이데이아는 철학적 파이데이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철학적 파이데이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생성에서 존재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불변의 세계로 정신적 눈이 향하도록 조정하는 활동이다. 달리 말해서 지식에서의 최고의 기준, 척도 중의 척도, 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불변하는 영원한 질서에 대한 관조이며, 영원한 질서에 대한 관조는 인간의 영혼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형성시킨다. 영원한 질서를 관조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그 질서를 ‘모방’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을 ‘형성’하고 ‘동화’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질서, 즉 영원한 퓌시스의 질서에 따라 산다면 영혼의 건강과 균형은 보장될 수 있다. 플라톤의 파이데이아에 관한 생각은 로마를 거쳐 르네상스 그리고 근대 시민사회의 문화 개념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문화 개념을 주도하는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의미를 가진 이러한 문화 개념은 계몽주의가 시작된 17, 18세기에 이르러 또 다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연의 지배자로서 적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 자신의 문화적 노력을 통해서 이 자연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화라는 말은 종교, 예술, 과학, 국가운영의 기술과 같은 인간의 고도의 지적, 정신적 활동의 다양한 표현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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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이념

동양의 전통문화는 농경문화다. 농경이란 일정한 공간의 토지를 이용하여 계절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는 기후 조건에 맞추어,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재화의 생산은 주로 인간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노동, 즉 그 생산과 가공의 인적 최소단위는 가정이다. 이처럼 가정으로부터 농경문화의 모든 것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재해나 인간의 전란 등을 극복하기에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기에, 농경사회에서는 노동에서 관, 혼, 상, 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들을 가정을 단위로 형성된 마을공동체 안에서 영위한다. 그리고 ‘이웃’과 ‘마을’은 주로 혈연과 친분관계로 조직되므로, 이들의 인간관계는 이해타산을 초월한 원초적 감정으로 형성된다. 전통사회에서 ‘효(孝)’와 ‘제(弟)’가 강조된 것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효‘가 한 가정 내의 질서를 구현하는 정감행위라면, ’제‘는 공동체 안의 관계질서를 선도하는 정감행위이다.

농경은 자연질서에 따라 일정 공간상에서 이루어진다. 즉 농경에서 생산하는 재화는 주로 동, 식물 등을 생육하는데 쓰여지고, 그것의 생육은 천지자연의 화육(和育)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다만 그 결과를 가지고 이용후생(利用厚生)할뿐이다. 동시에 농경은 공간(토지)의 한계와 시간(계절)의 변화를 절대적인 여건으로 삼아 ‘생산(生産)과 제산(制産)의 원칙’을 강구했다. 이것이 바로 농경은 ‘생성된 재화’만을 이용하지 ‘내재되어 있는 자원’을 꺼내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왜냐하면 농경이라는 생성체계에 놓여 있는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이용하는 것을 곧 되돌려 주는 과정이므로 농경에 의한 자원의 생성과정은 계속될 수 있으나, 이 생성체계에 놓여 있지 않은 자원은 그 자체가 유한한 것이어서 꺼내어 쓸 경우 고갈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경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자원을 채굴하여 쓰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원의 이식을 최대한으로 취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천지의 화육생성작용을 돕는 일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생성체계에 속해 있는 땅은 최대한 개간하여 농경지를 넓히고(地盡其利), 개간된 땅에 알맞는 곡식을 적절한 시기에 뿌리고 가꿈으로써 가급적 많은 수확을 확보하여 그것을 가급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요긴하게 쓴다(物盡其用).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물건을 아껴 쓰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줄이지 못하면 한정된 물질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욕망충족은 욕망의 자가발전이라는 족쇄에 걸려들어 결국은 더 많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한한 물질은 고갈되고 사회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설계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생활관이다. 같은 물량이라도 그것을 아껴쓰면 오래 가고, 같은 재화라도 아껴서 잘 이용하면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이것이 ‘절용애물(節用愛物)’의 정신이다. ‘수분지족’과 ‘절용애물’은 물질 쪽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속한 ‘도덕’의 문제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정덕(正德)’이라고 했다. 이처럼 유한을 극복하고 ‘안빈락도(安賞樂道)’를 추구한 것이 농경문화의 슬기이다. 따라서 농경문화는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들과 화합(順天應人)하는 순리와 평화의 삶이며, 인간관계의 질서가 ‘정감’ 위주로 유지되고 해결되는 삶이다.

한편 서양의 문화 이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παιδεία; (영어) paideia; 파이데이아. 그리스어 “교육, 학습”; “일반교양 교육” 이란 의미의 철학과 인식을 바탕에 둔 문화 이념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식과 행위의 규범을 인위성 또는 자의성에서 찾지 않고 퓌시스(Physis), 즉 자연의 질서 속에서 찾고자 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역시 퓌시스에 의해 주어진 것을 퓌시스에 알맞게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활동이 된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의해 파괴된 퓌시스와 노모스(Nomos)의 결합을 시도하면서 파이데이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를 극복하면서 퓌시스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탁월한 품성과 자질, 즉 ‘아레테’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길, 즉 파이데이아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파이데이아, 특히 철학적 파이데이아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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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작품을 구성하는 인물의 성격, 사건, 갈등의 원인과 해결 등이 모두 무속신앙에 뿌리를 두고 우리 민족 고유의 사고체계인 무속신앙을 관념적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전통 정서에 바탕을 둔 시각으로 전쟁의 비극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두 삼촌으로 상징되어 표출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두 할머니 즉 두 여성의 화해를 통한 무속적 고유정서를 압도하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의 원혼을 무속을 통해서 위로함으로써 화해를 시도하려는 <태백산맥>에서 되풀이된다.

