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계명대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Movie Screen as Reflection of the Ego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3. 대중매체이론에서 전통적인 ‘수용자 audience’ 개념은 ‘익명의 상호 격리된 대단위 집단’으로서 균질화, 균등화 그리고 수동성과 피동성으로 특징 지워진 채 지배 이데올르기의 재 생산 기능을 묵묵이 수행하는 소극적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대중 mass’ 으로서의 수용자는 대중매체의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송신자의 표적이 되는, 달리 말해서 송신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설득 가능하고 조종 가능한 수동적 존재를 의미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문화비평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대중문화 수용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통적인 수용자 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수용자와 매체 간의 힘의 관계 설정에 있어 매체에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고 있어 수용자는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둘째, 수용자와 매체의 관계 이해에 있어 기본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전달적 모델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확정된 메시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고, 중요한 것은 효과의 측면이라는 고정된 관점이다. 셋째, 수용자에 관한 논의가 매체의 이미지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라는 거시적 관점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전통적 수용자의 모습은 언제나 취향이 천박하고 지적으로 열등한 제 3자로서 그려진다.(문화연구이론, 정재철)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문화 수용자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다양한 실증적 연구와 논쟁을 통해서 전통적인 수용자상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현대 사회의 수용자는 선택성과 적극성에 입각한 이성적 존재로 이해되었고 매체성 자체도 수용자의 능동성을 전제로 하여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영화에서의 수용자의 태도는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영화는 초기 단계부터 심리적인 혹은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인해서 다른 어떠한 매체보다도 위험한 매체로 백안시되거나, 역으로 그 영향력을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였다.이렇게 볼 때 탄생된 지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다른 매체에 비해서 대중문화이론에서 집중적인 관찰의 대상이 된 중요한 이유가 바로 각 개인, 즉 관객에게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매체 특유의 영향력에서 비롯되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직접효과이론’으로 불리우는 이러한 견해, 즉 영화 생산자의 의도에 대해서 수용자로서 관객은 단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관점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것은 오랫동안 영화 텍스트의 수용자로서의 관객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지연시켰다. 물론 영화를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에는 그동안 많은 수정과 변화가 있어왔다. ‘직접효과’ 이론으로 부터 시작하여 각 개인이 영화가 지닌 메시지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에 관한 논의는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영화를 보러가는 심리가 사회적 맥락, 영화관의 유형, 그리고 영화가 지닌 내용의 유형과 같은 요소들의 다양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따라서 영화관람의 경험은 영화서사에 집중하도록 하는 테크닉을 기꺼이 무시하고자 하는 성향과 관련된다. 영화 산업에서는 영화관객의 심리학을 어떤 특정 영화의 효과를 측정하는데, 그리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흥미를 유발 시키는데에 이용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화를 수용함에 있어 대중은 여론 선도자(Opinion Leader)의 지도를 받기도 하지만, 나름대로의 잣대를 갖고 평가하고 난 후 특정 영화 현상에 대해 수용 혹은 저항의 태도를 취한다. 즉 자신이 처한 물질적 조건과 생활방식 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수용하고 해독하게 되며, 그 결과 다양한 스펙트럼 상의 어느 한 지점에 해당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 특유의 해독과 변용의 형태가 각 집단의 독특한 특성을 반영하는 하위문화를 구성하고, 지배 문화에 의식적, 무의식적 대응을 하게 된다.

이처럼 생산자의 특정한 의도에 대한 관객의 수용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그리고 일률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수용자간의 상호관계 혹은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할 때만이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가설은 성립하며 이는 달리 말해서 영화의 다양한 영향력은 메시지의 수용에 있어서 관객의 능동적 해석과 자기화의 과정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수용자의 기대지평이라고 부른다면, 수용자의 사회계층, 사회적 규범에서부터 매체에 대한 기존의 경험에 이르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이러한 기대지평은 관객에 의한 ‘선택적 수용’의 주요 원인이 된다. 물론 기대지평은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정적인 것은 아니며 역동적이며 변화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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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미지와 자아의 동일성

2. 영화 제작자의 일차적인 목적은 스크린과 분리되어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거리감을 뛰어넘어 상상을 통해 화면의 세계로 들어가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경험하도록 설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경험이 스크린 상의 사건에 대한 관객의 감정상 일차적인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어디까지나 영화 속의 등장 인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차원에서 대리적 경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리적 경험이 영화적 서사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결정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영화 관람에서 심리적 양상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대리 경험은 대개 두 가지 기본요인들로 인하여 일어난다.

