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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Internment Camp: Brothers’ Welfare Center and the Silent Victims 2<형제 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

형제 복지원의 진상과 그들 2.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사건 중의 하나로 1975년 내무부 훈령으로 제정, 설립된 형제 복지원(대표 박인근, 1975-1987)은 한국이 치른 아시안 게임 (1986)과 하계 올림픽 (1988)을 앞두고,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제정 설립되었다. 이 ‘부랑아 단속’이라는 형식적인 슬로건 안에는 엄청난 계략이 숨겨져 있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발생한 시위는 장기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을 반공으로 묶고, 긴급조치란 이름으로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압력에 대해 반항하며, 국민의 권리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당시 극에 오른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감은 이곳 저곳에서  시위로 일어나곤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대외적으로 감추기위해, 치안과 정치가 불안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미지가 밖으로 내 보일까 염려하여, ‘부랑아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길 거리에서 정말 재수 없으면 경찰의 눈에 띄어 잡혀 들어가는 곳이 바로 형제 복지원이었다. 또 하나는 이들을 단속해서 일정한 장소에 수용하여 값싼, 또는 거의 무료의 노동력으로 누군가는 부를 챙기고 또 그 누군가는 그 부를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므로서 힘 있는 자들의 계산속에서 힘 없는 자들은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수단으로 사용되어도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 영원한 음지인 형제 복지원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이용했다. 왜냐하면 그당시 언론도 마찬가지로 힘 있는 자들과 함께 공생해왔기 때문이었다.

형제 복지원 원생 중 생존자인  이향직씨는 ”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들이 말하는 부랑인과는 아무상관 없는 아이들,직장인,학생,가정주부,등등 이었습니다.물론 극소수의(10%미만) 사람은 저들이 말하는 부랑인도 있긴 했습니다.물론 부랑인 이라도 강제로 잡아가서는 안되겠지만 부랑인을 보살펴준다는 핑계로 아무나 다 잡아 들였던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사람 숫자대로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지원금으로 복지원장 박인근은 자신의 사리 사욕을 위해 시설에 감금된 복지원생 들에게 기본적인 영양공급 조차 시키지 않은 채 돈을 착복하고 원생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돈을 갈취했다고 한다. 원생들은 박인근이라는 인간에게 철저히 인생이 저당잡힌 채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채 살아야만 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형제 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지옥을 경험한 이향직씨를 인터뷰 할 수 있는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 중학교 1학년때 그곳에 입소한 후, 3년 여 동안 (1984년~1987년 4월 23일) 지옥같은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 4살,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어머니의 가출로 인해 7살된 어린 나이에 새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구타는 폭행수준이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어린 소년은 아버지에게 맞지않기 위해, 가급적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는 그는  길거리에서 방황하거나 길거리를 배회하였다. 그러다 어느날 학교에 다녀오는 길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어린 소년은 아버지에게 목덜미를 잡혀 부전시장, 부전역전파출소로 끌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빵과 우유를 주고는  파출소를 떠난 후, 밤에 형제복지원 차가 와서 그는 지옥에 끌려가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행은 어린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그는 말한다. 연탄집게로 맞았고, 가죽 혁대로 맞았으며,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던 어린 소년, 그는 따뜻하게 보호받아야 할 집에서 버림을 받았고, 형제 복지원에 끌려 들어가 이유도 없이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 말은 생모가 바람을 피워서 다른 남자와 달아났다고 했지만 나중에 어른이 된 후, 극적인 어머니와의 상봉으로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밝혀지기까지 했다. 안정되지 못한 가정, 불우한 가정이 자식을 사지에 보내고서도 반성은 커녕 다시 사회에 나와서 힘든 노역을 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용돈을 부쳐주면 조금 밖에 안 부쳤다고 혼나기가 일쑤였다고 이향직씨는 그의 아픔을 숨김없이 말했다. 그 당시 형제 복지원에 끌려온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 없이 부랑아가 아닌, 가족에게서 버림 받은 사람, 어쩌다 회사 퇴근 후, 거나하게 술 한 잔  마신후, 버스를 타려다 잠깐 졸음을 견디지 못해 버스 정류장에서 졸고 있는 남자들이 끌려가서 강제 노역을 했던 경우도 있다.

그들 중 이유없이 폭행 당한 채, 죽어간 사람들은 수천명이다. 물론 기록상은 551명이지만 죽여서 암매장당하기도 했다는 것을 위키피디는 밝히고 있다.

이향직씨는 외친다. “우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저희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30년전의 고통을 온몸으로 되새기려 30년전 그날의 그 지옥으로 돌아 가려 합니다.아무것도 가진것 없고 힘없는 저희[들에게] 지지와 응원 주시는 여러분들만을 믿고서,천리길 걸음걸음에 간절함으로 무장하고서,대한민국 구석구석을 향해 소리치려 합니다.
84ㅡ2934 , 84ㅡ3618 ,80ㅡ4894,…….가축처럼 새겨진 저희 기억속의 숫자들을
이젠 씻어 내고자 합니다.국민 여러분!! 그리고, 페친 여러분!!
저희들의 한걸음 한걸음에 함께 동참하여 주세요.

[ 2017년 9월6일 오전 11시 ]
형제복지원의 옛터 (현 한일유엔아이 아파트)에서
출정식과 기자회견 이후 청와대를 향해 걸어가며
온 국민께 소리 치려 합니다.

“우리도 사람이다! 형제복지원 사건 특별법을 제정하고,진상을 규명하라!” 라고 그의 페이스 북에 호소했다. 이제 형제 복지원 사건 진상이 밝혀져서,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잃어버린 인권을 다시 돌려줘야 할 때가 돌아왔다. 이제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박정희정권에서 전두환정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이 사회에 고발자가되어 고발한다.

과거와  화해 하지 않는 한 과거는 반복을 되풀이 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코리일보/CORE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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