(Photo from Google Images)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다시 요약해 본다면, 멜로 영화의 경우,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위주의 외형적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주의와 배리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은 특히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동요하게 된 여성들을 전통적 자리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로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여성들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서 역사물 경우, 여성들을 중심으로 음모와 불만 그리고 고통의 표현에 집중함으로써 은폐된 차원에서의 여성의 한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공포영화 역시, 특정한 시기 여성들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사회적 질서나 이념을 반영하는 서사물이라는 점에서 역사물과 동일한 방식의 재현물로 볼 수 있고, 비록 비합리적인 방식이지만 여성에게 가해진 고통과 절망을 배출시키는 분출구로 무속이 기능했으며 이런 차원에서 무속영화는 한국 여성을 둘러싼 갈등과 모순을 종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AXBFl03saY

이처럼 한국에서의 여성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 지배적 권력담론들 속에서 생산되고 조정되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담론들의 틈새로 여성의 한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리하여 이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근대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의 한은 어떤 언어로 형상화되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 혹은 대중문화에서 나타난 한이라는 고유한 정서를 우리의 관점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 삶의 체험에 근거한 새로운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개의 영화가 나름대로의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고 대중을 대하고 있고, 이를 감상하는 대중 역시 대중 매체로서의 영화가 의도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전달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수용 혹은 거부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감식안과 비판적 안목을 구비하려고 한다면 이때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은 관객인 우리 자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고유하고도 주체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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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Movie Attempting Consolation through Movie: “Woman’s Rage”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무속영화

한국 영화에서의 여성의 한은 무속영화라는 장르에 의해서 다시 독특하게 그려지고 있다. 대다수 한국인의 무의식적인 정신 구조에 녹아있는 문화적 침전물로서 무속은 단순히 표현방식으로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제의적 양식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에 자리잡고 있는 무속성을 드러내는 것은 전통 사회의 억압적 질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동반한 근대화로 인해서 한국 여성들 의식 내면에 잠재해있는 상처와 고통 등을 치유하고 포용하려는 화해적 양식이 무속은 한국 고유의 신앙으로 일반 민중의 현세적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탐구하여서 얻어진 각종의 선험적 지식과 기술을 토대로 하는 신앙체계이며 동시에 인간의 모든 경험 내용이 침전된 민족고유의 집단적 연행 형태를 띤 예술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무속은 상류층보다는 일반 대중, 특히 여성들을 위한 민간종교이다. 이리하여 과거 지배계층들은 무속을 미신시하고 배척했지만 민중들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소멸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근원적 정신구조로 남아있었다. 무엇보다도 무속은 부계 중심의 사회제도로 인해 소외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포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과 주체의식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무속이 사회에 내재해 있는 갈등과 모순을 사회적 또는 종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메카니즘으로 기능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점이 공포영화, 역사물, 문예영화, 통속물 등 다양한 장르의 틀을 빌려 나타나고 있는 무속영화의 중요한 특징이며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시에 한국 사회의 은폐된 존재로서의 여성을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존질서에 대해서 저항하고 해체하는 문화적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유현목의 <장마>는 좋은 예로 제시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G1U7IADQo&feature=youtu.be

그러나 친할머니는 길준의 죽음을 천수에 따를 운명으로 얘기하고 점장이에게 점을 보고 순철의 살아 있음을 믿는다. 이 과정에서 대립은 지속되지만 외할머니의 성스러운 의식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나아가서 두 할머니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으로 인해서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서로 갈등을 보여주지만 결국 무속신앙에 의해 혈연과 사상의 갈등이 전격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나아가서 외국에서 유입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갈등이 한국 고유의 신앙인 무속에 의해 해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외할머니는 그 망자를 가족들과 상면시키고 저승으로 배웅하는 무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서술의 원인과 결과는 모두 무속신앙에서 비롯된다. 이리하여 무속적 요소는 사건과 인물들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우선 영화는 자신의 꿈을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받아들이는 외할머니와 아들의 무사귀환을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친할머니를 대립시킨다. 이 과정에서 외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미래를 예언하는 계시로 알고, 집에 들어온 구렁이를 순철의 환생으로 보고 주술적 의식을 베풀어준다. 무속에서 억울한 죽음은 천수를 다하지 못한 불행한 사건이다. 이리하여 육체는 죽지만 그 영혼은 떠돌거나 다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구렁이는 저승에 가기 전의 순철의 원혼이며 죽음의 확인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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