첫째는 주의력의 전이이다. 관객은 의식적으로 영화의 테크닉과 스타일을 무시하며 서사 속의 사건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절정을 이루게 한다. 둘째는 이 과정에서 관객은 영화배우들과 인물, 이야기의 타입 그리고 상황과의 자신을 일치시킨다. 셋째, 이리하여 관객들은 서사의 사건들 속으로 ‘뛰어들려는’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관객들의 이러한 심리적 동기는 바로 그런 상황을 고무하도록 서사를 꾸민 제작자의 바람과 어우러진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영화제작자들이 서사의 형식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테크놀러지 역시 이러한 서사적 테크닉을 은폐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카메라의 테크놀러지는 카메라의 일련의 움직임들을 관객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특이의 편집기술을 사용하면서 스크린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이리하여 모든 영화는 서사에 관객의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통해서 관객들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과 그 인물이 처한 연속된 상황에 깊이 관여하게 되도록 유도된다. 이때 ‘선유경향’이 이러한 심리적 상황의 조건이라면, ‘동일시’는 이러한 집중적인 관람 경험에 의해 발생하는 심리적 결과이다.

선유경향 이란 영화에 대해서 관객들이 가지게되는 일련의 선지식, 선입견, 기대감등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앞으로의 관람과정을 통한 즐거움, 혹은 실망감, 또는 같은 시간에 집에서 텔레비젼을 못 보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보상 심리 등 그 범위가 매우 넓다.

동일시는 ‘관객 자신을 영화 속의 한 인물 또는 여러 인물들의 위치에 놓는 것’ 또는 영화 속의 인물과 ‘감정이입’하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흔히 ‘감정적인 집착 또는 좋아함의 표시’에 의해 측정되어지며, 이러한 동일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형태를 지닌다. 하나는 관객이 자기 자신과 가장 비슷한 인물들과 동일시를 이루고, 둘째는 관객이 자기 자신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인물과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한편, 영화 관람은 일반적으로 다수와 함께 진행된다. 홀로 영화를 보러 간 경우에도 영화관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집단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영화관의 관객은 사회학적 용어로 이른바 ‘비구조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이 집단은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작용에 의해 이질적인 개인들로부터 하나의 공감적 집단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이리하여 스크린 상의 메시지는 관객 개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상호간의 심리적 작용에 의해 해석․부연되고 과장․축소되면서 관객들 전부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 물론 이때 영화제작자의 의도와 영화관객들의 반응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거부감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나머지 관객들의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반응한다. 이러한 집단적인 분위기는 영화 메시지의 전반적이고도 자발적인 수용에 공헌한다. 여기에서 개별적 차원에서의 ‘동일시’ 개념은 대중매체 이론에서의 중요한 개념인 집단 차원에서의 ‘수용자’ 개념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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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미지와 자아의 동일성

  • 영화와 정신분석

영화는 19세기 말에 출현하였고, 한 세기가 조금 넘는 짧은 기간 동안 일반 대중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끼치는 대중 매체가 되었음은 사실이다. 영화가 급속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영화가 출현하기 바로 전에 탄생한 사진술의 발달은 영화를 위한 ‘리얼리즘’의 재개념화 작업을 준비했다.  대중이 기존의 시각 예술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받아들인 사진적 사실주의는 인간의 시각적 경험의 근저에 영향을 끼쳤고, 그림과 연극 특히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리하여 영화는 대중들이 쉽게 동감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사진적 이미지를 자신의 시각적 표현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영화의 성공을 심층적 또는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심리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영화를 “꿈의 세계”라고 부르며, 그리고 헐리우드를 “꿈의 공장” 이라 부른다. 이것은 은연중에 영화와 꿈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꿈을 ‘욕망 충족의 기능’으로 해석하면서 현실의 결핍과 상실을 무의식적으로 보상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꿈이 이처럼 소원 충족적 과정이라면 영화 관람도 일종의 소원 충족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린 역시 관객의 판타지와 욕망들, 즉 그들의 무의식을 투사하는 공간이며, 이  공간을 통해서 관객들은 현실 속의 소통 부재를 무의식적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이 꿈을 꾼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현실 이외의 꿈이라는 가상현실 속에 살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스크린에서 그려지는 세계야말로 현실과는 전적으로 분리된 가상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초기 초 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꿈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영화가 만들어지는 편집과정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보았다. 물론 인간이 꿈꾸는 상태와 영화 관람행위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꿈꾸는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반면, 영화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둘째, 영화는 끊임없이 지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극을 의식하는 지각주체는 잠재의식적인 욕구가 완전히 퇴행적인 길로 들어서는 것을 차단시켜준다. 따라서 꿈속에서는 현실의 환영인 것이 영화에서는 단지 현실의 느낌으로 남게된다.

셋째, 자극이 오는 위치의 상이함이다. 꿈에서는 과의 기억이나 무의식의 욕망들이 자극이 되어 꿈 작업을 거쳐 지각적 이미지로 나타나게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외부 세계의 자극들이 지각, 의식 체계를 거쳐 전의식과 무의식의 기억을 자극한다. 즉 꿈에서의 자극이 의식 내재적이라면 영화는 의식 외재적이다.

이러한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이처럼 꿈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이 매체가 관객들의 감추어진 두려움과 욕망을 상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영화의 메시지는 이러한 무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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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프레임이라는 4각의 틀은 영상 구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한 2차원적 평면이 심리적 3차원 혹은 4차원으로 변형되는 이 마술적 공간의 존재에 영화감독들은 대단한 매력을 느꼈다. 이것은 마치 화가에게 있어서 캔버스와 같이 많은 감독들이 화면 구성의 균형과 표현성에 역점을 두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아무리 짧은 시간 동안 영상을 본다 할 지라도 스크린에 비치는 평면의 영상을 관객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실제공간과 유사한 3차원적 공간으로 오해하고 반응한다.  여러가지 한계들, 즉 프레임의 존재, 3차원적 공간의 부재, 색체의 부재나 인공적인 성격 등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현실과의 유사성은 아주 강렬하게 인식되어 특히 움직임의 환영이나 심도의 환영에서 보여지는 영화 특유의 현실감을 발생시킨다.

이외에도 미학적 장치로서 프레임은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쇼트 내에 담긴 사물들을 통일하는 기능을 보여준다. 예술은 여기서 혼동상태의 현실 세계로부터 질서를 만들어 낸다. 또한 프레임은 강조의 기교로도 쓰이는데, 감독은 프레임으로 광범위한 맥락에서는 간과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사물에 특별한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게된다. 특히 클로즈업의 프레임은 가장 미세한 디테일을 정확히 잡아 낼 수가 있다. 영화에서 대부분의 은유와 상징은 영화 매체 자체의 물리적인 특성에서 비롯된다. 프레임안의 어떤 부분은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프레임 안에서의 배치는 형식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내용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된다.

그러나 영화적 공간은 단순한 프레임이라는 틀이 아니다. 또 이미지들은 단순히 2차원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공간이란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화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에서 공간과 시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이론가들은 ‘시공간 연속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추상적 개념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영화에서 그 구체적 현실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에서의 공간 즉 프레임은 가장 최초의 단위인 쇼트로부터 씬, 시퀀스 등으로 연결되며 여기에는 카메라 각도인 앵글이 추가된다.

쇼트(Shot)는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이며, 감독이 레디 액션해서 컷 사인이 날 때까지 즉 한 번의 지속적인 카메라 작동으로 촬영된 필름 단편이 쇼트이다. 동시에 쇼트는 사물과 피사체의 거리, 혹은 하나의 네모난 구도안에 잡는 움직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쇼트는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에 의해 꼭 정의되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렌즈에 의해 거리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다양한 쇼트는 화면의 틀 안에 담긴 선택된 소재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쇼트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에 영화에는 다양한 종류의 쇼트가 있다.

Scene 은 무대라는 말의 어원인 그리스 고대극의 의상실 (Skne) 에서 온 말이다. 희곡에서는 막중 드라마 진행의 최소 단위로 장 또는 경이라는 역어에 해당한다.영화, 텔레비젼에서는 삽화로 어느정도 정립된 부분이다. 시퀀스 중 한 장면으로 일반적으로 시간, 장소가 변할 때마다 씬이 변한다. 쇼트(커트)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으나 한 쇼트가 한 씬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일련의 쇼트들을 결합하면 한 번에 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통일된 행위인 씬이 된다. 따라서 씬은 한 시퀀스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장면을 의미한다. 시퀀스(Sequence)는 영화의 단락이며 영화의 가장 큰 기본단위이다. 영화의 연속된 화면을 의미한다. 또한 Seane 이 여러 개가 모여 Sequence가 된다. 시퀀스는 영화가 진행됨에 있어 하나의 문단을 뜻한다. 연극의 막에 해당하는 극적 국면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Sequence 가 모여 영화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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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and Space are Inextricable- 4(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베르그송은 이처럼 시간을 공간을 측정하듯이 양적으로 나누고 측정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총체로서의 시간을 직관(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을 통해 이해하려 했다. 사물은 공간 속에서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지만 다른 사물과는 다른 그 사물만의 본성을 알아 내려면 시간 속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을 직관을 통해 인식해야 한다. 공간처럼 분해된 사물은 운동이 없는 단면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러한 사물이 존재하려면 바로 운동이 그 사물의 단면들을 관계 맺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한 관계맺음을 통해 사물은 비로소 시간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모든 사물은 지속속에서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만 그 본성이 파악될 수 있다.

시간이 연속적이라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연속적으로 연결된 형태로 시간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려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것이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는 실재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그 순간 이미 과거가 되기 때문에 시간은 항상 현재로서 지각되지만 현재는 항상 과거로서 지각된다. 즉 앞에서 제논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관념적이고 수학적으로는 시간을 단절된 파편들로 분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시간의 양적 분리는 불가능하다. 시간은 그 자체로서 연속적이고 연속적이지 않은 것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제논의 화살이 날지 않으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화살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나의 현재라고 부르는 심리적 상태는 즉각적 과거에 대한 지각이자 동시에 즉각적 미래애 대한 결정이어야 한다.” (Bergson, 1939: 153) 추억(souvemir)은 기억이 보관하고 있는 표상이나 생각을 지칭하며 기억(memoire)은 추억을 보관하거나 불러오는 기능이나 능력을 말한다.

4. 현실에서의 모든 운동은 이처럼 시.공간의 차원을 가진다. 그러나 앞에서도 확인 했듯이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이 두가지 차원 중 하나의 차원으로 운동이나 변화를 의식한다. 예를 들어서 식물이 자라는 것이 시.공간적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지만 그 움직임이 공간적 차원에서는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에 시간의 문제로만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총을 쏘는 것은 공간의 이동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거의 미분적 시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현실의 움직임은 계속적이지만 스크린의 움직임은 단속적이며 정사진(Still)을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서 얻어진다. 이런 면에서 스크린의 움직임은 인공적이기 때문에 시.공간의 차원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여러가지 방법(느린 동작, 혹은 빠른 동작)으로 조정되며 새로운 경험도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제논의 역설도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 공간의 관념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과의 차이에서 유래하였는데 따라서 이러한 의도적인 오류는 영화에서의 의도적인 시간의 연장인 슬로우 모션에 의해서 쉽게 극복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 공간의 문제는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까지는 과학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과학 내부에서 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고전 물리학적인 시, 공간 이론 -시간은 일직선으로 지속적으로 흐르며, 공간은 유클리드적인 구조로서 고정되어 있다- 은 상대적 이론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이제 현대과학에서는 시, 공간은 함께 결합되어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간 안에서 움직이며 공간도 시간과 같이 흐르는 것이다. 더 이상 물리학의 단위는 시간과 공간의 단위가 아닌 시공단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시, 공간 이해를 예술적 형식으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영화인 것이다. 즉, 하우저가 말한대로 “현실과 문학과 연극에서의 시간은 명백히 발전 지향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는 이와 반대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공간 안에서 움직이듯이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영화는 미래든 과거든 마음대로 갈 수 있으며 시, 공간적으로 분리된 사건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의도적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 아놀드 하우저 저, 최성만, 이병진 역, <<예술의 사회학>>,(서울: 한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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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엘레아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로서 제논의 운동부정이론은 스승인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한 존재불변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이다. 그의 역설적 주장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이(二)분(分)의 역설’, ‘경주의 역설’ 그리고 ‘날으는 화살의 역설’ 이다. 이중에서 ‘날으는 화살’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분의 역설’을 보면 어떤 지점 A 에 도달하기 위해서 한 운동체는 우선 출발점에서 지점 A 까지 전체거리의 절반을 움직여야하고, 그 다음에는 나머지의 절반을,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을, 다시 그 나머지의 절반, 이런 식으로 무한히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전체 거리를 주파한다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운동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 ‘경주의 역설’도 비슷한 논리다. 빠른 발을 가진 아킬레우스는 느린 거북이와 경주를 시작한다. 이때 거북이의 속도는 아킬레우스보다 열배 정도 느리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출발은 아킬레우스는 A지점에서, 거북이는 이보다 앞선 T 지점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제논은 아킬레우스가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T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아킬레우스가 달린 거리의 1/10 거리만큼 나아가기 때문에 거북이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항상 아킬레우스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날으는 화살의 역설’에 의하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로의 매순간 화살은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공간의 일정한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은 화살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공간을 순간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화살이 그 순간 정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살은 날아가지 않고 영원히 정지해 있는 것이다.

제논은 왜 이러한 학설을 주장했을까? 그리고 그 오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제논의 오류는 운동체가 지나간 궤적을 구체 지속 속에서 체험된 운동 자체와 혼동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운동을 측정하는데 쓰이는 공간은 실상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는 분할이 불가능하다. 운동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의 진행 자체, 다시 말해서 계기적인 위치들과 그 위치들의 종합인데 제논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자가 등질적인 공간이라는 양의 집합이라면, 후자는 시간이라는 의식내부의 질의 차원인데도 평면위에서 좌표화 한것을 운동의 전부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좌표와 하는 것이 운동을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고찰하는 데는 편리할 지 모르나 운동의 본질적 의미는 그런 방식으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은 그 본성상 연속적이지 분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운동이 보여주는 이러한 질적, 구체적 지속은 베르그송에 의해서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오성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연역논리가 시간의 부정이라는 것도 쉽게 증명되는데 그 이유는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를 연역해 낸다는 것은 두 명제가 동일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미래를 연역해낸다는 것은 미래와 현재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역논증에서의 논리적 동일성은 시간적 계기를 사상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결과를 원인에 환원시켜 동일시함으로써 시간적 비 가역성을 모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연역 논리가 실패한 이 문제에서 변증법적 논리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변증법은 동어 반복이 아니라 모순극복의 방법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물과 개념들을 운동과 상호작용,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변화와 생성, 그들의 발전과 쇠퇴 속에서 고려하는 이 변증법적 방법은 변화나 생성 그 자체를 법칙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상반되는 것들과의 대립 및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순과 상호대립은 비약에 의한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구체적이고도 본래적인 시간이해를 우리의 의식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음을 다른 어떠한 양식 보다도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영화에서의 심리적 시간이란 이러한 양적 시간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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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and Space are Inextricable! (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시간화

1. 시간과 공간은 추상적인 형식으로 세계와 자연을 구획함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규정한다. 시, 공간에 대한 고찰이 모든 과학의 시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이유이고, 시, 공간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 근원적 주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동시에 시, 공간은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고대로부터 수학적 계산의 대상이 되었다. 공간의 경우, 점(위치)의 연결에 의해서 선분이 구성되고, 선분은 길이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에 1차원적 존재이고, 평면은 길이와 넓이를 가지는 2차원적 존재이다. 그리고 높이와 깊이, 넓이를 가진 공간은 3차원적 존재이다. 시간도 측정할 수 있는 기본 단위로서 1초의 지속을 출발점으로 하여 분,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등 기본적인 단위로 시간을 셀 수 있다.

그러나 계산 가능한 양적 대상인 시, 공간이 현실에서는 구체적이고도 질적인 것으로 체험된다. 사건들로 가득 차서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를 되돌아보는 경우, 지나간 시간은 결코 양적 대상으로만 동일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상상력을 통해서 기쁨과 근심과 노동으로 가득 차 있는 하루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인 내용들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이 사건과 내용들이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정 사건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기에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반면에 특정 사건은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두고두고 기억 속에 남아있다. 따라서 지속이라는 사건이 공허할수록, 시간 속의 내용이 빈약할수록 그 시간은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고, 반대로 지속이라는 사건이 충만할수록, 시간 속의 내용이 풍부할수록 더욱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바탕에는 이런 상상력이 제거할 수 없는 시간 그 자체, 즉 경과하는 모든 사건들을 양적으로 동일하게 실어 나르면서 우리의 의식에 남겨 놓는 시간 그 자체가 있다.

시간을 추상화할 수 없듯이 공간도 추상할 수 없다. 거주하는 공간상의 모든 대상들을 비워버려도 공간 그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공간의 크기는 그 대상들이 공간을 점유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공간의 밀도성이 공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 공간은 내가 결코 비워버릴 수 없는 구체적 경험의 소여이며 경험의 세계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관되어있다.

반면에 시. 공간을 추상적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과학적 사유가 요구하는 전통적 방식이다. 시, 공간에 대한 추상적 표상이란 앞에서도 확인했듯이 이에 대한 수학적 측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측정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시간을 공간으로, 공간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것이다. 이때 시간의 측정이란 일정한 속도로 이동하는 운동체가 지나가는 공간, 예를 들어서 시계바늘이 문자판 위에서 편력하는 공간을 측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의 측정이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의 위치들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운동을 통한 시간과 공간의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우리들은 보게 되는데, 이른바 ‘제논의 역설’이 이러한 주장의 고전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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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usation and Freedom, Holistic View 6<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페미니즘의 영역 확장으로 인해 남녀 간에 있었던 사회적 위치의 차이와 역할 구분 또한 모호해졌고, 동성애에 대한 변화된 시선을 동반하게 된다. 한때 에이즈의 역공으로 인해서 주춤했던 동성애는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요한 문화적, 예술적 코드로 채택되기에 이르렀고, 특히 ‘성적 소수자’라는 인권 문제와 결부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중요한 이슈로 부상되었다. 이리하여 <왕의 남자>에서 <쌍화점> 그리고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크라잉 게임>에서 <브로크백 마운틴> 그리고 <캐롤>에 이르기까지 동성애 코드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은 남녀 성역할 교환이라는 차원까지 진행되는데 <쥬니어>에서는 남자의 임신가능성을 예고하고 있고, <스위치〉에서는 여성의 몸에 들어간 남자의 영혼을 통해서 불평등하게 분배된 남녀 성적 권력의 부당함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에이리언>,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레지던트 이블> 등 SF 영화는 이러한 주제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외계의 괴물이나 악의 세력으로부터 어린 생명들, 동료, 인류를 구하는 일은 인류애와 모성애로 무장된 섹시하면서도 강인한 몸매를 가진 여성들의 몫이며, 반대로 남성들은 하나 같이 나약하거나 비겁한,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 찬 비윤리적인 존재들이다. 물론 대중문화가 그리고 있는 이런 미래상이 명확한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수억 년의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생명 잉태를 위한 남녀의 생물학적 역할이 쉽게 변화되거나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대중적 서사물들이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것은 전통적인 성역할, 차별 그리고 불평등은 전시대적 패러다임이며 따라서 이런 이데올로기를 이제 수정하거나 폐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생물학적 차원의 ‘쪼갬’에 머무를 수 없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새로운 ‘합침’이 새로운 정신과 정신의 풍요함을 가능하게 함을 이들 영화들은 주장하는 데 이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이미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한 때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자연히 완전하였던 상태로의 복원을 소원한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 됨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의 추구이다.” 이렇게 볼 때 자신의 잃어버린 짝을 찾는 성적 결합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은 왜 남녀를 분리했을까? 즉 왜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했을까? 남녀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은 무한한 힘을 가지게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우스는 “삶은 달걀을 자르듯이 인간을, 즉 남녀를 정확하게 자르는 것”이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방법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거꾸로 해석한다면 결국 자신 안에 내재하는 양성적 요소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이에 근거하여 양성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인간은 신처럼 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백발마녀전>에서 엄청난 힘을 가진 마녀는 남녀의 두 몸이 붙어 있었고,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나약한 여성적 자태를 보여준 몰리나야 말로 가장 용감한 최후를 선택할 수 있었고, <스위치>에서 주인공 스티브에게 천사가 마지막으로 허락한 축복은 자신 속에 양성 모두를 간직한 채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었고, <에이리언 3〉에서 리플리는 자신의 몸 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채, 남성 동료들을 위해서 용광로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애만이 유일한 사랑이라는 고집으로부터, 정형화된 성적 패턴에 충실하는 것만이 도덕적이고 가장 정상적이라는 도그마로부터, 음양의 공생(태극)이라는 가치관은 거부한 채 남녀의 위계적 질서가 인간질서의 근본이라는 고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들은 진정으로 풍요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구현할 수 있고, 성적 차별과 계급적 차별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신(神) 마저 두려워하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무한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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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usation and Freedom, Holistic View 4<이강화 교수의 일요 문화 산책>

Women Washing Clothes by a Stream by Daniel Ridgway Knight, 1898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여성의 몸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여성의 몸을 역사와 사회라는 시공간 속에서 자발적으로 그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였다. 즉 여성의 몸은 이제 더 이상 남성의 시각과 욕구에 의해서 재단되는 욕망적 대상이 아니고 재생산과 재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적 존재로서의 여성으로 하여금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그리고 보다 인간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투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여성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페미니즘 운동을 비롯한 여러 실천적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되었다.

그런데 문화나 예술의 경우, 이러한 실천과 운동은 흔히 고급문화라 불리우는 전통적인 예술영역에서 보다 일상생활에서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중문화에서 좀 더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고전문화에 비해서 시대 반영적 성격이 강한, 다시 말해서 당대적인(contemporary) 이슈에 보다 민감한 대중문화의 속성상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대중 매체에서 구현된 변화된 이미지는 대체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순종적이고 예속적인 모성애로부터 전투적 모성애에로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신체에 대한 여성들의 주체적인 결정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확연히 구분된다기 보다는 서로 밀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아홉 달 동안 자신의 몸 안에 있다가 – 이 부분이 남성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모성애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 분리해 나간 또 다른 자신이 자식이기에 자신의 분신인 자식의 몸과 영혼에 대항 어머니의 정서와 태도는 아버지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경우, 자식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리고 탄생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신체와 구분되는 객관적인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고 이러한 객관적 관계는 사회적 질서가 아버지의 이름(姓과 家門)으로 자식의 존재 의미를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혹은 가부장적 질서)는 ‘그의 이름’으로 원초적인 감정 대신, 자신의 사회적 지위, 가문과 혈통에 부합되는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객관적인 위치를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부차적이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한 생명체의 생산 혹은 출산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은 잉태과정을 어머니는 생명 자체의 존재성과 숭고함의 출발로 받아들이기에 다른 객관적인 조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사회적 질서가 요구하는 아버지와 자식 간의 수직적 관계와, 자신의 분신으로서의 결합된 어머니의 자식 간의 수평적 관계는 애초부터 갈등적 관계를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린다 해밀턴 주연의 <터미네이터>와 시고니 위버 주연의 <에이리언>시리즈가 이러한 주제를 잘 말해준다. 특히 <에이리언>시리즈가 앞에서 말한 갈등과 역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괴물을 몸에 잉태할 수 밖에 없음에도 그 괴물을 또 소멸시켜야 하는 리플리은 여성 신체의 역설적 이중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남성적 질서를 상징하는 우주 감옥에서 죄수(남성)들의 생존을 위해서 리플리가 괴물을 잉태한 채 용광로로 뛰어드는 3편의 마지막 장면은 여성의 몸에 대한 다양한 질문 – 도대체 누구가 여성의 몸의 주인이가? 남성들은 무슨 권리로 여성의 몸을 담보로 자신들의 안위를 추구하는가? – 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성의 신체에 대한 주체적인 결정권은 사회적 차원에서 전통적 의미로서의 결혼의 거부 혹은 낙태의 권리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주제는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시선의 주체를 남성에게 두지 말자는 것이다. 남성들의 시선에 의한 존재 의미와 미의 규정은 여성의 삶 자체를 끊임없는 예속적 상황에 머무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런 관점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영상물이 마돈나 주연의 <진실 그리고 대담>이다.

마돈나 그룹의 세계 순회공연을 담은 다큐멘타리인 이 영화에서도 마돈나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모성적 이미지로 치장한다. 단원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그녀 역시도 그들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자식처럼 대해주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그룹 특유의 친화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곧 마돈나는 성의 해방을 위한 전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영화 중간에 자주 노출되는 기존 가치들과의 계속되는 갈등과 마찰 – 그녀의 공연에 대한 지역 언론의 부정적 묘사와 교황청과의 지속적인 갈등 – 은 그녀에게 있어서 이러한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투쟁성은 그녀로 하여금 실크 햇과 가죽끈으로 만들어진 검은 의상을 입고 긴 채찍을 들고 무대 위에 나타나게 한다. 반면에 남성 무용수들은 그들의 부드러운 몸매와 유연한 몸놀림, 그들 가슴에 매단 과장된 브래지어를 통해서 그녀의 남성적 이미지를 강조해 준다. 관객들은 공연 시작 전에 무용수와 함께 경건하게 기도하던 그녀와 무리들이 갑자기 전치된 성역할과 함께 보여주는 무대 위에서의 외설적인 행위를 충격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이처럼 이질적이고도 혼란스러운 상황의 병치와 그녀의 양면적 이미지는 여성의 몸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구조를 깨트리려는 마돈나의 의도적인 설정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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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성과 자유 그리고 총체성

<Korea, GaeMung Univ. Prof. Lee, Kangwha>
문학과 예술은 수용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표현양식과 전달방식이 변해왔다. 예를 들어 전통사회에서 오랫동안 사랑 받아왔던 판소리는 더 이상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 되지 못하기에 이젠 이야기꾼들이 사라졌고 표현 양식도 대중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 마치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는 철학이 기존의 무력한 개념과 사고를 계속 사용하다가 사라지듯이 특정 예술 양식이 새로운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소멸되거나 변형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현대미학이 예술사회학과 만나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어떠한 문화 산물이 특정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여 예술이라고 불리우게 되며 또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규명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각 표현방식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기에 개인적 차원에서 인쇄물인 소설 <춘향전>을 읽느냐 판소리 <춘향가>를 듣느냐는 취향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지만, 특정 시대의 소비자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구별된 양식은 있기 마련이기에 작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수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술 생산물을 공급하게 되는 것이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문학을 시문학으로 한정하면서 그 종류를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나누었는데, 이때 소설은 이 세 가지 양식 중 어느 곳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헤겔이 보기에 예술은 총체성의 형식을 지녀야 하며,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서정시는 주관적이며, 서사시는 객관적이며 극시는 종합적인 총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서 소설은 단순히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산만하게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기에 결코 총체적 예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철학이 근거하던 낭만주의가 사라지고 사실주의와 유물론이 대두되면서 근대적 매체로서 소설은 어떤 장르보다 대중성이 강한 예술로서 자리를 잡았다.

소설이 지닌 예술성은 루카치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옹호되었다. 루카치는 소설을 서사시, 극시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객관성과 총체성을 보여주는 예술 양식임을 강조하였다. 화폐만이 모든 가치를 규정하는 부르주아 시대에 들어서면서 현실 속에 모든 내적 통일성은 사라졌고, 이제는 신조차 상실된 이 시대 사람들에게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그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표류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소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분열된 시대 속에서의 삶의 모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서사시에서 영웅이 오랜 모험 끝에 무엇인가를 획득해서 고향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그의 삶이 풍요해진 반면, 소설 속의 근대적 인물은 자본주의적 물신주의 속에서 고향상실과 더불어 삶의 모든 가치조차 상실하지만 이 과정에서 진정한 투쟁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정신적인 깊이를 자각한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소설에 부여한 이러한 총체성은 좀 더 다른 의미에서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영화 역시 척박한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미천한 표현 양식으로 탄생했지만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양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미지 중심의 문화는 새로운 감성구조와 취향을 가진 수용자들을 생산해 놓았고, 소설은 이전의 문자매체 전성기 주체들과는 다른 수용자를 상대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들은 읽는 것보다는 보는 것을 선호하고, 추상적 사유 대신 구체적인 감각을 요구한다. 이러한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활자매체로서의 소설은 생존경쟁에서 조금씩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적 총체성은 이러한 대중적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표현방식과 서술구조라는 차원에서 확인된다. 소설과 영화 두 양식의 차이를 주목할 때 무엇보다도 구별되는 점은 현실을 구체화하고 문제화하는 표현방식이다. 피상적으로 관찰할 때 영상을 통해서 이미지화한 현실이 평면화, 경박화, 파편화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는 이러한 이미지를 단순히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유의 서사적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활자매체로서는 따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실성과 현실성을 획득한다.

한편, 영화 이미지가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고집하였다면 아직도 그 내러티브의 상투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들뢰즈의 지적이 잘 말해주듯이 소설과 영화 간의 또 다른 차이는 인과성과 전체성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시, 공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서 인과적 질서를 끝임 없이 변조하고 왜곡하며, 결국 인과성의 파괴로도 연결될 수 있는 영화적 구조야말로 예술적 총체성의 새로운 형식인 것이다. 현대미학이 이러한 질서를 주목하는 이유는 서사구조에서의 이러한 비인과성이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개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영화가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보의 형식에서 뿐만 아니라, 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수용자의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영화적 서사는 단순한 시각적 쾌락 이상의 영상적 사유라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매체가 생존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기에 소설이 택한 새로운 자구책은 한 때 적대적 관계였던 영상매체와의 공존이었다. 두 매체의 서사 구조의 유사성과 문화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한 매체에서의 대중적 성공이 흔히 다른 매체에서의 성공까지도 담보해주는 상황으로 인한 것으로 활자와 영상의 이러한 상호 교환은 작가들과 영화 제작자들 모두를 만족시켰다. 이리하여 소비자들은 아직도 활자를 흠모하면서 이 언어적 기호의 추상성과 서사성이 영상 속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즐기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대중매체를 대표하는 영화적 표현과 그 영향력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이전의 엄숙주의와 권유주의가 보장하였던 예술에서의 아우라가 상실된 이 시대에 전통적인 예술 장르들이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헤겔과 루카치적인 예술적 총체성이 다양한 대중매체에 의해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는가를,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른바 탈현대라 일컬어지는 우리 시대의 예술적 사유가 어떠한 자유를 획득하였는가를 이해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지적인 선행 작업임은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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